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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평전≫을 읽고 - 2003년에 되살리는 전태일정신
30년 넘게 우리 한국노동자의 정신적 귀감이었던 노동자 한 분을 꼽으라면 누구나 전태일열사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혹 전태일이라는 이름은 쇼윈도우 속에서 찬란한 조명을 받고 있는 마네킹처럼, 살아움직이지 않고 박제화된 노동운동을 세련되게 포장하는 광고처럼 전락한 것은 아닐까? 이제 다시 우리는 참된 의미의 전태일정신에 대해 되새겨보아야 한다.
≪전태일평전≫에 담긴 전태일열사 정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동료노동자에 대한 애정과 헌신”이다. 자신 역시 가장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일하면서도 어린 여성 시다 동료들의 고통에 그토록 가슴아파했다. 너무나 가난했기에 그는 추운 겨울에도 매일 먼거리를 걸어다니면서 차비를 절약해, 그녀들에게 풀빵을 사다주었다. 풀빵에 담긴 마음은 더욱더 자라났다. 동료들을 위해 헌신했던 그는 “노동자도 인간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전체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우리는 그것을 “노동해방의 제단에 목숨을 바쳤다”고 부른다. 이처럼 전태일열사는 우리에게 참된 노동자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그 삶으로 가르쳐주었다.
그 뒤 전태일열사에 대한 기억은 나에게 희미해져갔다. 1970년의 한국노동운동의 상황과 2003년의 상황은 너무나 다르다고 무의식중에 간단히 치부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최근 나는 다시 전태일열사의 정신이 결코 낡지 않았으며, 오히려 바로 그 정신을 되살려야만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전태일정신 계승, 그것은 지금 우리 운동의 얽힌 실타래를 푸는 절체절명의 과제다.
노동자계급의 얼굴, 전태일
지금까지 우리 운동을 좀먹어왔던 가장 커다란 약점은 “조합주의”다. 이 조합주의를 간단명료하게 정의하자면 “전체 노동자들의 공동이익보다 단사, 혹은 부서, 개인의 편협한 이익을 우선시하고, 심지어는 대립시키는 입장과 정서, 실천이다!” 이것은 전태일 열사의 정신과 정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이런 조합주의 운동은 전태일열사 정신을 계승하기는커녕 그 정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있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전태일열사는 자기 자신만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과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았고, 70년대 당시의 열악한 상태에서 그것은 “노동법을 준수하라!”는 장렬한 외침과 분신으로 표출되었다. 이런 결단은 당장 가능한 모든 헌신을 기꺼이 다하는 행동을 통해 준비되었다. 굶주린 여공들에게 풀빵이라도 갖다주기 위해 매일 장거리를 걸어다녔던 일상적 실천, 동료들을 대변하는 끊임없는 시도가 그의 삶의 바탕을 이루었다. 이런 삶의 견고함 속에서만 그는 분신이라는 위대한 결단을 준비할 수 있었다.
반면 조합주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사업장이 아니라면 타사업장 노동자들의 고통과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정신이다. 당장 우리 부서나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으면 모른척하고, 오로지 자기와 직접 관련이 있을 때만 저항하려는 정신이다. “나”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연대를 외치지만 “다른 노동자”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침묵하고 방관하는 정신이다. 비정규직이나 중소영세사업장, 이주노동자 등 다수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고, 오직 대기업노동조합, 그것도 단사 대기업노동조합과 연관되어 있는 문제에서만 “전투적”으로 행동하는 정신이다.
더 근본적으로 접근하면, 전태일열사 정신은 “노동자계급”의 정신이라 정의할 수 있다. 반면 조합주의 정신은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사노동자, 대기업노동자, 부서노동자의 정신을 반영할 뿐이다. 물론 단사투쟁이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개인, 부서의 투쟁이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대립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 단사, 부서, 개인의 투쟁이 노동자계급의 관점을 반영하고, 노동자계급의 정신에 입각해 전개된다면 그것은 분명 노동운동이다. 이는 전태일열사의 분신이 개인적 행동이었지만, 그럼에도 노동자계급의 투쟁이었고 노동운동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많은 투쟁이 아직 조합주의 투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민주노조운동을 병들게 하는 가장 심각한 약점 중 하나다. 최근의 예로는 은행파업을 들 수 있다. 조흥은행노조는 조합주의에 감염되어, 비정규직은행원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했다. 또한 “은행장을 조흥은행에서 선출할 것, 조흥은행 명칭을 사용할 것” 등 노동자의 분열을 초래하는 요구를 전면에 내걸었다. 이와 똑같은 입장에서 신한은행노조는 “조흥은행노조와의 합의 무효, 법정관리 회사인 조흥은행 명칭사용 반대, 통합은행장을 조흥은행에서 선출하는 것 반대”를 내건 시위를 벌였다. 과연 여기에 전태일열사 정신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여기서 동료들과 단결하려는 정신은 오로지 단사 내에만, 그것도 정규직 내에만 국한되어 있다. 타은행노동자들 그리고 비정규직노동자들과는 철저하게 분열되어 있고, 심지어는 대립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다운 투쟁이 아니다.
다음으로 전태일열사 정신은 “선진노동자”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대중들을 위해서 온갖 헌신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려는 투사의 정신이다. 이것은 매일의 장거리 출퇴근과 분신 모두에 관통하는 정신으로서 동료들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고통도 마다하지 않는 선진노동자의 선봉정신이다. 불행하게도 최근 민주노조운동은 이 정신 대신 대중 위에 군림하고 지도부 자리를 출세와 편안함의 도구로 삼는 관료주의의 독버섯에 심각하게 뒤덮여있다. 관료주의자들, 그리고 헌신과 희생정신, 사명감이 빠진 김빠진 활동가들은 전태일열사를 계승하는 진짜 선진노동자가 결코 아니다.
또한 과거 폴란드자유노조운동의 전성기 때, 자기의 요구는 완전히 관철되었지만 다른 노동조합의 승리를 돕기 위해, 전체 자유노조 중 단 하나라도 파업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 이상 끝까지 남아서 파업을 계속했던 그다니스크조선소노조와 같은 선봉노조만이 전태일열사의 선진노동자정신을 담고 있는 노조다. 반면 스스로는 누누이 “민주노총의 주력, 심장”이라고 말하지만 전체 노동자계급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겁내고 오히려 민주노총을 단사의 도구로 이용하는 대기업노조들은 전태일정신과는 정반대편에 있는 위선자들일 뿐이다.
진정한 전태일정신을 향하여
진정한 전태일열사 정신을 오늘날 되살리지 않는다면 한국노동운동의 미래는 없으며, 또한 지속적인 퇴보와 타락 또한 막을 수 없다. 그렇기에 30년 이상 지났지만, 전태일열사의 삶과 정신을 되새기는 것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전태일열사 정신이라는 열쇠로 우리 운동의 질병을 고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며, “진짜 노동운동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것이다. 70년 당시에 비해 겉으로는 공룡처럼 거대해져 있지만, 우리 한국노동자운동은 전태일열사가 삶과 죽음 모두로 웅변했던 노동운동의 정신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다. 노동자계급의 운명을 지켜주고 모든 노동자들에게 꿈과 용기를 주는 위대한 운동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우리는 노동운동이란 무엇인지, 노동자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다시 질문해야 한다. ≪전태일평전≫은 그 질문에 아주 소중한 답을 제공할 것이다. 그것이 다시 ≪전태일평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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