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본시장통합법은 파산한 ‘월스트리트 모델’을 따라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길이다.(사진_한겨레)
자본시장통합법 - 더 거대한 위기로 가는 길
<가자! 노동해방> 23호 기사(2009년 2월 19일자)
올해 2월 4일부터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증권거래법, 선물거래법, 증권선물거래소법, 자산운용업법, 신탁업법, 종금법, 기업구조조정투자회사법 등으로 나뉘어 있던 증권 관련법을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로 통합한 것이다.
무엇을 원하는가
이에 따라 증권업, 자산운용업, 선물업, 종금업, 신탁업 등 5개 업종이 ‘금융투자업’으로 합쳐졌다. 즉 여러 업종 사이에 있던 칸막이를 없애고 새로운 금융상품시장을 창출한다는 것이 자본시장통합법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부가 원하는 목표는 간단하다. 자본시장에 대한 규제를 풀어 경쟁을 강화하는 것, 그 과정에서 금융사들의 몸집을 불려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다. 골드만삭스와 같은 위세 넘치는 대형 금융회사의 등장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됨으로써 이제 무제한으로 새로운 금융상품이 쏟아져 나올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파생상품의 범위도 넓어졌다. 날씨, 온도, 에너지와 대체에너지, 이산화탄소 배출권, 범죄발생률 등의 사회현상, 거시경제변수 등과 연결된 다양한 금융상품이 나타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그러나 이 자본시장통합법은 시행되기도 전인 지난해부터 벌써 반론에 부딪혀왔다. 그 이유 또한 간단하다.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와 그에 뒤이은 치명적인 경제위기로부터 사람들이 배웠기 때문이다.
낭떠러지로 달려가기
미국에서는 1999년 그램리치브릴리법이 만들어지면서 은행업, 증권업, 자산운용업 사이의 칸막이가 사라졌다. 한국의 자본시장통합법이 노리는 목적과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투자가 허용되고 무제한적이고 새로운 금융상품이 쏟아져 나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이후 그 결과는 파국적이었다. 2008년 3월, 미국의 5위 투자은행인 베어스턴스가 무너졌다. 이어서 메릴린치는 36년 간 벌어들인 이익의 4분의 1을 날리고 매각됐다. 페니매와 프레디맥, 그리고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했다.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도 사실상 파산했고, 세계 최대 투자회사인 골드만삭스 역시 1999년 이후 최초로 손실을 입으며 정부로부터 1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아 가까스로 생존했다.
1970년대 이후 만성적으로 지속된 불황 즉 ‘실물경제’의 침체를 가상적인 금융시장의 거품으로 띄워보려 한 시도가 마침내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것이다. 실물경제와 괴리된 가상적인 금융시장의 부흥이 현실의 위기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 ‘결국에는 터진다’는 운명을 안고 태어나는 거품은 실물경제의 파산을 단지 ‘지연’시킬 수 있을 뿐,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파산을 지연시킴으로써 - 동상에 걸린 발을 자르지 않아 온몸이 썩어 들어가듯 - 체제위기의 깊이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다.
한국의 자본가정부는 뒤늦게 지난 시기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금융거품을 키워 실물경제 위기에 대처하려 한다. 미국경제를 낭떠러지로 몰아간 바로 그 길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것이다. 자본시장통합법이 도달할 ‘미래’란 ‘현재의 미국’ 바로 그것이다.
자본가 살리기인가 노동자 살리기인가
한국의 자본가들 역시 앞으로 어떤 일들이 닥칠 것인지 냄새를 맡았다. 동양종금증권 윤성희 이사는 “대형사와 특화된 소형사 위주로 증권업계 판도가 재편될 전망”이라며 “대기업이나 금융지주사를 끼지 않은 중형 증권사들은 제휴나 인수 합병으로 살 길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2월 13일자 <한겨레>) 아무리 그럴듯한 법률로 자본투자를 활성화시키려 해도, 이미 미국과 유럽의 쟁쟁한 금융회사들이 전 세계를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는 마당에, 도대체 어디에서 투자처를 찾을 것인가?
결국 ‘증권업계 판도가 재편될 전망’이라는 담담한 표현은 현실에서 피범벅의 경쟁과 무수한 파산사태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주의가 연명하는 방식이다! 누군가가 먼저 목 졸려 쓰러질 때까지 경쟁이라는 정글의 법칙으로 서로의 목을 더욱 강하게 칭칭 감는 것, 그리고 그 손실과 피해를 고스란히 노동대중에 떠넘기는 것 말고는 자본가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남는 문제는, 과연 언제까지 노동자가 자본가의 생존을 위해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가이다. 자본가체제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노동자에게 손실을 떠넘기려 할 것이다. 폐업으로, 정리해고로, 임금삭감으로, 비정규직화로, 협박으로, 기만으로, 경찰특공대로. 그리고 만약 노동자가 이런 책임전가를 허락한다면, 착취자인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희생을 발판으로 끊임없이 이 사회를 말아먹을 것이다.
저들이 불러올 파국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자본시장-도박판을 뒤집어엎어야만 한다. 모든 은행과 금융사들을 몰수하고 단일한 국영은행으로 통합하는 것, 그것을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통제 하에 둘 것을 목표로 투쟁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오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