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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교양도서 2권_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좌절, 그리고 한국노동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
 사노련  | 2009·11·11 23:17 | HIT : 3,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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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련에서 발행한 <일하며 배우는 노동자 교양도서> 2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에 실린 글입니다.)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좌절, 그리고 한국노동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

    최영익

    한국 노동자계급에게는 위대한 혁명의 전통이 있다. 이미 자본주의의 발전이 인종과 국경을 초월해 세계적인 보편계급으로서 국제 노동자계급을 창출한 이래 어떤 나라의 노동자계급의 혁명전통도 더 이상 일국의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선언 이래 모든 나라의 노동자 혁명의 전통은 움켜쥔 단결의 손과 투쟁의 혈관을 타고 전 세계 방방곡곡의 노동자 운동에 훌륭한 자양분을 공급해 왔으며, 투쟁의 몸을 강하게 만들어 왔다.

    그 전통의 가장 빛나는 지위는 사회주의 혁명을 이룬 러시아 노동자계급에게 부여되어 왔으며 러시아 혁명은 모든 나라의 노동자 투사들과 사회주의자들의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다. 따라서 러시아 10월 노동자 혁명의 전통을 복원하는 일은 한국 노동자계급의 혁명의 전통을 복원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 점에서 1917은 노동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모든 투사들의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숫자다. 러시아 노동자들이 세계 역사상 최초로 권력을 장악하고 노동해방 사회를 건설하는 거대한 과업을 개시한 해가 바로 1917년이기 때문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충격파는 엄청난 것이었고, 가히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건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1912년을 전후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모순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시장에는 팔리지 않는 상품들이 넘쳐 났고,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서구 열강의 자본가들은 식민지 점령 정책을 확대했다. 식민지에서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내고,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식민지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결국 서로 식민지들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격화되었고, 이것은 세계 대전을 불러왔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의 폭풍우 속에서 세계 노동자계급은 타국의 노동자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돌리도록 강요받았다. 사회주의를 목표로 삼는 노동자 당으로 자칭하고 있던 거의 대부분의 당들이 자본가 권력의 살인적 위협 앞에서 노동자 국제주의를 배신했다. 이들은 노동자들에게 ‘다른 나라 노동 형제들을 살해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속삭였다.

    또한 당시의 자본주의 위기 앞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모든 부담을 전가시켰다. 대량 해고, 임금 삭감이 전염병처럼 번졌다. 이런 공격을 관철시키기 위한 파시즘적 폭력이 노동자 조직들과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가해졌다. 그러나 개량주의 정당의 지도자들은 실업과 가난에 신음하는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하니 얌전히 착취에 순응하라’고 속삭였다. 세계노동운동은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배신 속에서 처절하게 와해되어갔다. 노동자들의 삶은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다. 그 대가로 이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국회의원직과 장관직 같은 안정적인 지위를 보장받았다.

    바로 그 순간, 러시아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실업과 가난을 없애자’고 러시아 노동자들은 궐기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반동국가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생산현장 단위에 기반을 둔 노동자 대중권력을 우뚝 세워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제국주의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지 않겠다. 총구를 다른 나라 노동형제들이 아니라 전쟁의 주범들에게 돌려 전쟁을 없애버리겠다’고 선언했다. 이 위대한 행위는 곧장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타전되었다.

    잠시 멍멍한 상태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세계 선진노동자들과 노동해방을 지향하는 투사들은 곧 러시아에서 새로운 희망의 빛이 탄생했음을 직감했다. 그와 동시에 “개량주의와 민족주의를 분쇄하고 노동자 해방투쟁으로!”가 그들의 구호가 되었다. 노동운동을 지배해왔던 개량주의 세력은 급속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진적인 투사들은 직감적으로 개량주의 정당에서 이탈해서 혁명적 노동계급정당을 향해 전진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러시아혁명, 그리고 러시아 노동자권력, 마지막으로 러시아 혁명적 노동자당이 그들의 지향점이 되었다. 세계는 노동해방을 향해 파도치는 거대한 노동자 투쟁들로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썰물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90년대 초, 세상의 모습은 1917년 당시와 정반대가 되어 버렸다. 러시아에서 이른바 노동자국가라고 자칭했던 국가가 붕괴되어 버렸다. 문제는 붕괴라는 결과가 아니었다. 투쟁하다보면 질 수도 있고, 쟁취한 진지를 빼앗길 수도 있다. 그러나 옳다면 그 패배를 딛고 운동은 더 멀리 도약하기 마련이다. 진정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붕괴한 그 국가가 노동자계급이 절대 옹호할 수 없는 완전히 타락한 권력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권력은 통상적인 자본가권력과 비교할 때도 결코 우월성을 주장할 수 없고, 노동자계급을 잔인하게 억압하는 반동권력이었다.

    바로 그 순간 세계의 수많은 선진노동자들이 노동해방의 혁명적 전망을 놓아버리고 비틀거렸다. ‘저게 노동자의 권력이라면, 자본주의보다 더 나을 게 뭐가 있겠는가?’ 바로 이것이 그들의 마음을 쓸고 지나간 충격의 핵심이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이 충격이 더 컸다. 선진노동자들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순간적인 혼란을 극복하면서 침착하게 전진할 수 있도록 이끄는 전위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세력도 90년대 초반에 러시아에서 전개되는 사태를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개량주의자들은 이 기회를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앞 다투어 회개와 고해성사를 하면서 이미 내딛기 시작하고 있던 개량주의적 발걸음을 더욱 본격적으로 내딛었다. “급진적 전망은 포기해야 한다.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자본주의를 노동자에게 좋은 방향으로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가 그들의 외침이었다.

    노동해방의 전망을 상실하고 혼란에 빠진 선진노동자들은 개량주의자들의 목소리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노동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하고자 했던 선진노동자들의 대부분이 무력화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개량주의 입장에 감염되어 버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17년에는 세계노동운동을 앞으로 거세게 밀어붙였던 러시아가 90년대 초에는 세계노동운동을 더욱 뒤로 밀어붙이는 강력한 도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모든 나라들에서 똑같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래 전에 이미 러시아국가가 노동자국가에서 반동관료들의 국가로 타락했다는 사실, 즉 권력이 노동자계급의 수중에서 국가관료 자본가 층으로 이전되었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는 세력이 존재했던 나라들에서는 개량주의자들이 아니라 노동해방 경향이 오히려 성장했다. 그들은 ‘러시아 반동국가가 완전히 몰락함으로써 진정한 노동해방 경향이 전진할 수 있는 토대가 열렸다’고 자신만만하게 상황을 맞이했다. 진실은 무엇일까?

    질문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과연 진정한 노동자 혁명이었는가? 그래서 한국 노동자계급을 비롯해 전 세계 노동자계급이 노동해방의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 혁명이었는지”, 그리고 “왜 1917년에 형성된 노동자권력이 반동관료들의 권력으로 변질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 처절한 경험으로부터 한국 노동자계급이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해방을 달성하기 위해 배워야 할 교훈을 정식화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선 다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은 완전무결하고, 또한 아무런 오류와 실패도 없이 직선적으로만 전진하는 운동이 아니다!” 노동운동은 부단한 오류와 실패 속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세력으로 노동자계급이 단련되는 일련의 과정이며, 이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은 수시로 자기 내부로 스며든 자본주의적 요소와 마주치게 된다. 이것이 작용한 결과, 노동자계급은 비틀거리며 거대한 패배와 마주치곤 한다. 이 불가피한 패배를 견디어내면서, 자기 내부의 약점을 교정하고 자본주의적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비로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운영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획득한다.

    민주노조운동의 예를 들어 보자. 여러 한계가 있었지만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약 5년간 대단한 활력과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노동자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고, 투쟁과 연대의 기운이 용광로처럼 폭발했다. 이 속에서 투지와 용기, 자부심, 책임감을 가지고 있고, 노동운동의 대의에 무한히 충실한 선진 투사들이 솟구쳐 올랐다. 이에 비한다면 2008년의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명백히 후퇴해있다.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1987년 당시의 민주노조운동의 원칙과 전통과 완전히 대립하는 약점들, 질병들에 신음하고 있다. 1987년에 탄생한 위대한 지도자들의 대부분은 지금 대부분 병든 패잔병이 되어 배신을 일삼고 개량주의적 전망에 몸을 맡기며 용기와 대의에 대한 충성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심지어는 그들은 관료가 되어 노동대중 위에 군림하며, 노동운동을 출세를 위한 지렛대로 삼고 있다.

    자, 여기서 ‘민주노조운동은 끝났다’는 결론을 내리고 운동을 청산할 것인가? 그리고 한줌 관료들의 배신과 타락을 이유로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은 소멸했다. 노동운동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세상을 건설할 수 없다’고 선언해버릴 것인가? 아니면 변질의 원인을 밝혀내고, 관료들을 노동운동에서 추방하며, 커져가는 약점들을 각고의 노력으로 도려내며, 87년을 능가하는 더 거대하고 완전한 민주노조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전진할 것인가? 너무나 지쳐버려서 더 이상 자신을 지탱할 에너지가 고갈된 사람들은 물론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전진하고자 하고, 이 가증스런 착취와 억압에 맞서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단연코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우리는 이 후자의 정신에 입각해서 ‘러시아 노동자혁명’에도 접근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혁명적 전망”은 자본주의 착취와 억압을 근본적으로 박살내지 않고서는 결코 해방될 수 없는 노동자계급에게는 사활적으로 중요한 전망이기 때문이다.

    1. 1917년 러시아 노동자 혁명

    “아니 실패한 혁명을 뭐 하러 검토하려 하는가?”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을 다루려 할 때 가장 먼저 나올 수 있는 반론일 것이다  하지만, 10월 혁명은 결국 스탈린주의 반혁명에 자리를 내주기는 했지만, 약 10년 이상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던 유일한 경험이었다. 혁명의 준비과정, 혁명의 실행, 반혁명에 맞선 투쟁, 당의 지도적 역할, 일국혁명과 국제혁명의 상호작용 등 10월 혁명이 제기한 많은 문제들은 전 세계 노동자 투사들에게 일반적인 의의를 지닌다. 이후 ‘새로운 모범’이 창출되기 전까지는 러시아 10월 혁명은 ‘노동자계급이 가장 멀리까지 나아가고 가장 높이 솟구쳐 오른 경험’으로서 계속 남게 될 것이다. 이 경험을 토대로 삼아, 다음번 세계 노동자 혁명은 러시아 노동자 혁명이 도달했던 가장 높은 고지에서 출발하게 될 것이며, 러시아 노동자 혁명이 멈추었던 그 지점을 넘어서서 승리의 고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반론도 나올 수 있다. “10월 혁명은 노동자 혁명이었지만 결국 스탈린주의를 낳지 않았는가? 스탈린주의 반동 권력의 어머니는 17년 10월 러시아 노동자 권력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10월 러시아 혁명을 지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 것은 10월 혁명과 스탈린주의 반혁명 사이에는 ‘노동자계급의 피의 강물’이 흐른다는 사실이다. 이 ‘피의 강물’ - 노동자 권력을 국가관료들의 권력으로 바꿔냈던 반혁명 - 을 진지하게 검토한다면, 다음의 결론이 나온다: “스탈린 관료권력은 10월 노동자 권력의 계승자가 아니라 파괴자다! ‘왜 파괴되었는가’를 질문하고 그 예방책을 세우는 것은 진지한 혁명적 투사들의 접근법이다. 그러나 그것을 묻지 않고, 10월 노동자 혁명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세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전통을 거부하는 개량주의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10월 노동자 혁명이 만들어낸 노동자 권력과 중국과 북한 등에서 수립된 정권을 반드시 구분해야 한다. 이 두 가지 권력은 전혀 다른 계급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계승하고 그 약점을 극복해 완성시켜야 할 권력은 러시아 10월 혁명이 탄생시킨 노동자 권력이지 중국과 북한의 권력이 아니다.

    먼저 중국, 북한의 경우 노동자계급이 주인이 되어 성공시킨 노동자혁명이 없었다. 중국, 북한의 노동자계급은 농민이 주축이 된 민족해방혁명의 수동적 방관자로 머물도록 강요당했고, 자주적 행동을 봉쇄당하기까지 했다. 중국과 북한에서는 노동자민주주의 권력이 존재했던 적이 애당초 없었다.

    사회주의는 곧 노동자계급이 세상의 주인으로 우뚝 서는 것, 즉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이다. 노동자계급이 생산과 정치의 주인이 아니라 지배계급을 위한 희생양이 되고 있는 나라는 사회주의의 이름을 도용할 자격이 조금도 없다. 10월 혁명의 참모습을 정확히 검토함으로써 우리는 가짜 사회주의 체제와는 180도 다른 ‘노동해방의 진정한 전망’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10월 혁명의 객관적 조건

    10월 혁명은 일부 몰상식하고 악의적인 자본가들이 떠들어대듯이 몇몇 혁명가들의 선동으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10월 혁명은 귀족, 왕정, 관료집단 등 구 지배세력의 부패, 러시아 자본가계급의 착취와 무능력, 지주들과 자본가들은 제대로 풀 수 없었던 취약한 농업문제 및 피억압 민족문제,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힘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역사적 작품이었다.

    ▲ 러시아 혁명에서 볼셰비키의 요새가 되었던 푸틸로프 공장

    러시아는 후진적 자본주의 나라이기는 했지만, 노동자계급마저 후진적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전체 러시아를 끌어갈 수 있는 선진적인 힘을 갖추고 있었다. 천명 이상을 고용한 대기업이 미국은 공업노동자 전체의 18% 미만을 고용하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41%일 정도였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선발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러시아에 자본을 수출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조건들은 러시아 노동자계급에게 거대한 잠재력을 제공했다. 그 잠재력은 노동자 투쟁에서 유감없이 드러났다. 러시아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의 힘은 강력했고, 그 파급력은 엄청났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 사상을 흡수하는 데서도 대단히 빨랐다.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랜 경험이 필요했다. 생디칼리즘, 무정부주의, 개량주의 등의 폐해와 한계를 경험하면서 유럽의 노동자들은 사회주의를 자신의 사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달랐다. 이들이 역사적 무대 위에 막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미 유럽 노동운동에서 사회주의는 보편적 이념이었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중간항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회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러시아 노동운동은 사회주의 운동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탄생했고, 이 ‘연결성’은 러시아 노동운동에 거대한 활력을 부여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봉건 권력의 정치적 지배와 나란히 낙후된 봉건 농노경제가 광범하게 잔존하고 있는, 아직 자본주의가 전면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나라였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았다. 1917년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는 아직 러시아 사회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했다. 약 1억 3천만 정도의 인구 중에서 영구적인 산업 노동자 수는 1914년에 3백만 명(가족 포함 시 약 1,200만 명)을 다소간 넘어섰다. 나머지 인구의 압도적 다수는 농민들로 이뤄져 있는 소부르주아적인 나라였다.

    그러나 이런 객관적 수치가 던져 주는 외면적 느낌과는 달리 러시아 산업 노동자들이 전체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실제 영향력은 그것을 훨씬 능가했다. 러시아에는 약 900만 명(가족 포함 시 약 3,000만 명)의 광범한 半노동자층이 있었다. 이들은 자기 가족과 함께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빈농인데, 이미 자본주의가 농촌까지 침투함에 따라 창출된 농업 자본가와 부농들에게 일시적으로 고용되거나 아니면 농한기에 주변의 공업 도시 공장에 취업해 계절노동자가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소부르주아 농민으로서의 성격과 더불어 노동자로서의 성격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이들은 도시 산업 노동자들과 다수의 농민 사이를 매개하는 전달벨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전체 인구의 1할에 불과한 러시아 산업 노동자들은 그것의 몇 배 이상에 달하는 실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이미 1894년에 이르면 페테르스부르크를 중심으로 여러 도시에서 산업 노동자들은 광범한 경제파업을 벌여나갔고 20세기 초에는 짜르에 대항하는 강력한 정치적 운동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1905년에는 짜르에 대항하는 혁명을 일으키고 이 혁명은 비록 패배했지만 노동자들은 그것을 통해 이후의 승리를 위해 필수적 자양분을 섭취한다.

    1905년 혁명은 위대한 학교였으며, 러시아 노동운동 지도자의 말을 빌리면 1917년 혁명의 ‘예행총연습’이었다. 혁명 시기의 노동자 공동투쟁체이자 노동자권력의 맹아였던 소비에트가 1905년 처음으로 수립되었다가 1907년에 혁명의 물결이 퇴조하자 사라졌다. 그러나 1917년에 러시아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소비에트는 1905년보다 훨씬 강력했다. 1917년 소비에트는 1905년 소비에트가 멈춘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했고, 훨씬 멀리 전진했다.

    게다가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은 모든 모순들을 더욱 격화시켰다. 그것은 후진적 대중을 마비상태에서 깨어나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러시아사회가 자신의 뱃속에 10월 혁명을 잉태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어떤 혁명세력도 혁명을 탄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혁명세력은 단지 출산을 돕는 산부인과 의사의 역할만을 할 수 있을 뿐, 혁명의 출산 그 자체는 오직 노동자계급 자신의 결단과 확신, 자신감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10월 혁명의 주체적 조건

    가장 우선 언급해야 할 것은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선진성이었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눈부시게 빠른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했고, 소비에트와 같은 대중투쟁기구를 창조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사회주의를 굳건하게 지지했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노동운동이 탄생한 이래,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압도적 다수가 사회주의를 내건 정당들만을 지지했다. 또한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의회주의나 개량주의 병균들로부터 자유로웠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던 짜르 체제는 의회주의 병균들을 양성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노동조합마저도 불법화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의회 바깥의 노동자 투쟁, 그리고 합법주의에 갇히지 않는 과감한 투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힘은 결정적인 국면마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이 힘이 흩어지지 않도록 모아낼 수 있는 안내자이자 지도세력이 있어야만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볼셰비키라는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혁명적 노동자당’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당은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힘을 조직한 당사자였지만, 동시에 이런 훌륭한 당이 다른 나라가 아닌 러시아에서 창조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놀랄만한 선진성이 바로 ‘훌륭한 혁명적 노동자당’이 러시아에서 등장할 수 있었던 객관적 토대였다.

    볼셰비키는 이론적 명확성과 혁명적 결의에서 유럽의 오래된 다른 정당들을 훨씬 능가했다. 이 정당은 러시아의 혁명적 투쟁전통을 계승하고 한층 발전시켜 나갔으며, 국제 노동운동의 모든 경험들을 흡수해서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 나갔다. 혁명적 원칙과 헌신을 규범으로 삼고 있었고, 1905년 혁명의 격동 속에서 강철같이 단련되었다. 반혁명 기간에는 1905년 혁명의 경험을 검토하면서 다가올 혁명에 필요한 교훈들을 도출했다. 혁명적 조직의 정체성을 사수하면서도, 최대한의 유연성을 발휘하여 노동대중과 결합해나갔다. 그와 함께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영국의 노동조합주의, 민족주의적 편향에 맞선 국제주의의 심장으로 자신을 키워나갔다. 이것은 혁명이 발발하면 이 혁명을 이끌 수 있는 지도 세력이 러시아에 존재하고 있음을 뜻했다. 이는 다른 자본주의 나라들에는 없었던 러시아만의 특별한, 그리고 아주 결정적인 장점이었다.

    혁명의 시작 - 2월 혁명

    1917년 2월, 철옹성처럼 보였던 짜르 전제 정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수백 년 동안 유지해왔고, 또 1905년에서 1907년까지 3년여 동안 노동자 민중이 전국에 걸쳐 거대한 투쟁을 전개했음에도 붕괴되지 않았던 짜르 군주제가 단 8일 만에 붕괴했다는 이러한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세계사적 중요성을 지닌 수많은 요소들의 결합이 요구되었다.

    우선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선진성을 들 수 있다. 1905년에서 07년 사이에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보여준 거대한 계급투쟁과 혁명적 에너지가 없었다면, 그래서 그 기간 동안 충분한 예행연습을 거치지 않았다면, 2차 혁명[1917년 2월 혁명]은 그 초기 단계가 며칠 만에 완결되는 그러한 빠른 속도로 진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1차 혁명(1905년 혁명)과 그에 이어진 반혁명의 시기(1917-1914)는 짜르 군주제의 본질을 폭로해 주었으며, 짜르 군주제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갔다. 이 반혁명의 시기 동안 러시아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인민들은 짜르를 타도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더욱 확실히 했다. 1905년에서 1907년 사이의 혁명과 1907년에서 1914년 사이의 반혁명은 러시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계급들이 자기 입장을 명확히 하도록 만들었고, 이들 계급의 서로에 대한 그리고 짜르 군주제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갖도록 밀어붙였다.

    이러한 것들은 1917년 2월에서 3월에 걸친 혁명의 8일 동안 스스로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이것에는 한편으로는 역사의 진행을 대단히 가속화시킬 수 있는,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비길 데 없이 격렬한 경제적, 정치적, 국가적, 국제적 위기를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거대하고 강력하며 전능한 무대감독이 더해져야만 했다. 이러한 전능한 ‘무대감독’, 이러한 강력한 가속기는 제국주의 세계전쟁이었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전반적 위기를 반영한 이 세계대전은 러시아에서 이미 성숙하고 있던 계급투쟁을 본격화시켰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분출시켰다.

    2월 혁명의 초기 단계는 먼저 서로 적대적인 두 세력이 짜르 체제에 가한 공동의 타격으로 특징지어졌다. 그 두 세력 가운데 하나는 러시아 자본가계급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들과 정부였다. 다른 하나는 병사와 농민의 대표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였다.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계급 -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 이 일시적으로 공동전선을 꾸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짜르 체제 타도가 공동전선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공동전선은 짜르 타도가 분명해지자마자 곧장 서로간의 치열한 계급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적과의 동침’이었다.

    러시아와 유럽 자본가계급의 생각은 이랬다. “짜르 정부로는 더 이상 노동자 농민들의 저항을 진압할 수 없다. 병사들의 규율을 집행할 힘도 없으니 강력한 힘으로 제국주의 전쟁을 밀어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이참에 짜르 정부를 무너뜨리고 자본가 권력을 세워서 노동자 민중의 저항을 약화시키고, 제국주의 전쟁을 확대 강화하자!”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민중의 생각은 달랐다. “짜르 정부는 자본가들 편을 들어왔고, 노동자 민중의 생존의 요구를 억압해왔다. 짜르 체제를 분쇄하고 민주주의적 권리를 쟁취하자. 그래서 자본가계급에 맞선 투쟁을 더 강화하고 전쟁을 종식시키자!”

    이 두 세력이 모두 짜르 정부에 맞서 투쟁을 전개하자,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 자본가 정부가 짜르 정부를 포기하고 자본가 정부를 세우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려 국제적 지원이 끊기자 짜르 정부는 8일만에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짜르 정부의 몰락은 새로운 계급투쟁, 아니 진정한 계급투쟁 - 자본가계급 대 노동자계급 - 이 시작되는 것을 뜻했다. 1917년 혁명은 종결된 것이 아니라 짜르 타도와 함께 진정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혁명의 위기

    2월 혁명 시기에 실제로 목숨을 걸고 짜르 타도에 나선 것은 노동자계급과 푸른 제복을 입은 농민으로서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혁명투쟁 과정에서 독창적인 혁명기관을 창출했다. 그것은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였다. 이에 고무 받으며, 그리고 이미 중앙권력이 무너져 내림으로써 자신을 보호할 어떠한 장치도 없는 취약한 상태로 내몰린 지주들에 대한 투쟁을 벌이면서 농민들은 농민 소비에트를 속속 건설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소비에트 기관들이 레닌과 볼셰비키가 누누이 강조한 노동자-농민의 민주주의 독재 기관이었다.

    만약 이 기관이 부르주아지에 대한 어떠한 신뢰도 보내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민주주의 권력을 형성했다면 러시아 노동자 혁명은 보다 빠르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었다. 봉건 권력의 타도와 함께 수립된 노동자-농민의 민주주의 권력은 그 자체로는 아직 사회주의 노동자 권력은 아니지만 부르주아지와의 계급투쟁을 통해 노동자-빈농의 사회주의 권력으로 성장전화할 수 있었다.

    실제의 역사는 그렇게 직선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러시아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농민들은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봉건 국가 권력을 무너뜨렸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주는 기묘한 현상이 발생했다. 짜르 군대와 투쟁하고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린 사람은 당연히 자본가들이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 병사와 수병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자본가 정당인 ‘카데트’가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이해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자본가계급이 부와 조직과 지식을 소유했기에 노동자 민중들의 의식은 단번에 권력을 잡을 만큼 충분히 성숙할 수가 없었고, 권력은 자본가 정당에게 넘겨진 것이다. 하지만 자본가계급이 확고히 권력을 장악한 것은 아직 아니었다. 소비에트 형태로 노동자 민중들이 무장하고 있었고, 이 힘을 분쇄하지 않는 한 자본가 권력은 결코 완전한 권력이 될 수 없었다.

    그 결과 한편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창출된 노동자·병사·농민 소비에트가 존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소비에트의 지지 아래 부르주아지가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이중권력 상태가 발생했다. 이 이중권력 상태는 10월 노동자 혁명에 이르기까지 지속된 기본적인 상태였는데,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 사이의 계급투쟁을 전면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봉건 권력이 붕괴되면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이 순수하게 정치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혁명 시기는 영구히 지나갔다. 이제 어떤 식으로든지 민주주의 혁명의 시기는 끝난 이상 다음의 혁명, 즉 사회주의 혁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임무가 되었다.

    소비에트의 운명

    ▲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소비에트를 창출하고 농민들을 지도하며 전진하고 있던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동요하는 소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다. 사회혁명당은 노골적인 소부르주아 정치세력이었고, 멘셰비키는 노동자 정당이기는 했지만 사실상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서 동요함으로써 소부르주아적 한계를 드러냈다.

    이 소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은 소비에트 노동자들에게 “자본가 정부를 지지하는 것이 혁명을 방어하는 것이다”고 속삭였다. 러시아 노동대중은 부르주아 권력인 케렌스키 임시혁명정부를 지지함으로써 무언가를 개선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아직 충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 소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를 통해 무장하고 있었으며, 병사 소비에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투쟁을 통해 파괴된 구 반동 국가기구가 자본가계급에 의해 아직 완전하게 복구되어 부르주아 국가기구로 전화하지 못한 상태였다. 카데트 자본가 정부는 아직 완전한 자본가 권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당시에 전쟁성(국방장관) 구치코프는 3월 초 군 사령관들에게 아래와 같이 말했다.

    임시정부는 어떠한 실질적 권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임시정부의 지시나 명령들은 노동자와 병사 소비에트에 의해 허용되는 정도로만 수행되었다. 결국 소비에트가 실질적인 권력의 모든 본질적인 요소들을 향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것은 군대와 철도, 우체국 그리고 전신소 등이 모두 그들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딱 잘라 말해서 임시정부는 소비에트가 인정하는 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다고 하겠다.1)

    정식화하면, 한편으로는 봉건 국가기구는 파괴되었으나 아직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완전하게 창출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무장한 노동자-농민 소비에트라는 극히 새로운 국가기구가 생겨났으나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불합리한 신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하기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당시의 이중권력 상황이었다. 혁명의 전진을 위한 관건은 노동대중의 불충분한 계급의식이 충분히 발전해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 수중에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 그 힘으로 착취와 억압을 철폐하는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하는 것이 가능해질 수 있었다.

    혁명이 가속 페달을 밟다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에서 동요한 중도주의 세력(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세력)은 러시아 노동자대중의 엄청난 잠재력을 불신했으며, 노동자계급의 힘에 의지하기보다 자본가계급과의 협력에 온 힘을 쏟았다. 이들 중도주의 세력은 자본가들과의 협력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을 탄압했으며, 노동대중에게 혁명의 중단을 호소했다. 그들이 노동대중의 지지를 상실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1917년 2월 혁명을 통해 러시아 대중은 중도주의자들(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등의 개량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소비에트에 대한 지도권을 부여했지만, 그들은 자본가들과의 타협에 모든 정력을 소비해 버렸으며, 러시아를 전쟁과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할 단 하나의 실천적인 방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아가 중도주의자들은 자본가계급의 주문대로 노동자, 병사, 빈농들의 소비에트조차도 파괴하려고 광분하고 있었다. 이 소부르주아 정치세력의 본질과 거짓말을 느끼기 시작하자, 노동대중은 그들의 통제로부터 벗어나서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1917년 7월에 노동자 병사들 수십만이 전개하는 거대한 시위가 러시아 전역에서 전개됐다. 노동자와 인민대중은 2월 혁명 이후 들어선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빵도, 평화도, 자유도 줄 수 없고, 오히려 그것들을 더 박탈하려 한다는 점을 느끼고 있었다.

    7월 시위 이후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노동자 혁명운동을 진압하는 작업을 더 서두를 필요성을 느꼈다. ‘자본가들은 2월 혁명의 성과로 탄생한 작은 민주주의조차 파괴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기도 했고, 소비에트 등 노동대중의 조직을 파괴하기 위해 식량 운송을 중단하고, 공장을 폐쇄하고 연료와 원료를 빼돌렸으며, 전선에서의 사형 제도를 부활하고, 군사적 패배를 공모했다.’2) 레닌은 ‘독일첩자’로 낙인찍혀 도망쳐야 했고, 트로츠키는 수감됐으며, 볼셰비키 신문사는 폐간됐다. 노동자 소비에트들이 무장해제 위협을 받았다. 이것은 불완전한 이중권력 상태를 자본가계급의 완전한 권력 장악의 단계 - 자본가계급의 폭력적 국가기구들의 완전한 부활 및 노동자 소비에트의 파괴 - 로 이행시키고자 하는 자본가계급의 의중을 반영했다.

    하지만 8월에 발생한 코르닐로프의 군사쿠데타는 정세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낡은 체제 부활을 목적으로 하는 코르닐로프 쿠데타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볼셰비키의 지도에 따라 노동자와 병사들은 코르닐로프 쿠데타가 무엇보다 노동자계급과 병사들의 자주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책동이라고 파악하면서 투쟁했다. 이런 투쟁의 과정에서 볼셰비키 당만이 대중을 대변하고 이끌었기 때문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부터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확고해졌다. ‘6월에 그들(볼셰비키)은 쫓기고 경멸당했지만, 9월에는 대도시 노동자들, 발트 함대의 수병들, 병사들을 자신들의 대의 속에 끌어 들일 수 있었다.’3) 그래서 10월경에는 전체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상태로까지 나아갔다.

    이제는 노동자권력으로 과감하게 전진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전면전의 흐름은 빠르게 돌아가는 필름과 같기 때문에 결정적 기회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 법이다. 이 기회를 놓치게 되면 자본가계급은 반혁명 준비를 더 강화할 것이며, 노동자계급과 병사들은 ‘볼셰비키들도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으며 혁명을 완수할 생각이 없다’면서 회의와 사기저하에 빠질 수 있었다. 볼셰비키 정당은 노동자계급의 준비가 부족했던 7월에는 혁명을 자제할 줄 알았듯이, 준비가 잘 갖추어진 10월에는 과감하게 결단할 줄 알았다. 이 정당의 주도력 하에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는 노동자 혁명으로 전진했다. 그 결과 (파리코뮌 이후) 세계 최초의 노동자권력이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10월 노동자 혁명의 진실을 두려워하는 작자들

    ▲ 1919년 3월 미국에서 처음 발행된 《세계를 뒤흔든 열흘》

    ≪세계를 뒤흔든 열흘≫은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혁명인 러시아 노동자혁명의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책이다. 저자인 존 리드는 이 책의 서문에서 이 혁명을 “고통 받는 민중들을 이끌고 역사에 뛰어든, 또 민중의 광범하고 소박한 희망에 모든 것을 내건, 인류가 시도한 가장 경이로운 모험 중의 하나였다”고 평가했다. 그의 평가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러시아의 낡은 지배자들과 자본가들 그리고 전 세계 자본가들의 방해와 공격, 중도주의자들의 배신과 편견을 뚫고 전진했다. 10월 혁명으로 정권을 빼앗긴 자본가들은 ‘이 무지한 자들의 권력’이 3일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노동자들의 권력기관인 소비에트를 향해 저주를 퍼부어 대고, 태업을 일삼았지만, 이 ‘위대한 인간들’의 전진을 막지 못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불굴의 의지와 헌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정과 비상한 인내심으로 수개월의 굶주림과 난관들을 극복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노동자계급의 국가를 건설해 낸 것이다.

    자본가들은 전 세계 노동자들의 머릿속에서 러시아혁명의 기억이 영원히 지워지기를 원한다. 이 기억이 자신들의 체제와 이익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수단은 ‘왜곡’이다.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부르주아 언론들은 노동자 투쟁에 대해 ‘외부 세력의 사주, 노조 지도자들의 불순한 의도’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은 단지 오늘날에만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10월 혁명 당시에도 대부분의 자본가들과 중도주의 지식인들은 노동자들의 혁명을 ‘볼셰비키라는 불온한 세력의 사주에 의한 소수 노동자들의 권력 찬탈’, ‘사회 질서를 파괴한 야만’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고, 수천, 수만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바친 거대한 대중운동에 대해 그런 식으로 묘사하는 것은 비열함의 극치다. 누가 자기 확신이 없이 목숨을 바치려 하겠는가? 그것도 한 두 명이 아니라 수 만 명의 노동자가 말이다. 결국 자본가들의 그러한 분석은 노동대중이 스스로 판단하고 자주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노예, 하인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바라보는 오만한 시각을 반영한다. 또한 노동대중의 그러한 분노와 행동이 자본주의 체제의 억압과 착취 때문에 발생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속죄양을 찾는 비겁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

    러시아 10월 혁명 당시의 상황은 이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진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볼셰비키는 결코 외부 세력이 아니었다. 멘셰비키와 사회 혁명당이 자본가들과 타협하고 노동자운동을 파괴해 나가는 동안, 노동자대중의 의지를 대변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제시해 나가면서 볼셰비키는 러시아 노동대중과 하나로 연결되었다.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볼셰비키는 러시아의 가장 각성된 노동대중과 병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다른 한편, 무능하고 부패한 지배자들과 착취자들이 망쳐 놓은 러시아, 세계대전을 통해 파괴되고 있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노동자들의 혁명이라는 점이 분명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권력 장악에 나섰던 것이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이 점을 점차 인식해가고 있었고, 혁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더욱 분명하게 이 사실들을 깨달아 갔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혁명적인 해결책을 갈망하는 노동대중의 의지에 따라 행동했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은 볼셰비키를 ‘선택’했고, ‘그들의 지도에 따라 행동’했다. 이 사실은 러시아 노동자들의 10월 봉기가 군중심리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이나, 소수 모험주의자들의 권력 찬탈이었다는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고 악의에 찬 거짓말인지를 잘 보여준다.

    10월 혁명을 둘러싼 또 다른 에피소드 중의 하나는 스탈린이 지배하는 동안 러시아에서 이 혁명의 참 모습을 기록한 책들은 금서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러시아혁명의 기억이 노동대중의 머리에서 지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했을 반혁명 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진실한 투사들의 이야기와 노동자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이 책은 가장 위험한 책들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반혁명적 지배자였던 스탈린이 진정 희망했던 것은 노동자혁명의 위대한 기억을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었고, 역으로 과거 짜르 체제의 억압적 질서를 복원해내는 것이었다.

    10월 노동자 혁명 - 노동자 스스로의 해방운동

    혁명은 오직 노동자계급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 자본가들과 개량주의, 의회주의 지도자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노동자해방은 결코 누군가에 의해, 가령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에 의해 선물처럼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혁명의 중요한 지도자 중의 한 명인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사≫ 서문에서 ‘혁명은 대중이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하는 것’이라고 본질을 정의했다. 러시아혁명의 진행 과정은 매시기마다 이 점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다음 사례를 보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무장봉기를 명령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봉기를 심각하게 고려한 것은 볼셰비키당 중앙 위원회였다. 10일 밤에는 밤샘회의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당의 많은 지식인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대표들이 참석했다. 지식인 중에는 오직 레닌과 트로츠키만이 봉기를 지지했다. 심지어 군대 대표들조차 봉기에 반대했다. 투표 결과, 봉기를 감행하자는 주장이 일단 기각됐다! 그때 한 노동자가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떨고 있었다. 그는 거칠게 말했다.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를 대표해서 한마디 하겠습니다. 우리는 봉기에 찬성합니다. 여러분은 마음대로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소비에트가 파괴되는 것을 보고만 있겠다면 우리와의 관계는 끝날 것입니다!” 몇몇 병사들이 그에 합세했다. … 그래서 투표가 다시 이뤄졌고, 결국 무장봉기를 감행하자는 주장이 통과됐다.4)

    러시아 노동자들은 그 표현에서 거칠고 미숙하기도 했지만, 자신이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본능적 직관으로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어려운 상황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어디서든 뜨거운 논쟁과 토론’이 이어졌다. 리드는 러시아의 노동자, 병사, 농민들이 자신들의 운명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사태를 이해하고 결정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수많은 강연, 논쟁, 연설들이 극장, 원형극장, 학교, 술집, 소비에트 집회장, 조합본부, 병영, 전방의 참호, 마을의 광장, 공장의 모임들에서 진행되었다. 특히 푸틸로프 공장에서는 노동자 4만 명이 쏟아져 나와 사회 민주당, 사회 혁명당, 무정부주의자들과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주장을 경청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페트로그라드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에서, 모든 길모퉁이는 몇 달 동안 공적 발언을 위한 연단으로 사용됐다. 또, 기차와 전동차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즉석 논쟁을 벌였다. 두 대륙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전국의 소비에트 회의들 - 소비에트, 협동조합, 젬스트보, 소수민족, 종교인, 농민, 정당의 집회들, 그리고 민주회의, 모스크바 회의, 러시아 공화국 의회 등 - 도 열렸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언제나 서너 개의 회의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회의에서 발언 시간을 제한하는 시도들은 실패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 우리가 리가 후방에 있는 제 12군의 전선을 방문했을 때, 수척한 모습의 병사들은 신발도 없고, 희망 없는 참호 속에 있었다. 그러나 나를 본 병사들은 벌떡 일어나 “읽을 것 좀 가져오셨나요?” 하고 간절하게 물었다. 야윈 얼굴과 창백한 피부, 누더기가 된 옷을 걸치고 말이다.5)

    나는 이 병사들처럼 사태를 이해하고 결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다. 이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연설을 경청했다. 병사들은 고민하고 눈썹을 찌푸렸고, 이마에는 땀이 흘렀다.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눈과 서사시에 등장하는 전사의 얼굴을 한 위대한 거인들처럼 보였다. …… 이 순간 병사들은 평범한 일상의 사고를 벗어나, 마치 혁명의 운명이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러시아의 관점, 사회주의의 관점, 세계의 관점에서 사고했다.6)

    바로 이것이 러시아혁명의 실체였다. 혁명적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누군가에 의해 조종된 것이 아니다. 세계와 노동자계급 전체의 대의에 따라 사고하고 도달한 자신의 결론에 입각하여 그들은 행동했다. 그들의 의지는 때로는 상황을 선도하기도 했다. 일부 볼셰비키는 이런 대중의 혁명적 의지에 비해 뒤처지기도 했다. 따라서 레닌과 트로츠키는 당의 잘못된 반대와 고립을 넘기 위해 때때로 노동대중에게 직접 호소하기도 했다. 대중의 혁명적 행동에 의해 당의 잘못된 결정이 수정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시기에 페트로그라드의 한 공장에서 열린 집회

    이것들이 보여주는 바는 분명하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사회의 운명에 직접 개입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 있었으며, 자신의 신념을 단호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러시아 노동자혁명의 가장 중요한 토대였다. 노동자들의 봉기는 이런 성숙한 의식을 가진 압도적 노동대중이 창출되었을 때만 시작될 수 있었다. ‘봉기’는 선언과 격한 선동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이 성숙한 의지가 도달한 하나의 필연적인 결론이었던 셈이다. 이는 러시아혁명이 볼셰비키라는 소수 당파의 쿠데타였다고 주장하는 우파들의 주장에 대한 러시아혁명의 대답일 것이다.

    나아가 이것은 진지하고 선한 의도를 가졌지만 결과적으로 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리하는데 그치고 있거나, 대중이 실제 행동에 나설 수 있도록 조직하는 작업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일정박기 식 명령(계획)’으로 투쟁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잘못된 기대감을 가진 투사들에게도 필요한 교훈이다. 실제의 투쟁은 오직 노동자 자신이 스스로 도달한 수준에 의해서 결정된다. 이 점에서 선진 투사들의 진정한 과제는 노동자대중의 자기 발전을 면밀히 추적하여, 그들이 자신의 경험을 소화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우리는 “혁명은 인민대중, 그것도 이름 없는 인민대중을 통해 성취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민대중의 전진과 주도권, 의식 성장이 빠진 혁명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리드는 러시아혁명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유산계급이나 다른 정당들과 타협해서 된 것이 아니었다. 낡은 정부기구와 화해함으로써 된 것이 아니었다. 소수 분파의 조직적 폭력을 통해 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러시아 대중이 봉기를 각오하지 않았다면 볼셰비키는 틀림없이 실패했을 것이다. 볼셰비키가 성공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기층 민중의 거대하고도 단순한 욕구를 그들이 현실화해 줬다는 점이다.”

    혁명을 향한 노동자들의 헌신성과 규율

    10월 러시아 혁명은 오직 노동자들만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단호한 세력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혁명에 대한 놀랄만한 헌신성과 인내심을 보여주었으며, 혁명의 규율에 자발적으로 복종했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의도적으로 노동자들의 이런 행동을 감추고 왜곡한다. 그들은 러시아 노동자들의 봉기를 굶주림의 결과라고 편협하게 주장한다. 이는 노동자투쟁의 의미를 단지 배고픔의 해결 정도로 폄하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주역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악의적인 편견일 뿐이다.

    물론 대중이 행동에 나선 이유 중 하나는 궁핍이다. 노동대중이 강요된 궁핍에 맞서 싸우는 것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정당한 것이다. 이것을 부당하게 느끼는 자들은 오직 자신의 편협한 이익을 위해 다른 모든 사람들을 굶주림으로 내모는 자본가들과 부유한 자들일 뿐이다. 그러나 궁핍만으로 혁명을 설명할 수는 없다. 혁명을 위해서는 굶주림 자체에 대한 저항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

    만약 ‘궁핍’ 때문에 혁명에 나섰다는 설명이 옳다면, 대중은 언제나 봉기를 일으킬 것이다. 왜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 비해 항상 궁핍하기 때문이다. 궁핍이 극한에 도달한 실업자들만도 엄청난 숫자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혁명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결국 궁핍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결정적인 어떤 요소가 결합되지 않는 한, 혁명은 결코 설명할 수 없다. 그 요소란 “자본주의 체제의 파산”이다. 사회 체제가 파산했음이 결정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대중은 더 이상 궁핍을 참아내지 않는다. 어제까지만 해도 궁핍을 감내했던 대중들이 “궁핍은 이 사회체제가 낡아버렸기에 발생하고 있다. 이 따위 반동적 사회체제 때문에 발생하는 궁핍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투쟁으로 떨쳐 일어난다. 이렇게 해서 조성된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사상은 혁명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전망을 이들에게 제시한다. 이 때문에 대중은 봉기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품은 원대한 목적을 위해 대중은 두 배 아니 세배나 더한 궁핍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혁명은 자본가들의 가장 강력한 저항을 낳았다. 그리하여 혁명은 일시적으로 노동자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굶주림과 고통을 선사했다. 그러나 이것이 러시아 노동자들의 전진을 가로막지 못했다. 자본가들의 무능력이 초래한 굶주림은 단 하루도 참을 수 없어했던 그들은, 자신들이 품은 원대한 목적과 대의를 위해서라면 가장 극악한 굶주림조차 몇 개월이라도 받아들였으며, 혁명이 요구한 규율에 자발적으로 복종했다. 이런 헌신성과 인내심이 없었다면 러시아혁명은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음의 에피소드는 이 점을 단적으로 증언한다. 10월 28일, 러시아 노동자들의 봉기에 맞서 자본가들은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혁명의 수도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고 있었다. 혁명은 거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혁명의 구심이었던 노동사 병사 혁명위원회는 즉각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모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에 보냅니다. 케렌스키를 지원하는 코르닐로프 일당은 페트로그라드를 공격하려 하고 있습니다. 민중의 혁명적 성과를 뒤집기 위한 반혁명의 시도를 가차 없이 분쇄하기 위해, 우리는 아래와 같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혁명 군대와 적위대는 노동자들의 지원이 시급히 필요합니다.

    지역 소비에트와 공장위원회에 명령합니다.

    1. 노동자들을 최대한 동원해서, 참호를 파고 바리케이드를 쌓고 철조망을 보강할 것.

    2. 위의 목적을 위해 공장에서는 언제든지 작업을 중단하고 동원에 참가할 것.

    3. 사용 가능한 철사와 철조망을 최대한 모을 것. 참호를 파고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최대한 모을 것.

    4. 무기를 최대한 모을 것.

    5. 규율을 철저하게 지킬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 혁명 군대를 지원하기 위한 준비를 할 것.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 병사 소비에트 의장, 인민위원 레온 트로츠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사령관 포드보이스키7)

    이 호소에 러시아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는 문밖으로 나갔다. 어둡고 우울한 날씨였다. 회색의 지평선에서 공장의 기적 소리가 들려왔다. 불길한 느낌의 거칠고 거슬리는 소리였다. 남녀 노동자 수만 명이 공장에서 쏟아져 나왔다. 떠들썩한 빈민가에서 어둡고 비참한 모습의 사람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붉은 페트로그라드는 위기에 처해 있다! 코사크들이 오고 있다! 수많은 여성과 남성, 그리고 어린이가 남쪽과 남서쪽에서 모스코프스키 입구를 향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총, 곡괭이, 삽, 철사 줄 묶음, 탄띠 등을 작업복 위에 걸치고 있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쏟아져 나온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병사가 돼 총을 든 채 트럭이나 수레를 타고 마치 급류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의 공화국 수도를 온몸으로 방어하려는 혁명적 노동자들이었다.8)

    노동자들의 혁명을 막기 위해 독일 제국주의자들에게 러시아를 넘겨줄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떠들어댔던 자본가들과 이 노동자들을 비교해 보라. 도대체 누가 러시아를 운영해야 옳은 것인가? 대답은 자명했다. 러시아 노동자들만이 러시아를 통치할 자격이 있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는 대의 앞에서 불굴의 희생정신과 헌신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단지 굶주림을 해결해야 한다는 초보적 의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식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의식은 그들을 흔들림 없이 전진하게 한 근원적인 힘이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되고자 했던 것이며, 이를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는 “노동자들은 굶주리지 않고 잘리지 않는 것에만 온통 관심을 가질 뿐 사회를 운영하고자 하는 열의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고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나 만들어서 임금이나 고용 문제나 해결해야지 정부를 세우고 운영할 수는 절대 없다”는 자본가들의 주장과는 달리, 노동자들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사회를 운영할 자격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이 감격적인 장면에서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은 다음과 같다. 오직 목숨을 걸만한 가치 있는 전망과 대의만이 그들을 헌신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으며, 원대한 목적만이 진정으로 노동자들을 성장시킨다. 이점에서 만약 활동가라 불리는 사람들이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에게 노동해방이라는 원대한 미래와 계급적 대의를 설명하기를 포기한다면, 이것은 가장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며, 투쟁의 발전을 방기하는 잘못된 행동이 될 것이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명확히 아는 노동자들만이 투쟁으로부터 진지하게 배우며, 진정한 승리를 일구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혁명은 노동자들에게 질서를 부여했으며, 그들을 사회의 진정한 운영자로 훈련시켰다. 무질서와 그에 편승한 강도, 약탈, 음주는 혁명이 성숙해 나감에 따라 완전히 사라져 갔다. 대의를 자각하고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고 죽어야 하는지를 깨달은 노동자들은 혁명의 용광로 속에서 새로운 세계의 조직자, 지도자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화요일 아침이 되었다. 어찌된 일인가? 페트로그라드 평원에 모인 사람들은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지휘관도 없이 헤매는 오합지졸이었다. 그들에게는 식량도, 대포도, 작전도 없었다. 그러나 <규율 없던 적위대>와 <장교 없는 병사>들이 어느 새 자신들이 지휘관을 직접 선출하고 자진해서 복종하는 군대로 탈바꿈했다.9)

    혁명은 단도직입적으로 ‘당신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묻는다. 혁명의 시기에 중도란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아와 적의 구별이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혁명은 매우 단순하고 때로는 거칠다. 리드는 러시아혁명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혁명적이었다. 그러나 폭력적이거나 독단적인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여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소박하며 때로 거칠었다. 그러나 결코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결코 무질서한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것이 러시아 노동자들의 혁명이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의 혁명은 자본가들과 중도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7개월 동안 말만으로 떠들어 댔던 것을 단 몇 주 사이에 단숨에 실행에 옮겼다. 자본가들은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소비에트가 ‘단순하고 교양 없다’고 조롱했지만 전 세계를 통틀어 그 어떤 권력보다 효율적이며,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러시아 노동자들은 가장 힘들고 열악한 상황을 이겨 내면서 자신의 권력을 수립하고, 이를 유지, 발전시켜 냄으로써 새로운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입증해 보였으며, 자신들의 국가가 역사상 그 어느 권력에 비해서도 우월하며, 역동적인 체제임을 증명해 냄으로써 거대한 혁명의 날들을 열어나갔다.

    혁명정당

    단지 노동대중만으로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이것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며, 러시아혁명의 나날들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전위인 혁명정당의 사활적 중요성 또한 웅변하고 있다. 볼셰비키 정당이 기타 노동자 정당들과의 협력을 거부했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 반대였다. 그러나 개량주의, 중도주의 정당들이 노동자대중의 요구를, 혁명의 요구를 배신했기 때문에 분열과 비판은 불가피했다.

    “저들은 우리가 민주주의 정당들과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하지만 비난 받을 사람들이 진정 우리일까요? 혹은 카렐린의 말대로 단지 ‘오해’의 탓으로 돌려야 합니까? 아닙니다, 동지들. 한 정당이 혁명의 절정에서, 여전히 포연이 가득한 가운데 “자, 권력이 여기 있습니다. 가지시오”하고 제안했는데, 제안을 받은 자들이 적들에게 권력을 넘겨 버렸을 때, 그것은 결코 오해가 아닙니다. … 그것은 무자비한 선전포고입니다. 그리고 선전포고한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10)

    ▲ 1920년 5월 5일 폴란드 전선으로 떠나는 병사들에게 스베르들로프 광장에서 연설하는 레닌

    혁명이 ‘자본주의와 노동해방 사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중도주의적인 반혁명주의자들에 의해 교란될 때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이들과 싸우면서 혼란스러워하고 방향을 잡지 못하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끈질긴 토론을 동반한 설득과 폭로를 통해 볼셰비키는 노동자대중과 함께했다. 이것들은 혁명적 노동대중들을 고무시켰으며, 성장시켰다. 또한 이런 과제들은 구석구석 조직된 현장 세포들의 연결망을 타고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단 몇 백 명의 노동자들이라도 있다면, 러시아의 모든 곳에서 이런 볼셰비키의 노력이 반복적으로 수행되었다. 그 결과 혁명의 나날들 내내 각 계급 정당들의 수많은 포고령이 난무했지만, 오직 볼셰비키의 포고령만이 노동자대중과 연결될 수 있었다. 바로 이것이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도 혁명이 방향을 잃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였다.

    오직 볼셰비키만이 더 많은 민주주의와 파괴되어버린 노동대중의 삶을 복원하기 위한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요구에 충실했으며. 노동자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에 기초하여 그들의 혁명의지를 발전시키고 조직해 나갔다. 볼셰비키의 성공, 나아가 러시아 노동자들의 성공은 진정한 혁명정당이 이 의지를 대변하고, 그 발전 방향을 끊임없이 지도했었다는 데 있다.

    한 부르주아 학자는 프랑스혁명을 평가하면서 “강철 같은 인간들만이 혁명의 길을 갈 수 있다. 이들은 직업 자체가 혁명가였으며,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반란과 봉기의 정신을 삶으로 끌어들이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고 말했다. 러시아혁명의 나날들을 기록했던 리드는 ‘사실 이 말은 볼셰비키들에게 훨씬 더 타당한 것’이라고 썼다.

    러시아 대중은 소비에트와 결별할 생각이 없었다. 반대로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기를 원했다. 볼셰비키당과 결별하기는 더욱 원치 않았다. 그러나 당이 우유부단하다는 느낌이 들 때면, 이들은 집행위원회에 주먹을 흔들어 보이고, 볼셰비키 당을 슬쩍 밀어서 행동에 나서고자 했다. 볼셰비키는 소수였다. 하지만 그들의 강령은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소박하고 단순한 요구를 바탕으로 했으며, 진정한 대의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고립되고, 심지어 경멸당하기도 했지만, 노동자 자신이 자신의 대의를 의식적으로 깨달아 감에 따라 대중의 진정한 신뢰를 획득할 수 있었다. 당이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요구한다면, 기꺼이 목숨을 걸 수 있는 바로 그러한 신뢰 말이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노동대중이 혁명의 대의를 움켜쥘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러시아혁명은 이 두 가지 요소, 다름 아니라 노동대중과 그들의 혁명적 전위들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킴으로써 가능해졌던 것이다.

    10월 혁명의 성과들

    지금부터는 10월 혁명을 통해 수행된 구체적 조치들을 살펴보자. 이 부분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레닌이 소비에트 대회에서 연설한 내용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평범한 노동자와 인민대중에게, 그것도 자신들에게 거짓을 말한다면 즉각 항의하고 끌어내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무장한 노동자들 앞에서 직접 연설한 것이기에 하나의 거짓도 없이 혁명 직후의 현실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군대를 보자.

    병사들에 대한 가혹한 훈련과 고문의 군대인 낡은 군대는 과거로 물러갔다. 이 군대는 붕괴되었으며 여지없이 파괴되었다. 군대의 완전한 민주화가 실시되었다. 나는 내게 있은 일을 한 가지 이야기하려 한다. 그것은 핀란드 철도의 찻간에서 있은 일인데 거기에서 나는 몇몇 핀란드인과 한 노파 간에 진행되는 이야기에 참견할 수 없었는데 핀란드인 한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이 노파가 어떤 새로운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지금은 총을 든 사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숲속에 갔을 때 총을 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노파가 모아 놓은 나뭇가지를 뺏기는커녕 오히려 더 가져다주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자신의 신문 이름을 사회주의라고 붙이든 그렇지 않든 수백 개의 신문들이 수백 개의 큰 목소리로 ‘독재자’니, ‘폭행자’니 하는 말들을 우리에게 외칠 테면 외쳐라. 우리는 인민대중 속에서 지금 다른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말한다. 지금은 총을 쥔 사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총을 쥔 사람이 노동자들을 옹호하고 있으며 착취자들의 반항을 진압하는 데 무자비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바로 이렇게 인민은 느끼고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평범하고 무식한 사람들이 하는 선동, 즉 붉은 군대 병사들은 착취자들을 반대하는 데 온갖 힘을 바치고 있다고 말할 때의 이들의 선동은 불패의 것이다. 이 선동은 수백만, 수천만 사람들 속에 퍼질 것이며, 19세기에 프랑스의 코뮌이 창건하기 시작했다가 부르주아지에게 격파당한 까닭에 짧은 기간밖에 창건하지 못한 그것을 아주 확고히 창건할 것이다. 즉 전체 사회주의자들이 염원한 사회주의적 붉은 군대를, 인민의 전반적 무장을 실현할 것이다.11)

    다음으로 사법제도의 변혁이다.

    사회주의 군대에 대하여 소비에트 정권이 취해온 이 방도는 과거의 지배계급이 보다 더 세련되고 보다 더 교묘하게 보유하고 있던 다른 무기, 즉 부르주아지의 재판소에 대해서도 취해졌다. 이 재판소는 질서의 유지를 표방하였지만 사실은 피착취 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며 가진 자들의 이익을 수호하는 세련된 무기였다. 소비에트 정권은 모든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 가르쳐준 그대로 행동하였다. 즉 부르주아지의 재판소를 즉시 파괴했다. 우리가 낡은 재판소 바로 그것을 파괴하여 버렸다고 외칠 테면 외쳐라. 우리는 그렇게 함으로써 진정한 인민재판소를 위한 길을 열어 놓았으며, 탄압의 힘보다도 오히려 대중의 모범과 노동자들의 권위에 의거하여, 형식을 차리지 않고, 착취의 무기인 재판소를 사회주의 사회의 공고한 토대에 입각한 교양의 무기로 만들었다.12)

    다음으로는 은행과 관련된 조치들을 보자.

    지주들을 러시아 땅에서 완전히 소탕할 뿐만 아니라 수백만, 수천만 노동자들에 대한 부르주이의 지배와 자본의 억압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파괴하기 위하여 취한 첫 조치의 하나는 은행의 국유화로의 이행이다. 은행은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일대 중심이다. 여기에는 미증유의 재부가 집중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이 재부는 광대한 나라 전체에 분배된다. 이것은 전체 자본주의 생활의 신경이다. 이것은 정밀하고 복잡한 기관이다. 이것은 수 세기에 걸쳐서 자라났는데 이에 대하여 소비에트 정권의 첫 공격이 가해졌다. …… 이 기본적인 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아직도 오랫동안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될 이 기본적인 조치로부터 우리는 개인은행에 손을 대는 데로 넘어갔다. 우리는 타협분자들이 건의하리라고 생각되는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 우리는 단순하게 행동하였다. 즉 우리는 ‘교양 있는’ 사람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식의 찌꺼기를 팔아먹는, 부르주아지의 무식한 지지자들의 비난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 우리에게는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이 있다. 그들은 오늘 아침에 모든 개인은행을 점령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한 다음에, 이미 권력이 우리 손에 들어 온 다음에, 오직 그렇게 한 다음에도 우리는 어떠한 조치를 취할 것인가를 심의할 것이라고. 그리하여 아침에는 은행들이 점령되었고 저녁에 중앙집행위원회는 “은행들은 국가적 소유로 선포된다”는 결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리하여 은행업의 국유화, 그 사회화, 소비에트 정권의 수중으로의 은행업의 이관은 실현되었다.13)

    마지막으로는 노동자의 경제관리이다.

    노동자의 통제가 수립된 후에 공장을 몰수하는 데로 넘어가는 것도 또한 극히 쉬운 일이었다. …… 노동자의 통제를 실시하면서 우리는 전 러시아에 그것이 전파될 때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경과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우리는 오직 한 가지 길 - 경제적 조건의 새로운 기초를 노동자 자신이 밑으로부터 수립하도록 하기 위해서 밑으로부터 개조하는 길 - 만을 인정한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경제적 조건의 새로운 기초를 수립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이 요구될 것이다. 노동자의 통제로부터 우리는 [소비에트 산하의] 최고인민경제회의 창설로 넘어갔다. 오직 이 조치만이 가까운 시일에 실시될 모든 은행 및 철도의 국유화와 함께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의 건설에 착수할 가능성을 우리에게 줄 것이다. …… 나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곧 정권이오, 당신들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하시오, 당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가지시오, 우리는 당신들을 지지할 것이오. 그러나 생산에 관심을 돌려 생산이 잘 이루어지도록 배려하시오, 유익한 사업으로 넘어 가시오, 당신들은 오류를 범할 것이지만 그러나 당신들은 배우게 될 것이라고. 이리하여 노동자들은 이미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그들은 벌써 생산을 사보타지하는 분자들과 투쟁을 개시하였다.14)

    10월 혁명의 역사적 의의

    10월 혁명은 단지 러시아라는 한 고리만 끊은 것이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사슬 전체에 결정적인 파열구를 냈다. 10월 혁명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을 세상의 주인으로 우뚝 일으켜 세웠다.” 이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반동성과 부패, 폭력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무정부적 시장을 합리적인 계획으로 대체하고, 생산력을 인류의 필요에 충실하게 기여하도록 강제하는 것, 이것이 자본주의 시대에 인류가 계속 맞닥뜨리고 있는 역사적 과업이다. 그때에만 자본주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인류는 도약할 수 있다. 러시아 혁명은 그것을 향한 길을 보여주었다.

    비록 러시아 노동자들의 전진은 혁명을 사수하고 확대하며 완성시키는 데 필요한 경험의 부족, 내부의 적들의 준동, 관료주의자들의 등장, 그리고 국제혁명의 불길이 제 때에 타오르지 못한 악조건 등에 의해 멈춰 서 버렸지만, 노동자들의 이 거대한 시도는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 자본가들이 지워버리기를 그토록 염원하는 혁명의 기억은 지금은 전 세계의 선진적인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서 다시 부활하고 있고, 반드시 부활할 것이다. 노동자가 해방될 수 있는 길은 그 길 말고는 어디에도 없고, 노동자의 잠재력은 결코 소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 숫자와 집단성, 세계적 연결성 등에서 잠재력은 더욱 가파르게 증대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거대하고 원대했던 러시아 노동자들의 꿈을 한국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뜨겁게 되살림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향한 이 위대한 전진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진실한 시도 속에서 성장하며, 그 성장의 크기만큼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이 초래할 위험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세상 어디에도 위험을 동반하지 않는 투쟁은 없으며, 투쟁 없이 건설되는 세계도 없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 체제는 실업, 가난, 산재 등 노동자들에게 항상적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위협이며, 이 위협에 맞서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치러야 할 고통은 비록 목숨을 바치는 고통일지라도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고통이기 때문이다. 이 고통들은 자본가들이 영원히 무덤 속에 파묻었다고 생각하는 10월 혁명의 기억을 계속 전 세계 노동자들 속에서 되살려내고 있다.

    2. 혁명의 운명과 반혁명

    러시아 10월 혁명은 소비에트라는 노동자 혁명기관을 노동자 권력으로 전환함으로써 사회주의로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으며 바로 그러한 점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노동자 권력이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감수한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권력을 장악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생산과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 되고, 억압과 착취를 박살내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오직 사회주의를 통해 모든 유형의 착취를 폐지하고, 작업장과 전체 생산을 관장하는 주인으로 우뚝 서야만 가능해진다. 노동자 권력은 곧 사회주의 권력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러시아 10월 혁명은 모든 혁명이 자신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불가피하게 과도기를 필요로 하듯이 혁명과 동시에 사회주의를 즉각 완수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당시 러시아의 객관적 토대 - 농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 - 위에서는 오랜 기간의 과도기가 불가피하게 요구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10월 혁명은 사회주의를 실현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해방을 이룰 수 없는 유일한 계급인 노동자계급이 사회의 실질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미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동일한 입장에서 레닌은 혁명 직후인 1918년 1월에 소비에트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인민대중이 새로운 국가권력을 형성하기 위해서 이 길[대중이 모든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사회의 전면에 나서는 것]을 따라 전진을 개시하지 않는 혁명은 하나도 없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다만 개시했을 따름이고 사업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였으며 국가주권의 새로운 유형을 창조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것을 창조하였다. 우리에게서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이미 실현되었다. 나는 우리가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의 첫걸음을 떼었을 뿐이고 아직 사회주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환상을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국가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고 당신들이 말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말이다. ……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과도기를 끝내기에는 아직 멀었다. …… 우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길에 일어난 까닭에 우리 소비에트 공화국을 사회주의적이라고 부를 의무가 있다.15)

    사회주의로의 길은 다양하지만 그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혁명의 본질 성격은 단 하나인데 그것은 사회 권력(이는 단지 정치적인 권력만이 아니라 경제적 권력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사회적 권력을 뜻한다)이 진정 압도적 다수의 노동자계급과 인민대중의 수중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에 이르는 모든 과도적 시기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 국가)가 조응한다고 말한 바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혁명적 노동자들 앞에 던져진 과제들

    노동자가 국가권력을 장악한 것, 그리고 생산수단들을 공동의 사회적 소유물로 전환시킨 것은 초유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혁명은 승리하도록 미리 예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이 혁명의 승리는 아직 박탈당하지 않은 모든 우위를 이용하여 모든 방식으로 반혁명을 시도하는 (러시아 부르주아지를 포함하는) 국제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완강한 투쟁을 통해서만 공고화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위대한, 그러나 결코 쉽지 않은 임무가 부여되었다 : “혁명을 통해 고양된 노동대중의 혁명적 능동성과 창조력을 어떻게 새 사회를 건설하는 힘으로까지 발전시킬 것인가, 그리고 노동자가 최초로 획득한 관제고지, 즉 국가권력을 어떻게 확장하고 강화시켜 전체 사회를 사회주의적으로 개조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노동자 권력의 본질적 성격을 보호하고 강화하지 못한다면 러시아 혁명은 최초의 견고한 발판마저 박탈당한 채 몰락해갈 것이었다. 이때 러시아 노동자계급 앞에는 이 국가를 명실상부한 노동자계급 국가로 발전시키고, 이를 토대로 생산을 공동체적으로 조직하는 거대한 과업이 제기되었다.

    우선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국가권력(이 국가권력은 통상적인 의미의 국가가 아니라 엥겔스가 말한 ‘공동체’적 성격을 띠고 있다)을 이용해 사회를 운영할 수 있어야만 했다. 만약 권력을 장악한 노동자계급이 사회를 부르주아지보다 더 잘 운영할 수 없다면 노동자 권력은 결코 지탱될 수 없다. 그런데 노동자계급은 권력을 장악한 초기에는 불가피하게 구 사회의 인자들 - 부르주아 전문가와 부르주아 지식인들 - 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만이 사회를 운영해 본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부르주아들의 사회 운영은 정말 저급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저급한 것일지라도 아직 그들을 완전히 배제하고서도 사회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노동자들이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그들의 저급한 능력의 최고의 것을 배우는 데서 노동자계급은 우선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가령 파리코뮌의 경우에도 노동자들은 (보통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을 넘어서는) 상당히 높은 임금을 주고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고용해야만 했다. 이는 노동자 혁명의 초기에는 불가피한 조치이지만, 동시에 노동자 권력의 변질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요소였다. 각 나라의 문화적·경제적 조건에 따라 부르주아 전문가와 지식인들에 대한 활용 정도와 그 활용이 불가피하게 강요하는 위험성의 정도가 달라진다.

    현대 자본주의가 도달한 발전단계에 이르러서는 구 사회의 부르주아지를 이용하는 정도는 상당히 좁은 범위로 제한될 것이지만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예를 들어 러시아 노동인민의 다수는 문맹상태에 처해 있었다. 물론 노동자계급은 상대적으로 문맹률이 낮았지만 그들은 ‘회계’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노동대중은 국가를 운영하고 사회를 전반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 읽고 쓰고 계산하는 것과 같은 가장 기초적인 능력부터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현재의 한국 노동대중의 (문화적) 수준과 비교한다면 당시의 러시아 노동자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쉽게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이용할 필요성은 상당히 높았으며, 또한 당연히 노동자 국가의 관료주의적 왜곡 가능성도 상당히 높았을 것임은 틀림없다. 레닌은 노동자 권력이 발전함에 있어서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통제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혁명 직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계급투쟁이란 무엇이며 관리들이 조직한 고의적 태업이 무엇인가를 안 사람들은 우리가 사회주의로 대번에 뛰어넘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 낡은 제도의 보존은 곧 사회의 이익이라고 생각하는 사무직 종사자들과 정부 관리들이 남아 있다. 이 계층이 완전히 붕괴되지 않고, 러시아와 유럽의 부르주아지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사회주의가 승리할 수 있다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16)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전문가들의 사보타지를 분쇄하면서 사회주의의 승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노동자 출신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이 노동자 국가가 활용하고 있는 구 관리들을 통제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능력을 확보해서 완전하게 국가를 스스로 운영할 수 있어야만 했다. 문제는 노동자계급이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국가, 경제기구들에서 활용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낳게 될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한 적절한 조건들을 확립하고, 아울러 최단기간 내에 이러한 타협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만큼 노동자의 사회운영 능력을 계발하는 데 있었다. 한마디로 10월 정치혁명을 통해 지배계급이 된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자신이 확보한 정치적·경제적 힘을 이용해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 즉 행정능력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다음으로 러시아 노동자 권력은 다수 농민의 지지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유럽 노동자들의 혁명이 성공하여 그들의 지원이 이뤄진다면 농민의 지지를 끌어내는 문제는 조금은 덜 중요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사회주의를 농촌(그런데 농촌은 당시 러시아에서는 다수 인구가 생활하는 곳이었다) 내로 확산하기 위해 필요한 결정적 수단, 즉 트랙터와 같은 집단 농업의 우월성을 입증할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유럽 노동자들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국제혁명이 정체되어 그러한 조건이 열리지 않은 동안에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타협을 동반하는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통해서 다수 농민들의 지지를 확보하면서 권력을 유지하면서 점차 농촌을 사회주의로 이행시켜야만 했다. 이러한 점차적 과정을 통해 다수의 하층 농민들을 사회주의적 영향력 아래 인도하는 것, 최소한 노동자 권력에 대한 지지자로 남겨두는 것은 관건적인 문제였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노동자 권력은 자신의 혁명 권력을 국제 노동자 혁명의 전진을 위해 최대한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유럽 노동자들의 혁명운동이 발전하여 이들이 러시아 노동자 권력의 원조를 절실하게 필요로 할 때 군사적 지원을 포함한 모든 방식으로 그들의 혁명을 지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국제 혁명에 대한 지원은 단지 다른 나라 노동자 혁명에 대해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 노동자 권력이 사회주의를 현실에서 완성시켜 나감을 통해서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의 의의를 생생한 구체적 현실로서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수천 권의 혁명 팸플릿 모두를 합한 것보다 더 강력한 ‘혁명선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타국을 약탈할 수 있는 강대국, 그 결과 자본가계급이 자국 노동자들의 상층부를 일시적이라도 매수할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는 제국주의 강대국에서 혁명운동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인 듯하나 실제로는 거의 모두가 부르주아적인 서유럽의 개량주의 당들은 노동자 민중에게 약속한 아무것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서유럽의 착취자들과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 혁명운동을 일시적으로 저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운동을 완전히 중지시킬 수 없다. 러시아 노동자 권력의 전진은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모범을 보여주며 국제 사회주의의 횃불처럼 확고히 서 있을 것이다. 자본가 권력 쪽에는 싸움, 전쟁, 유혈, 수백만 사람들의 희생, 자본의 착취가 있으며, 러시아 노동자 권력 쪽에는 진정한 평화정책과 노동자의 공화국이 있다. 사태는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전위대라는 영예로운 역할을 부여하였다. 러시아 노동자들이 먼저 시작하였다. 독일, 프랑스, 영국 노동자들이 이것을 완성시켜야 했다.

    유럽에서 노동자 혁명이 발전하는 것, 최소한 주요한 몇 나라들에서 혁명이 승리하는 것은 러시아 혁명의 국내적 발전에 있어서나 국제 노동자계급운동의 전진에 있어서나 결정적인 의의를 지녔다. 이런 가능성이 존재하고 있던 당시에는 러시아 노동자 권력은 국제 노동자 혁명의 승리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만 했다.

    이상의 세 가지 요소들이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러시아 노동자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의 최종 승리에 도달할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 승리 이후에 패배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인가가 결정될 것이었다.

    커져가는 위험들

    국가관리들이 노동대중 자신에 의해 실질적으로 선출되고 통제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점차 이 국가를 노동대중이 직접 참여해서 운영하는 그러한 유형의 대중적 국가로 발전시켜 나가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러한 방향으로 전진이 이뤄졌다. 생산현장 단위를 중심으로 구성된 ‘노동자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는 직접 관리들을 선출했고, 언제든지 소환했으며, 이들에게 노동자의 평균임금만을 지급했다. 노동자 국가관리는 ‘노동자계급을 대변하고 통제에 복종하는 헌신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만일 이 관리들이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변질하면서 국가기구들과 국유화된 생산수단들을 개인적 용도로 이용한다면, 그것은 기존에 자본가계급이 했던 기능을 그들이 떠맡는 것을 뜻했다. 이 경우 이들은 분명 노동자계급(노동자평의회)이 선출한 사람들이지만,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이 노동자계급 출신이지만, 노동대중 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실제로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두 가지 요인이 작동했다.

    하나는 노동자 소비에트의 통제력이 약화된 것이다. 이것을 야기한 요인 중 결정적이었던 것은 러시아와 유럽 자본가계급의 반혁명이었다. 이들은 결코 노동자 권력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반대로 이들은 내전과 사보타지로 응답했다. 1918년에서 20년에 이르는 내전 과정에서 엄청난 수의 노동자 민중들이 피를 흘리고서야 노동자 권력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영국과 독일 정부는 이 반혁명을 적극 지원했다. 독일 정부는 아예 침략 전쟁으로 답했다. 이 제국주의 전쟁 과정에서 노동자 권력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 했다.

    자본가들, 그리고 부르주아 기술자, 과학자, 전문가, 상층 관리자들은 ‘생산에 대한 사보타지’로 반혁명에 동참했다. 노동자들이 아직 작업장을 스스로 운영하고, 고급 기술들에 익숙하지 않으며, 과학적 지식들을 충분히 습득하지 못한 상황을 이용해, 이들은 생산에 협력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자 권력을 파산시키려 했던 것이다.

    내전과 제국주의 전쟁의 과정, 부르주아 지식인들과 전문가들의 사보타지 속에서 수많은 공장들이 문을 닫거나 제한적으로만 가동되어야 했다. 대부분의 공장노동자들은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이것은 공장단위로 조직되어 있었던 노동자 소비에트의 토대가 약화되는 것을 뜻했다. 당연히 노동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통제력은 상당 기간 약화되었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 혁명적 노동자당의 타락이었다. 산업이 재조직되면서 노동자 소비에트가 본래의 모습을 찾기 전에는 이 노동자당이 선두에서 혁명을 책임져야만 했다. 불행하게도 아래로부터의 통제력 약화와 나란히 위로부터는 노동자당의 지도력의 붕괴가 일어났다.

    과거에 이 당의 당원들은 짜르 경찰과 군대와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용사들이었다. 이들에게 당원이란 명칭은 ‘목숨을 걸고 노동자계급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뜻했다. 출세분자들, 용기가 없는 자들은 이 당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당이 국가권력의 중심부에 서자 상황이 달라졌다. 노동대중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동지들이 바로 그들이었기에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거의 압도적으로 그 당의 당원들을 국가관리로 선출했다. 그러나 이 당의 당원들 중 일부, 특히 신참들의 상당수는 이 당이 집권당이 된 후에 이 당에 가입했다. 그들 중 일부는 말로는 노동해방에 대한 충성을 표했지만, 사실은 집권당이 갖고 있는 힘과 지위, 그리고 이 당이 노동대중 속에서 누리고 있는 권위를 이용하려는 출세분자들이었다. 이들은 국가관리의 지위를 뇌물수수와 특권 따위의 출세의 수단으로 교묘하게 이용했다.

    또한 당시에 거의 교육받지 못한 상태였던 노동자들은 국가를 운영할 능력을 충분히 갖출 수 없었다. 그래서 전문적인 분야에서는 상당수의 지식인들이나 구 관리들이 등용되었다. 물론 노동자당은 이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려 노력했지만, 이들은 수천가지의 교묘한 방식으로 노동자 관리들을 타락시키려 시도했다. 노조간부들에 회사가 미치는 사악한 영향력, 가령 고급차량을 지급하고 뇌물을 건네며 좋은 음식점에 데려가고 위원장, 대의원이라고 받들어 모시는 등의 갖가지 영향력 행사가 형태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동일하게 시도되었다. 단련되지 못한 인자들은 조금씩 이러한 부르주아 문화에 길들어져 갔다.

    당의 굳건한 동지들도 조금씩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노동자혁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러시아 노동자국가는 고립되었다. 그런데 러시아는 발전된 자본주의 나라가 아니었다. 인구의 90%가 농민들이었고, 많은 노동자들이 국가의 운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서는 ‘글자와 숫자’부터 배워야만 했던 문맹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는 대중의 높은 문화적 수준과 의식, 그리고 높은 산업발전 수준이 요구되는 노동해방 사회 건설 앞에 놓인 거대한 장애물이었다. 그러자 강철 같은 투사들 속에서도 ‘동요와 회의,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앞으로도 수십 년간 전력을 다 바쳐야 한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그들 중 일부는 피곤함을 느끼면서 사기가 저하되었다.

    문화적 영역에서의 전투

    노동해방 공동체를 건설하고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은 새로운 능력을 확보해야 했다. 그것은 기존에 그들이 익숙했던 파업과 봉기와 같은 물리적 전투능력이 아니었다. 자본가들보다 경제와 국가를 더 잘 운영할 수 있는 실제 능력이 필요했다. 또한 노동대중의 능력을 체계적으로 높여나가야 했다. 이제 노동대중은 자신의 공장과 국가를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워나가야 했다. ‘문화적 전투’가 일정에 올랐다.

    그러나 과거의 물리적 전투에서는 용맹함으로 진가를 발휘했던 많은 동지들이 이 ‘문화적 전투’에서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 ‘문화적 전투’에서 자본가들을 능가하는 능력을 확보하는 것은 ‘정치투쟁과 현장에서의 경제투쟁’에서 자본가들을 능가하는 것에 비해 훨씬 더 어려웠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수십 년, 수백 년에 걸친 투쟁 속에서 파업조직 능력, 정치투쟁 능력을 배웠지만, 국가와 사회, 작업장 운영 능력은 오직 권력을 장악한 뒤에만 배울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훌륭한 동지들 중에서 이 점을 자각하지 못하고 조급함을 드러내는 동지들이 많았다. 그들은 노동대중과 가난한 농민들을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끈질긴 작업, 그리고 자신을 자본가를 능가하는 사회와 경제 운영자로 키워나가는 훈련 대신 총과 칼, 단순한 결의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별다른 기술적 고려와 판단도 없이 그들은 군사적 돌격전처럼 경제와 사회 운영 문제에 임했다. 이것을 레닌은 ‘자만심’이라 불렀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러한 정서는 수그러들지 않고 확대되곤 했다. 당연히 여기서는 재앙이 뒤따랐다. 가장 성실하고 투철한 당원들이 ‘새로운 유형의 계급투쟁’을 이해하지 못하고 과거의 정치적, 군사적 전투방식을 그대로 채용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노동대중 위에 군림하는 관료로 변질해 나갔다.

    극소수의 최상의 당원들만이 상황을 침착하게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소수였다. 게다가 이 최상의 당원들의 상당수가 내전과 제국주의 전쟁 과정에서 노동자권력을 지키기 위해 선두에서 투쟁하다 죽고 말았다.

    이 모든 것들은 러시아 노동자당을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위험의 뿌리였다.

    관료주의 세력의 강화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당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출세분자들과 사기저하에 빠진 분자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늘어났다. 그러나 초기에는 출세분자들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에 비한다면 구 부르주아 관리들의 영향력은 훨씬 더 치명적이었고 강력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이것이 상황을 좌우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가장 굳건한 동지들 속에서 퍼져갔던 ‘피로감, 사기저하’, 그리고 ‘자만심’이었다. 이것들은 출세분자들과 구 부르주아 관리들이 노동자당과 국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대한 틈을 제공했다. 이들이 미치는 영향력과 함께 올바른 전망을 갖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고 자만심에 굴종했던 많은 수의 당원들의 미성숙성이 함께 겹쳐지면서 이들은 점차 노동자 관리에서 관료로 전락하기 시작했고, 노동대중 위에 군림하면서 배신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가관리의 지위를 경찰과 군대, 공장, 작업장에 대한 지배권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전체적으로 대표했던 인물이 바로 스탈린이었다.

    어느 시점까지는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스탈린은 변화된 상황에 적응할 수 없게 된 낡은 인물이었다. 기질상 지나치게 성급했고 군사적 방식에 주로 의존했던 그는 내전의 시기에는 이름을 떨칠 수 있었지만, 노동해방 사회 건설의 과제 앞에서는 무기력했다. 그는 ‘자만심’의 상징이었고, 단지 단호함과 군사적 능력만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 운영할 수 있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 또한 그는 러시아 노동자당 지도자들 중 ‘문화적 수준’에서 가장 후진적인 인물이었다. 개인적으로도 그는 출세욕구가 있었는데, 이는 당이 권력을 잡자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관료화되고 있는 거대한 집단의 우두머리로 그는 부상했다. 하지만 그가 개인적으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이미 언급한 거대한 요인들이 어우러져서 문제가 발생했고, 그는 단지 이 흐름의 가장 명확한 표현이었을 뿐이었다.

    관료화되고 있는 이 흐름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다. 스탈린을 중심으로 타락한 지도자들은 당의 문호를 대폭 열어서 출세분자들을 대량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과거 구 부르주아 관리들을 아무런 통제 장치 없이 대거 등용하고 중요한 자리에 배정하면서, 심지어는 당원으로까지 받아들였다. 이런 작업은 레닌이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2년 사이에 아주 빠르게 진행되었다. 일시적으로 깨어난 레닌은 이 무시무시한 괴물 - 관료주의의 확대 - 을 눈치챘다. 그는 이 괴물을 타도하지 못하면 당은 노동자계급의 당에서 타락한 관료집단의 당으로 변질하고, 혁명도 끝장날 것임을 직감했다. 그는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잠시 정신을 차린 그 짧은 기간 동안 스탈린 관료집단에 맞선 결정적인 전투를 준비했고 여기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러나 그에게 부여된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다가오는 당 대회에서 스탈린 관료집단을 쓸어버리려고 작심했던 레닌은 거사를 얼마 앞두고 뇌출혈로 쓰러졌고, 그 뒤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레닌이 이 투쟁에서 믿을 수 있는 동반자로 간주했던 트로츠키는 상황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하면서, 결국 스탈린 관료집단에게 기회를 주는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리하여 관료주의에 맞설 수 있는 마지막 절호의 기회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레닌은 결국 병마로 죽고 말았고, 트로츠키는 레닌이 죽자마자 권력투쟁에서 패배하면서 사실상 변방으로 쫓겨났다가 해외로 추방되었다.

    이제 당은 관료분자들의 수중에 장악되었다. 내전을 전후로 하는 시기에 많은 공장들이 가동을 중단함으로써 소비에트가 약화되면서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통제력도 이완되었다. 이런 식으로 세력관계가 관료층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자, 이들은 마지막으로 러시아 노동자당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고참 지도자들을 죽임으로써 반혁명을 완성했다. 1917년 노동자혁명을 주도했던 지도자들 중 내전에서 살아남은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스탈린 관료집단에 의해 ‘노동계급의 적, 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죄명으로 사형당했다. 오직 관료집단에 순종하고 복종하겠다고 약속한 변절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은 점차 관료집단의 끄나풀이 되어갔다. 러시아 노동자혁명의 전통과 정신을 대변했던 트로츠키는 제4인터내셔널을 건설하면서 이 관료집단에 대항한 전투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그 또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결국 노동자국가는 30년대 후반에 이르면 사실상 붕괴하고 말았다. 1917년 혁명이 세워놓은 새로운 토대 중 아주 작은 일부가 흔적처럼 남기는 했지만, 노동자국가는 반동관료들의 지배하에 떨어져 버렸다. 노동자계급은 자신의 국가를 잃어버리고, 관료집단의 착취와 억압에 전면적으로 노출되었다. 반동관료들은 해가 거듭될수록 자본가계급의 속성을 완벽하게 구비해 나갔다. 노동자혁명은 패배하고, 관료자본가들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자본주의가 거의 완벽하게 부활한 것이다!

    노동자 당의 타락과 당내에서의 반혁명

    당의 변질은 더욱 비극적이었다. 이제 당은 출세분자들의 천국이 되었다. 화려한 지위와 부, 막강한 힘을 얻기 위해 가장 타락한 인자들이 당에 가입했다. 당을 장악한 관료분자들은 자기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서 이들을 대량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이 출세분자들의 정신은 바로 그들의 정신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새롭게 당에 가입한 출세분자들의 엄청난 수는 이제 과거의 자본가들, 장교들, 지식인들이었다. 단지 그들은 ‘사회주의자’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을 뿐이었다.

    ▲ 스탈린 개인의 위대함을 내세운 포스터

    1917년 혁명이 타도했던 ‘반동 짜르정부 요인들’이 복권해서 노동자국가를 운영하는 꼴이 되었다. 아부가 판치는 당의 분위기는 결국 한 명의 지도자를 ‘수령’으로 받들어 모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달았다. 관료주의에 맞선 노동대중의 저항권(가령 파업권)은 내란죄로 처벌되어 금지되었다. 출세분자들의 의지를 반영해 이제 ‘당원들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고, 사회주의는 사회적 기여도에 따른 임금격차를 인정하는 사회이므로 이들은 더 많은 월급과 특혜를 받아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원리가 천명되었다. 과거 레닌이 지도하던 시절에 당원들은 노동자의 평균임금 이상을 절대 받을 수 없었고, 그 이상을 받는 사람들은 당에서 가차 없이 추방되었지만, 이제 당원들은 노동자의 평균 임금의 서너 배, 심지어는 열 배 이상을 받는 특권화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게다가 이들은 국영상점에서 가장 싼 가격으로 가장 질 좋은 제품을 구입했다. 반면 노동대중은 싸구려 빵을 사기 위해서도 그 상점 앞에서 몇 시간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나마도 부족해서 그들은 암시장에서 비싼 값으로 겨우 겨우 생필품을 구입했다.

    혁명의 지도 세력이었던 혁명적 노동계급당은 그렇게 ‘반동 관료들의 당’으로 바뀌어버렸다. 혁명적 전통을 계승하려 했던 일부 지도자들은 숙청되거나 추방되었고, 가장 뛰어난 지도자들은 죽임을 당했다. 모스크바 재판 등에서 “제국주의의 스파이”란 조작된 죄명으로 부하린 등의 고참 지도자들은 사형 언도를 받았다. 해외로 추방된 지도자들도 트로츠키처럼 계속 저항하는 경우, 스탈린 관료집단이 보낸 비밀 경찰에 암살당했다. 1930년대 말에 이르면, 1917년 10월 혁명 때 볼셰비키 당 중앙위원들 중에서 4/5 정도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았다. 수천명의 고참 당원들이 저항했다. 이들은 일부는 끝까지 저항하다가 시베리아의 유형지에서 죽어갔다. 그렇지만 관료 분자들의 영향력을 제압할 수 없었다. 관료층은 당과 국가에서 확고한 지배권을 쥐었고, 그들은 10월 노동자 혁명의 모든 유산들을 처참히 파괴했다.

    반혁명의 등장을 초래한 토대들

    무엇이 이것을 가능케 했던가? 여러 분석이 가능하다. 그 중 핵심적인 것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러시아 노동자 혁명은 사회주의 완성을 위한 최초의 시도였다. 당연히 가장 뛰어난 지도자들까지도 그것 앞에 기다리고 있는 난관, 특히 관료주의의 위험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없었다. 이것은 지도자들의 대처를 한 박자 뒤늦게 만들었고, 이들이 위험성을 느끼고 대처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들은 물론 대단히 위대한 지도자들이었다. 그러나 가령 레닌이 완전무결한 영웅이라는 것은 스탈린주의자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낸 신화일 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 또한 시대적 한계를 결코 초월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누구도 가지 못했던 전인미답의 길이었던 사회주의 실현의 길에서 이들은 새롭게 제기될 수 있는 위험성들을 모두 간파하면서 주도면밀하게 대처할 수는 없었다. 이것은 관료분자들이 틈을 비집고 들어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런 취약성은 몇몇 뛰어난 지도자들의 영웅적인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노동계급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러시아 10월 혁명의 소중함은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경험을 역사적으로 물려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경험을 통해서, 미래의 노동자 혁명과 혁명정당은 최종적인 승리를 향해 진격할 것이다.

    둘째, 이런 취약성은 비단 지도자들 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평당원들이 관료주의를 용납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성숙했다면, 관료주의자들의 성장은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10월 혁명 전후로 당에 가입했고 평당원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던 젊은 당원들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했다. 이들에게는 미지의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판단하고 밀어나갈 수 있는 의식성이 부족했다.

    이것 또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이고, 러시아 선진노동자들의 약점으로 단순하게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맑스조차도 일반적인 예상 이외의 것을 언급할 수 없었던 전인미답의 사회주의의 길에 대해 어떻게 단번에, 한 번의 오류도 실패도 없이 정확히 이해하고 똑바로 전진할 수 있을 것인가? 오직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실천만이 시행착오를 통해서 올바른 길과 방법을 제시할 수 있었다. 불행은 이러한 시행착오가 당시 러시아 노동자 권력과 혁명적 노동자 당이 직면했던 대단히 엄혹한 조건에서는 관료집단의 반혁명의 통로가 되었다는 점에 있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경험을 재산으로 삼아, 다음번 주자는 이런 약점을 극복하고 훌륭하게 사회주의를 실현해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더 넓게 보자면 세계 노동자 혁명의 실패가 자리잡고 있다.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 내전, 제국주의 세력들의 포위 등은 만약 세계 노동자 혁명이 성공했다면 러시아 노동자 권력의 사회주의로의 전진에 장애물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을 비롯한 세계 자본주의 나라들 모두에서는 혁명을 이끌 만큼 노동자계급과 당이 훈련되어 있지 못했다. 당시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을 구성했던 유럽과 미국의 자본가계급은 러시아 자본가계급보다 훨씬 강력했다. 수십년, 백여년의 통치 경험, 오랜 기간 동안 체계적으로 육성해온 경찰, 군대, 정부 관료기구들로 그들은 무장했다. 또한 무수한 부르주아 언론들의 일상적인 이데올로기적, 문화적 세뇌 공작들,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심지어는 사회주의 정당의 지도자들까지 부르주아 체제 속으로 포섭하는 잘 발달된 의회주의 장치들로 그들은 구비해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노동자 혁명은 엄청난 난관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다. 내전과 제국주의 전쟁, 방대한 농민층의 후진성 등이 러시아 노동자계급을 위협했다. 이 난관은 노동자 소비에트의 약화를, 패기만만했던 노동자 당원들 사이에서 당혹감과 패배의식을 조장했다. 이것들을 이용해서 퍼져나간 것이 바로 관료주의라는 병균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의 다수 지도자들이 변절해온 과정과 근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이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공세, 거듭된 전투에서 노동자 투쟁의 패배, 노동해방의 전망과 자신감의 상실, 출세주의를 부추기는 부르주아 체제의 영향력 등에 의해 전투적 투사에서 개량적인 관료로 변질하고 말았던 것이다.

    관료주의 체제의 세계적 확대

    1923년 10월에는, 이미 관료 집단의 지도자로 떠오른 스탈린조차 이렇게 써야만 했다. “독일에서 다가오는 혁명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국제적 사건이다.” “사회주의적 생산을 조직하려면 한 나라의, 더구나 러시아 같은 농민의 나라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것을 위해서는 몇몇 선진국 노동자계급의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렇게 혁명을 예찬하고 국제주의를 중시하는 분위기는 독일혁명이 패배하자 관료층 안에서는 아주 빨리 사라져 버렸다.

    1923년 독일혁명 패배를 계기로 소련 관료들은 소련과 제3인터내셔널을 완전히 자신의 입맛대로 이용하고 재편하기 위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 진통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관료들이 마음대로 주무르기 어려울 정도로 아직도 소련과 제3인터내셔널에는 많은 혁명적 전통과 지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23년은 그것을 제거하면서 관료층의 지배력을 안정화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세계 노동자혁명의 결정적 부분이었던 독일에서 혁명은 사실상 좌초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소련에서는 보수적 분위기(세계혁명에 대한 포기)가 성장하게 되었고, 이 분위기에 편승해 관료층은 빠르게 영향력을 확대해나갔던 것이다.

    만약 독일혁명이 성공했다면 레닌을 따라 스탈린마저도 얘기할 수밖에 없었듯이 ‘혁명독일이 새로운 모범’으로 떠올랐을 것이다. 그랬다면 러시아에서 스탈린 반혁명을 충분히 저지하거나 적어도 최대한 지연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정치적 강국인 혁명러시아와 경제적 강국인 혁명독일의 결합은 전세계 노동자들을 무한히 고무시켰을 것이며,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혁명적 파도를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패배의 악순환을 낳은 것은 일국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부족이었다.

    뿌리를 내리고 갈수록 특권을 많이 누리던 관료들이 주된 관심을 보인 문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관료 권력을 안정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소련 바깥의 상황에 휘말려 들어가 관료 권력이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이것은 대기업 단사 노동조합 테두리내의 안정적인 지위에 만족하면서, 이런 지위를 조금이라도 위태롭게 만들 ‘외부투쟁이나 연대투쟁’에 대해 두려워하며 전전긍긍하는 노조관료층의 정서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계속되는 타국의 노동자혁명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제국주의가 소련에 다시 개입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고 이 관료층은 염려했다. 이미 세계 노동자 혁명에 대한 신념과 자신감, 의무감 모두를 상실한 터였다. 그들에게 거의 유일한 관심사는 러시아에 형성된 자신들의 관료 국가를 유지 강화하는 것이었다. 모든 국제 정책은 이 관심사에 철저히 종속되었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완성시킬 수 없다.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 노동자 혁명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 고로 러시아 노동자 권력은 세계 노동자 혁명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국제주의의 원칙”은 관료 국가의 지배층의 입맛에 전혀 맞지 않았다. 다른 이론을 고안해야 했다. 그들은 사회주의 이론을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관료 집단의 이익”을 위해 왜곡시켰다.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완성시킬 수 있다’는 ‘일국사회주의’론은 새롭게 등장한 관료들의 욕구와 열망에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일국사회주의는 ‘바로 혁명으로부터 멀어진 보수적 관료층의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의 승리란 사실 관료 자신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스탈린 관료집단의 영향력은 결국 코민테른까지 집어삼켜 버렸다. 코민테른과 각국 공산당은, 국제 및 각국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 사령부에서 러시아 국가자본주의를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경쟁에서 수호하기 위한 ‘소련의 친위부대’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작업은 19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스탈린 관료 국가는 “세계 혁명의 이익”이라는 구호 아래 사실상 “제국주의”로 전환해나갔다. 45년에 소련은 아주 뚜렷하게 ‘제국주의’의 특성을 갖추고 있었다. 소련 지배자들은세계 혁명에 대해 두려워하면서 서구 열강 지배자들과 협조적 관계를 유지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동시에 소련 관료 집단은 약소국들과 인접한 나라들을 소련 관료 국가의 식민지로 재편해서 억압하고 수탈하는 데 집착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마음대로 통제하고 수탈할 수 있는 친소련 위성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세계 혁명의 지원’이란 구호는 사실 이 위성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친소련 정부를 만드는 것을 위장하는 사기술이었다. 소련 관료 체제와 똑같은 모델의 관료 체제를 그들은 이식하고자 원했다. 다만 이 이식된 관료 체제는 소련 관료 집단의 요구에 충성해야 했다. 독자적인 행보를 하거나 지시와 명령을 거역한다면, 그리고 소련에 의한 제국주의 수탈을 묵묵히 참지 않는다면, 거세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일부 반항에 대해 소련 스탈린 관료 집단은 “민족주의적 편향”이란 이유로 군대까지 파견해 진압에 나섰다.

    동유럽에서 상비군과 경찰,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와 같은 자본가 국가기구들은 노동자들의 힘으로 타도된 것이 아니라 새로 들어선 친소련 자본가권력에 의해 그대로 유지되거나 형태만 바뀐 또 다른 기관으로 대체됐다. 많은 노동자들이 친소련 권력에 대해 ‘노동자를 위한 권력’이라는 환상을 가졌기에 초기에는 투쟁을 자제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착취와 억압의 밧줄이 더욱 노동자들의 목을 조여 왔다.

    결국 동유럽 노동자들은 45년 이전의 자본가정부에 대해서처럼 45년 이후의 친소련 자본가정부에 대해서도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반영하는 것이 56년의 동독․헝가리 노동자투쟁, 68년 체코의 ‘프라하의 봄’, 80~81년 폴란드 연대노조의 혁명적 투쟁이었다. 생존권과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을 동유럽과 소련의 자본가군대가 무참히 짓밟자,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은 소련이 노동자의 권력이 아니라 노동자를 억압하는 권력임을 치떨리게 느낄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위성 국가 - 북한 관료 자본주의 체제

    유럽과 전 세계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소련, 동유럽 자본가정권에 등을 돌렸지만, 한국에서는 자본가 군사정권의 극심한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오히려 북한 자본가정권에 막연한 호감을 갖거나 적어도 비판적 태도를 유보하는 모습들이 오랫동안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진실은 정확히 밝혀야 한다. 러시아의 위대한 볼셰비키 혁명가들과 노동자들을 수없이 처형하고, 동유럽에서 진정한 노동해방을 갈망하는 노동자들을 탱크로 쓸어버린 소련 제국주의가 북한에서 ‘노동자국가’를 세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소련은 동유럽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북한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본뜬 위성국가를 건설해갔다. 소련은 이 임무의 주역을 김일성에게 맡겼다.

    김일성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기는 했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웠던 수많은 세력 중 작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45년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미미한 존재에 불과했다. 김일성 부대 외에도 중국, 만주, 러시아 등 곳곳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훨씬 더 강력한 세력들(가령 중국공산당의 영향력 아래 있던 연안파)이 있었으며, 시퍼런 일제통치의 칼날 속에서도 한반도의 공장과 농촌에 뿌리를 두고 혁명적 투쟁을 전개했던 세력들(이재유 같은 토착 노동해방운동 세력)이 존재했다. 김일성은 일제에 맞서 저항했던, 이런 수많은 세력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기에 결코 해방된 국가에서 완전히 지배권을 장악할 수 없는 존재였다.

    김일성이 북한에서 완전히 권력을 독점한 것은 10년 이상 남로당계, 소련파, 연안파 등 수많은 세력의 지도자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그들을 숙청한 뒤에야 가능했다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그만큼 해방 직후에 김일성의 영향력은 결코 크지 않았는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 점이 소련 제국주의가 김일성의 손에 권력을 쥐어준 이유였다. 소련 제국주의 군대는 자신들에게 충성하지 않고는 권력을 획득할 수 없기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김일성을 내세워 북한을 위성국가로 확고히 장악하고자 했던 것이다. 소련 지배자들의 후원 아래 김일성은 갑작스럽게 지도적 인물로 부상됐고, 급기야 1946년 2월에는 북조선 과도인민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북한은 토지개혁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러시아에서 10월 혁명 이후 전개된 토지개혁과 달리 ‘노동자혁명 없는 개혁’이었다. 이것은 봉건 잔재를 철폐하는 것이기는 했지만, 노동해방 사회 건설의 첫걸음이 아니라 국가자본주의를 확립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였다. 북한은 공장, 건물 등 자본을 국유화했으며, 이것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전화’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시행된 국유화는 노동해방 국유화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국유화에 불과했다. 그것은 북한 김일성 권력이 소비에트, 파리코뮌과 같은 노동자계급의 자주적이며 대중적인 권력이 아니라 급진적 민족주의자의 권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국유화는 스탈린 강제 농업집산화와 마찬가지로, 김일성 권력을 안정화하고, 노동자대중에 대한 착취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스탈린 지배 하의 소련, 동유럽, 그리고 북한은 노동자권력이 결코 아니었다. 노동자계급이 그토록 분쇄하고자 했던 관료제가 동유럽과 북한에서는 처음부터 명백하게 나타났다. 북한에서 김일성은 박헌영 등 정치적 반대파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당과 정부 안에서 비판을 원천 봉쇄했고 절대적 권력을 세워갔다. 러시아 소비에트와 비슷한 형식의 인민위원회가 있었지만, 인민위원회는 노동자의 권력이 아니라 노동자들과 여타 소부르주아 세력들이 뭉뚱그려져 있는 계급연합권력이었고, 여기에서 민주주의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게다가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소환, 선출, 탄핵의 권리가 점차 유명무실해졌으며, 북한 김일성 지배분파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단순 집행기관으로 전락해갔다. 북한에서 정치의 주인은 김일성과 그를 추종하는 소수 관료들이었으며, 다수 노동자들과 피착취 근로인민들은 정치에서 소외되고 대상화됐다. 제국주의의 침략 위협을 핑계로 상비군을 항구적으로 존속시켰으며, 군대 안에서 관료적 통제를 심화시켜갔다.

    북한노동당은 처음 출발할 때부터 노동자해방 사상으로 무장하고 노동자계급의 가장 우수한 분자들을 결집시킨 노동자해방 정당이 아니었다. 김일성 유격대는 주로 소부르주아 농민들에 기초한 급진적 항일 민족해방 투쟁부대였다. 그리고 이후 건설된 북한노동당 또한 이런 소부르주아 농민들, 지식인들 등이 잡다하게 참가한 급진적 소부르주아 민족정당이었다. 일제 식민지 아래서 제국주의적 침략에 맞서 싸우며 민족해방을 쟁취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일정한 진보성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피억압 민족의 민족해방 투쟁도 노동자계급의 해방이라는 원대한 목표에 종속되고, 노동자해방 투쟁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배치될 때에만, 그리고 민족해방 투쟁에서도 급진적 부르주아나 소부르주아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주도성이 관철될 때에만 일관되게 전진하고 승리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족민주권력은 노동자혁명을 통해 노동해방 권력으로 전진할 것인가

    김일성 유격대와 초기 북한노동당 같은 급진적 소부르주아 정당을 노동자계급 쪽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깊게 뿌리내린 인터내셔널이 있거나 적어도 한반도에서 노동자해방을 흔들림 없이 추진할 수 있는 전투사령부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트로츠키가 건설한 제4인터내셔널이 있었으나 이 조직은 제3인터내셔널처럼 전 세계 노동자투쟁에 실질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며 위력적인 힘을 갖고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그리고 국내 혁명운동에서도 스탈린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진정 노동자계급적이고 혁명적인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북한노동당은 민족해방의 과제가 달성된 다음에는 일정한 진보성까지 마감하고 부르주아 정당으로 전화해갔다.

    ▲ 김일성 우상숭배

    시간이 갈수록 이 당은 더욱더 자본가국가 관료들과 사회 전체에 포진한 지배 엘리트들의 당으로 확실하게 전락했다. 이런 김일성 자본가권력이 수행한 국유화 조치가 노동자들의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는 노동해방 사회 건설의 첫걸음이 결코 아니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전쟁은 남북한의 노동자계급, 피착취 근로인민의 투쟁역량을 결정적으로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북한에서는 관료적인 국가자본주의가 노동자, 인민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바탕으로 더욱 분명하게 형성되어갔고, 한국에서는 수십 년 동안 혁명투쟁이 단절되는 쓰라린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한편 노동자대중에 대한 착취도 강화해 갔다. 1956년 시작된 ‘천리마 운동’은 58년 말에 ‘천리마 작업반 운동’으로 발전되어 광공업뿐만 아니라 농업 등 모든 산업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북한판 스타하노프 운동, 북한판 대약진 운동으로서 노동자들의 노동강도를 현격하게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시행된 ‘청산리 방법’은 당, 국가 간부에게 목표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숙청하는 것으로, 간부들의 노동자착취를 독려하는 위로부터의 운동이었다. 북한 자본가계급은 이에 따른 대중적 저항을 무마하고 지배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김일성, 김정일 우상숭배를 추진했다. 그러나 노동자해방은 노동자대중 자신의 창조적 운동이기에 우상숭배와는 정면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다. 지배자에 대한 우상숭배는 노동자들이 지시에 무조건 따르는 수동적인 기계부품 정도로 전락하고,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의 몸놀림과 입놀림을 넋 놓고 쳐다보기만 하는 수동적인 관객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게다가 우상숭배는 엄청난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동상 및 기념관 건립, 호화찬란하고 거대한 숭배 행사에 쏟아 붓게 함으로써 북한경제를 위기로 몰아가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북한 지배계급은 ‘사회주의 계획경제’라고 떠벌였지만, 거기에서 ‘계획’은 국가자본가들의 종이 위에서만 존재했고 실제로는 무계획상태가 지배했다. 바람직한 전사회적인 계획화는 직장과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대표들이 국가업무를 보고, 언제나 노동자들이 국가관리들을 선출, 소환, 탄핵할 수 있을 정도로 노동자 민주주의가 발전해있고, 국가관리들의 임금이 숙련노동자의 평균임금을 넘지 않을 정도로 관료적이지 않으며, 모든 작업장 노동자들이 생산의 계획화에 참여하고 이들의 소비욕구를 반영해 생산을 계획하는 노동해방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관료들만이 주인이었던 북한에서 노동자의 창의와 자발성을 끌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초기에는 ‘미 제국주의가 다시 쳐들어올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 유포와 강압으로 북한 노동자들을 강도 높은 노동에 동원하면서 생산력을 발전시켰지만, 이런 사기와 강압만으로 생산력을 계속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특히 강도 높은 노동의 결과물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되자, 노동자들의 생산열망은 형편없이 축소되었다. 그 결과 70년대 이후부터, 특히 80년대부터 생산성 향상률은 사적 자본주의에도 못 미칠 정도로 떨어졌으며 급기야 마이너스 경제로 전락했다. 그럴수록 북한 자본가계급은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해 갔다.

    이처럼 북한 체제는 탄생할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노동자 사회주의 체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북한 체제는 독일 노동자 혁명의 실패에서 시작해, 소련에서 노동자 권력이 파괴되고 스탈린 관료 집단의 반혁명이 승리하는 데로까지 나아갔으며, 결국 코민테른을 집어삼킨 뒤 불가리아, 동유럽, 중국, 한국으로까지 퍼져나간 “세계 노동자 혁명의 패배”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다. 북한 체제는 이 패배의 불가피한 결과로 탄생한 세계적 관료 체제의 한 부분이다.

    과연 1990년대 초에 무너진 사회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1990년대 초반에 무너진 러시아권력의 성격은 무엇인가?

    30년대 말에 관료자본가사회로 질적으로 변화한 뒤에는, 러시아사회는 더 이상 노동자권력이 아니었다. 단지 그 반동적 성격만이 날로 강화되었고, 나란히 그 모순 또한 성장했을 뿐이었다. 이 관료자본가사회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저항, 그리고 관료집단 내부의 파벌투쟁에 의해 80년대 말 와르르 붕괴되었다. 이것은 과연 사회주의 노동자국가의 붕괴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망해야 마땅한 관료자본가집단의 몰락 혹은 위기였을 뿐이다. 이에 대해 우리 노동자계급이 비통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비통한 것은 대중의 분노가 제2의 1917년 혁명으로 결실을 맺은 것이 아니라 관료자본가 체제를 통상적인 자본주의 체제로 변화시킨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는 점에 있다. 더군다나 90년대 이후 러시아에서 권력과 생산수단을 장악한 자들은 사실 스탈린 관료집단의 일부이다. 노동자들을 억누르던 바로 그 경찰, 공안기구, 군대의 책임자들이 그대로 지배하고 있다. 노동자들을 착취하던 관리들이 관료자본가에서 사적 자본가로 옷을 갈아입었다. 단지 자본주의의 형태만 바뀌었을 뿐, 그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이 분명하다. 1980년대 말 러시아사회는 노동해방 사회가 절대 아니다. 또한 사회주의가 한계를 드러낸 것도 아니다. 1930년대 말에 반혁명이 완성된 이후, 러시아에서는 노동자국가라고 할 만한 국가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에 폭로된 국가는 어떤 자본주의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반동 자본주의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3. 러시아 혁명의 교훈, 그리고 한국 노동운동의 계승의 길

    10월 노동자 혁명의 교훈

    역사를 정리해보자. 러시아에서 일시적으로 성립했던 노동자국가는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자라난 괴물을 만나 전복되고 말았다. 이 괴물의 이름은 바로 ‘관료주의’다. 이 관료주의의 본질은 노동자계급 대중으로부터 선출되었지만 점차 그들과 분리되어 그들 위에 군림하는 것이며, 노동자 대표자의 지위를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개인적 출세를 위해 악용하는 것이다.

    이 관료주의가 활개를 치고 주도권을 확보한 외부적 요인으로는 노동자 국가가 직간접 방식으로 활용해야만 했던 부르주아 전문가들, 지식인들, 관리들이 미쳤던 자본주의적 영향력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노동자계급 국가기구에 부르주아적 습성과 편견, 출세주의 등을 은밀히 불어넣었다. 그런데 이 영향력을 제거하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냈던 노동분업의 위계질서 - 노동자들은 단순한 노동에 종사하고, 고급 기술 분야, 지식인 분야, 관리 분야 등은 부르주아지 혹은 중간계급이 담당하는 분업 질서 - 를 해체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다. 노동자들이 훌륭한 교육을 받아 기술과 과학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하는 과정, 작업장과 사회 전반에 대한 관리 통제 경험을 축적하는 과정 등을 완수하는 것은 사회 전체적인 개혁과 함께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노동분업 상의 이러한 위계질서를 해체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분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 이런 능력을 완전히 확보하기 전까지는 노동자계급의 지배란 불완전할 수밖에 없고, 불가피하게 부르주아적 영향력에 노출된다.

    이 지점에서 “문화적 영역에서의 전투”가 일정에 오른다. 문화적 전투란 “노동자들이 지식과 과학을 축적하고 사회와 작업장에 대한 완전한 관리와 통제 능력을 배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부르주아적 출세주의와 개인주의” 등에 대해 맞서 싸우면서 진실로 집단주의적인 기풍을 확립하고 체현하면서 사회주의적 인간형으로 거듭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부르주아적 문화에 굴복하고 사회주의적 문화를 창조하지 못한다면, 혁명은 후퇴하고 만다. ‘문화적 전장에서의 패배’는 곧장 정치적 분야에서의 패배로 연결되어 나간다.

    그런데 이런 문화적 전장에서의 전투는 러시아 노동자계급 앞에 처음으로 던져진 문제였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승리하는 것은 유럽 노동자계급에 비해 훨씬 어려웠다. 이유는 간단하다. 유럽 부르주아지는 오랜 지배 경험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노동자계급을 문화적으로 통제하는 잘 발달된 조직들, 기구들, 문화적 장치들에 대해 일찍 눈 뜨게 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장치들은 정교하게 작동했다.

    의회주의 장치들은 노동자 당의 지도자들을 자본주의 정치 체제에 포섭했다. 개량주의 노동자 당의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국회의원들이나 정치인들의 정서와 분위기, 가치관, 심지어는 뇌물 수수와 같은 습성들까지 공유했다. 관료화된 노동조합 장치들은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을 마찬가지로 포섭했다. 합법 노동조합의 정교화된 교섭 장치 등은 부르주아적 습성과 가치관에 포섭된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대량 양성하는 기구로 작동했다. 특권, 뇌물 수수 등이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포섭했다.

    반면 러시아는 달랐다. 한 번도 완전히 순수한 형태로 권력을 장악한 적이 없었던 자들이 러시아 자본가계급이었다. 그들은 짜르 전제 정치에 ‘기생’해서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했다.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만들어낸 17년 2월 혁명을 통해서야 러시아 자본가계급은 거의 반(半)강제적으로 권력으로 떠밀렸다. 부르주아 임시혁명 정부의 약 7-8개월의 기간이 그들이 공식적인 정치적 지배계급으로 경험을 축적했던 기간이었다. 그것도 노동자 소비에트와 같은 또 하나의 권력의 견제와 감시 하에서만 작동했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이미 유럽에서는 수십 년 전에 작동하고 있었던 부르주아 민주주의 장치들 - 합법적인 개량주의 노동자 당, 조합주의 노동조합 - 이 거의 작동해본 적이 없다. 두마 의회는 껍데기뿐인 것으로 통상적인 의회와는 전혀 달랐다. 노동조합의 경우에도, 조직률이 2%를 밑돌 정도였고, 그것도 완전한 관제 노조를 제외하고는 전부 비밀 노조일 정도였다.

    학교, 교회, 언론 등을 매개해서 노동자계급에게 불어넣는 부르주아 문화들 - 이데올로기, 의식, 가치관 등 - 도 유럽에 비해 러시아는 훨씬 더 취약했다. 가령 당시 유럽 노동자들이 평균적으로 받았던 교육에 비해 러시아 노동자들이 받았던 교육은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부르주아 신문들을 일상적으로 받아보았던 노동자들의 비율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낮았다. 상황이 이랬기에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10월 혁명 당시에 문화적으로 순결했다. 더 정확히 말해서 ‘문화적 영역의 전투’의 경험 없이도 권력을 정치적으로 장악할 수 있었다. 이것은 양날의 칼이었다.

    유럽 노동자계급은 문화적 영역의 전투에서의 승리 없이는 권력 장악이 불가능했다. 부르주아지의 문화적 영향력에 맞선 투쟁과 정치투쟁의 성패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회주의와 노동조합주의, 부르주아 의식과 가치관, 부르주아 학교와 교회 등에 대한 투쟁 없이 유럽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진군하는 것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유럽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은 곧 문화적 영역에서의 전투의 승리와 같은 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정치혁명’에 ‘선행’해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서 유럽 노동자계급의 높은 교육 수준, 기술 수준 등은 사회주의 건설과 완성에서 대단히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을 것이다.

    반면 러시아는 달랐다. 러시아 사회의 문화적 후진성은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쉽게 만들었지만, 권력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게 만들었다. 러시아 노동자들이 러시아 구 사회로부터 물려받은 낮은 문화적 수준은 사회주의 건설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정치 권력을 잃었지만, 문화적 영역에서 반격을 도모했다. 유럽 부르주아지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문화적 영향력을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정치권력을 잃은 뒤 필사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국가에서 활용되는 부르주아 전문가들, 구 관리들, 작업장에서 활용되는 고급 기술자들, 전문가들, 관리자들은 노동자 관리들, 노동자 경영진들, 심지어는 소비에트 대표자들까지 부르주아적 문화에 포섭하려 모든 노력을 다했다.

    결국 그들의 시도가 성공하고 말았다. 문화적 영역에서의 전투에서 충분히 단련되지 못했던 러시아 노동자계급 속에 ‘관료층’이라는 괴물들을 탄생시킴으로써 부르주아지는 반혁명의 토대를 놓았던 것이다. 이 관료층은 부르주아지의 가치관, 대중관, 편견, 속물성, 습성 등을 완전히 재현했던 것이다. 최종적으로 이 관료층은 노동자 국가의 모든 유산들을 파괴하면서 부르주아 국가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은 피어린 경험을 통해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문화적 영역에서의 전투’의 사활적 중요성을 가르쳐주었다. 현대에 이르면 거의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문화적 영역의 전투가 권력 장악 이전에 이미 일정에 오르고 있기에 러시아의 경험은 무용한 것으로 간주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권력 장악 이후’가 아니라 ‘이전’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영역에서의 전투의 결정적 중요성과 전투에서 의지해야 할 노동자계급의 무기들’은 기본적으로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또한 러시아의 경우와는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현대 노동자계급에게도 문화적 영역의 투쟁이 정치권력 장악 이후에도 어느 정도는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 혁명과 노동자 당의 지도력 문제

    러시아 혁명의 교훈 중 하나는 국제주의의 사활적 중요성이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전망했듯이, 만약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 중 일부라도 혁명을 성공시켰다면 러시아 혁명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졌을 것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부르주아적 문화를 받아들이고, 일국 사회주의의 전망으로 후퇴하며, 사회주의로의 전진을 포기하는 등의 모습들이 러시아 선진노동자들에게 강력하게 반격당하지 않고 퍼져갔던 데는 세계 혁명의 가능성이 닫히면서 러시아 노동자 권력이 고립된 것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것은 러시아 선진노동자들과 노동자계급 앞에 사기저하와 낙담의 분위기를 키웠고, 러시아 노동자 혁명이 직면했던 어려움들을 백 배 이상 증폭시켰다.

    독일 등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의 문명화된 노동자들의 지원을 받을 수 없었기에, 러시아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분자들의 활용이라는 타협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부르주아적 영향력이 노동자 국가 속에 퍼질 수 있는 객관적 토대를 이루었다. 또한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탄생한 노동자 권력과 결합할 수 없었기에, 러시아 노동자 권력이 사회주의로 전진하는 것은 대단히 느리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를 창출할 수 있는 선진적인 기술과 생산능력이 외부 선진국의 노동자계급의 지원이란 방식으로 공급될 수 없었기에 후진국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엄청난 난관과 마주쳤다. 사회주의로의 직선적인 전진의 길은 닫혀버렸던 것이다.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자본가계급의 끊임없는 반란, 특히 내전 과정에서 러시아 노동자 권력이 입은 상처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이것은 노동자 권력의 대중적 토대인 공장과 작업장 단위의 소비에트를 사실상 무력화시켰고, 사회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경제적 기반들을 상당한 기간 동안 해체시켰다. 기아, 가난 등이 러시아 노동자계급을 덮쳤고, 이것은 피로도를 극대화시켰다. 노동대중의 자신감과 창조성, 혁명에 대한 확신은 약화되었다.

    고립 상태가 만들어낸 이런 난관들, 사기저하, 소비에트의 기반 축소 등이 총체적으로 결합되면서, 거기에 역사상 처음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주의로 나섰던 노동자계급의 첫 주자가 가졌던 경험 부족, 심지어는 당시의 최고의 혁명정당이었던 볼세비키 당의 지도자들마저도 당시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한계들이 결합되면서 러시아 혁명은 좌초하고 말았다.

    가장 결정적인 패배는 바로 러시아 볼세비키 노동자 당이 스탈린 관료집단에게 장악당해 버린 것이다. 만일 비록 혁명은 좌초했을지라도, 이 당이 관료집단을 숙청해내고 노동계급 혁명당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면, 그래서 러시아 혁명의 교훈들이 이 당에 의해 전수되었다면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단지 세계 혁명의 패배에 따른 역관계의 불리함 때문에 러시아 혁명 또한 패배를 면하지 못했을 뿐, 혁명의 전통, 사회주의 혁명당의 전통은 그대로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볼세비키 당이 관료집단의 당으로 변질하면서 혁명당의 전통을 관료집단이 형식적으로 가져가버림으로써, 마찬가지로 타락한 관료집단의 국가가 노동자 국가인 것처럼 위장할 수 있게 됨으로써, 러시아 혁명의 위대한 가치는 시궁창에 처박혀 버렸다. 이것을 되살려, 러시아 혁명을 딛고 세계 노동자 혁명의 전통을 발전시키는 것은 바로 현 시대의 과업이 되었다.

    패배 속에서의 희망

    불행히도 결정적인 고지까지 전진했던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이 패배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패배다. 세계 노동자 혁명의 과업에 1914년 이후 세계 노동자계급은 처음 맞닥뜨렸다. 국제적 준비가 부족했음이 드러났다. 가장 약한 고리였던 러시아에서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무너뜨렸지만, 주요하고도 결정적인 고리였던 유럽과 미국에서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 결과 세계 노동자 혁명의 패배의 물결은 결국 러시아 혁명까지 집어삼키고 말았다.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노동자 권력을 세우는 데서는 성공했지만, 이 권력을 발전시키고 사회주의를 달성하는 위력적인 수단으로 완성시키는 데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것 또한 충분히 이해할만 한 것이다. 권력을 장악해 사회주의로 전진하는 실제 경험을 그 어떤 노동자들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그재그나 오류, 실패는 불가피했고, 불행하게도 세계 노동자 혁명의 실패가 야기한 조건은 너무나 가혹했다.

    마지막으로 노동운동은 노동해방의 거대한 과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내부와 외부의 적과 맞닥뜨린다. 초기에는 외부의 적이 결정적인 걸림돌이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이 운동이 달성해야 하는 과제가 결정적인 수준으로 도약하면 할수록, 가장 큰 걸림돌은 노동자계급이 아직 척결하지 못한 내부적 질병(다름 아닌 노동자계급 내부로 스며든 자본주의적 요소들)이다. 노동자계급은 이 내부적 질병을 말끔히 제거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자본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을 열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획득한다.

    ▲ 독일 혁명의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

    관료주의로 대표되는, 노동자계급 내부로 스며든 부르주아적 영향력에 맞선 투쟁에서 유럽과 러시아 노동자계급 모두가 패배하고 말았다. 유럽 노동자계급은 이런 취약성 때문에 개량주의 세력들을 뚫지 못하고 혁명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런 취약성 때문에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권력 장악까지는 성공했지만, 이 권력을 유지하고 완성하는 데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패배를 자양분으로 삼아서 완전한 승리를 달성하는 과제는 이제 후대의 노동자들에게 온전히 남겨져 있다. 이 패배는 무엇보다 가치 있는 자양분이다. 노동자계급의 세계적 단결과 준비가 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지, 권력 장악 이후 사회주의로의 길에서 노동자계급이 직면하게 될 어려움이 무엇인지, 개량주의, 관료주의를 비롯한 노동운동 내부로 스며든 부르주아적 영향력에 맞선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게 된 것은 러시아 혁명에서 시작된 세계 노동자 혁명의 경험 덕분이다. 이것들은 다음번 물결에서 전세계 노동자계급의 승리를 준비하는 가장 결정적인 무기다.

    게다가 이 무기를 갈고 다듬으면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반혁명’에 맞서 러시아 노동자 혁명의 전통을 사수하고 계승하려 실천하는 희망들이 있다.

    1930년대에 이 희망은 17년 노동자 해방운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관료집단과 맞서려고 했던 트로츠키, 그리고 그에 의해 건설된 제4인터내셔널로 존재했다. 스탈린 관료집단이 동원한 사형을 비롯한 무지막지한 테러에도 불구하고, 수천 명의 젊은 러시아 노동자들은 트로츠키의 지도를 따라 ‘러시아 노동자당과 노동자국가의 재건’을 향해 전진했다. 그들은 지하에서 비밀리에 스탈린 관료집단의 본질을 폭로하는 문건을 배포했고, 관료국가를 타도하고 노동자국가를 재건할 필요성을 선동했다. 그들은 ‘러시아 1917년 혁명은 왜 패배했는가?’를 질문하면서 이 패배를 딛고 완전한 승리에 도달하기 위한 길에 대해 학습하고 연구했다. 또한 그들은 노동대중이 존재하는 현장 속에서 저항과 투쟁을 계속해서 조직했다. 비록 레닌과 트로츠키를 비롯한 과거의 위대한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병으로 죽거나 스탈린의 법정에서 사형당하고 해외로 추방되었지만 그들은 이 지도자들의 문건을 돌려보면서 미래를 준비했다.

    ▲ 1940년의 트로츠키

    공안기구들은 광활한 러시아 곳곳에 숨어서 이런 반격을 조직하는 수천의 젊은 노동자들을 너무나 두려워했다. 비밀경찰들은 이들을 색출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결국 이 수천의 젊은 투사들의 대부분이 검거되어 시베리아의 유형지로 추방되었다. 그들 중 주도자들은 사형당했다. 그들의 대부분은 시베리아의 감옥에서 강제노역에 종사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일부는 목숨을 구걸하면서 복종을 맹세해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다수는 끝까지 노동자의 대의를 지키다 죽어갔다.

    세계적으로는 트로츠키가 조직한 제4인터내셔널이 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력은 너무 젊었다. 그래서 약점이 많았다. 그들은 대의에 대한 충성심은 강했지만, 변질한 늙은 지도자들만큼 대중적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했고 또한 대중을 지도한 경험이 부족했다. 이런 약점은 트로츠키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누그러뜨려질 수 있었지만, 그가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목숨을 잃자 증폭되었다. 결국 제4인터내셔널은 ‘세계 노동자계급의 새로운 지도부 건설, 러시아 노동자당의 진정한 전통 계승’이라는 본연의 목표를 충분히 달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이들의 후예들이 세계 곳곳에서 다시 떠오르고 있다. 1930년대 이후 수십 년간 승리자로 군림했던 스탈린 관료집단은 지금 그 누구에게도 칭송받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스탈린 관료집단의 후예들까지도 ‘대중적 비판’이 두려워서 ‘스탈린에 대한 비판’에 열을 올리고 있다. 반면 1930년대 내내 인간사냥을 당하면서 고통받아야 했고, 러시아의 공식기록에는 ‘제국주의의 간첩이자 반동’으로 기록되었던 수천의 젊은 투사들은 지금 세계 선진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다시 살아나고 있다. 세계의 투철한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들은 반동의 시대에 굴하지 않고 미래를 준비했던 가장 훌륭한 투사로 기억되고 있다. 자, 이것이 역사다. 역사는 오직 진실만을 기록하며, 때문에 역사적 책임감을 갖는 진지한 투사들은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오직 노동자계급의 대의를 따라 전진하는 것’말고는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 일시적인 난관과 고립을 이들은 거뜬히 뛰어넘는다. 그들은 비록 스탈린 관료집단에 의해 학살당했지만, 오직 그들만이 승리자로 기록될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에 의해, 세계 노동해방운동은 지금 다시 몸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노동해방운동에 의해 17년 러시아 혁명은 승리를 위한 위대한 예행연습이였음을 입증할 것이다. 마치 1905년 러시아 혁명이 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을 위한 위대한 예행연습이었듯 말이다.

    [보론] 러시아 노동자국가가 겪은 위기와 한국노동운동의 당면 위기

    - 같은 뿌리, 같은 과제

    러시아 노동자당과 노동자계급이 1917년 이후 약 20년 동안 직면했던 난관이 우리와는 동떨어진 것일까? 혹 이 난관이 다름 아니라 한국노동운동이 지금 치열하게 대면하고 있는 핵심적인 문제점과 동일한 것이 아닐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요한 몇몇 측면에서의 차이들이 고려되어야만 하겠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 단순화시켜 고찰한다면 1917년 이후 약 20년간 러시아 노동운동이 직면했던 난제들, 위기들은 1987년부터 지금까지 한국노동운동이 겪고 있는 난제들, 위기들의 뿌리와 근본에서 동일하다. 어떤 의미에서인가? 이 기간 동안 한국노동운동 또한 외부의 적에 대한 투쟁만이 아니라 내부의 적에 대한 투쟁이라는 새로운 과제와 마주쳤고, 이것이 노동운동이 해결해야 하는 중심적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이 내부의 적(노동운동으로 스며든 자본주의적 요소)에 맞선 투쟁에서 성공적으로 전진하지 못함으로써 관료주의라는 거대한 괴물이 확대되고 노동대중은 운동의 주인공에서 객체로 점차 떠밀리면서 온갖 타락과 변질이 악성종양처럼 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 내부의 적의 힘이 강화됨으로써 과거에 노동운동이 거둔 성과와 쟁취한 진지들이 허물어지고, 심지어 적들에게까지 ‘노동운동은 병들었고, 진보를 말할 자격이 없다’는 비아냥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형태와 발딛고 있는 객관적 조건은 판이하게 다르지만, ‘내부’에서 떠오르는 질병들 때문에 운동이 결정적인 위기를 맞고 있고 퇴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상황은 본질적으로 너무나 흡사하다. 또한 이런 질병들이 성장하고, 이 질병이 탄생시킨 관료층이 독버섯처럼 퍼져갔던 역사적 과정은 러시아에서나 한국에서나 대단히 흡사하다. 이 점을 살펴보자.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이 탄생했다. 초기에 이 운동의 지도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해고와 수배, 감옥과 같은 가시밭길이었다. 이 때 출세분자들이 민주노조운동에 개입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총회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아래로부터의 통제체계를 바탕으로 조합원대중은 출세분자들을 가차 없이 끌어내렸고, 진실로 헌신적인 투사들을 지도자로 세워냈다. 가령 당시의 현중 파업의 경우, 조합원대중에 의해 하루에도 두 번씩 위원장이 교체되는 일도 있었다. 출세분자들은 조합원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압력(총회 민주주의)에 떠밀려 거의 명함도 내밀 수 없었다.

    그러자 정부와 자본가계급은 단지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만으로는 이 운동을 깨뜨릴 수 없다는 점을 직감했다. 그들은 전술을 바꿔 지도자들에게 갖가지 특권을 건네고 정말이지 교묘한 방식으로 회유하는 작업을 병행하고, 오히려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출세분자들이 노동운동에 기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노동운동 지도자(가령 위원장과 핵심 간부)의 지위는 화려한 조명, 특권, 으스대기, 현장에서의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하지만 조합원 대중과 현장활동가들의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아직 강한 상황에서는 그들은 어느 정도 자신의 실체를 위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마치 투사인 것처럼 행세하곤 했다.

    소수 간부들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조합원 대중의 실질적 참여는 봉쇄되어 들러리로 전락하는 새로운 구조가 확립되어야만 출세분자들이 상황을 제대로 장악할 수 있었다. 이것은 야금야금 진행되었다. 이들은 조합원 대중에게 ‘피곤하게 노조 활동에 참여할 필요가 없으며, 모든 것은 소수 간부들과 지도자들에게 맡기고 당신들은 굿이나 보다가 떡이나 먹어라’ 하고 꼬드겼다.

    총회 민주주의는 점차 명목상의 지위로 밀려났다. 총회는 점차 빈도수가 줄어들었고, 기껏해야 관료들이 가져온 타협안을 추인하는 절차 정도로 왜소화되기 시작했다. 조합원 대중의 직접적인 참여와 통제권에 바탕을 둔 대중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기구들이 노동조합에서 추방되거나 단지 껍데기로만 남으면서, 소수 간부들의 교섭 기구들과 집행기구들이 비대하게 성장하고 결정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도 함께 일어났다.

    결국 러시아에서 노동자 소비에트가 유명무실화되면서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통제력이 사라지고 그 결과 출세주의 관료들이 마음껏 준동하기 시작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 한국에서도 전개되었던 것이다. 단지 러시아에서의 ‘노동자 소비에트’의 지위를 한국에서는 ‘조합원 총회로 대표되는 노동조합 민주주의’가 차지했고, 러시아에서는 국가관료가 저지른 배신을 한국에서는 노동조합관료들이 저지르고 있을 뿐이다. 상황의 동질성은 여기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피로감, 사기저하의 확대, 대중과 선진투사 사이의 결합력의 약화

    상황이 어려워지고 세계 노동자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서는 장기간의 분투가 필요하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상당수 러시아 노동자들이 피로감을 느꼈다. 이것을 파고들면서 점차 관료층이 영향력을 넓혀갔던 과정이 한국에서도 재현되었다.

    87년 직후 3~4년간 직선적으로 운동이 전진할 때는 몇 년이면 충분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자본과 정부가 체계적인 반격에 나서면서 이제 수십 년 이상이 걸리는 오랜 헌신이 필요한 장기적 투쟁이 필요하다는 점이 드러났다. 이처럼 전투가 장기화되자 어려움은 증폭되었다. 또한 출세분자들에 대해서 정부와 자본은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갖가지 특혜를 베풀었지만, 투쟁 정신과 대중에 대한 책임감을 잃지 않고 있는 진정한 투사들에 대해서는 더욱 가혹하게 대응했다. 감옥, 오랜 수배생활, 가정생활의 붕괴 등이 투사들을 덮쳤다. 이것이 한두 해라면 모르지만 5년, 6년 이상 길어지자 충분히 단련되지 못했던 투사들은 피로감을 느꼈다.

    게다가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부의 엄청난 탄압이 가해졌고, 이것에 맞서는 것은 단사에서 수백, 수천, 수만의 대중을 집결시키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거대한 활동(훨씬 더 체계적이고 치밀하며 장기적인 활동)을 요구했다. 당혹감이 밀려들었다. 현장에서 노동조합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고, 그래서 출세분자들의 준동을 차단하면서 해고자들을 비롯한 선진적 투사들을 대중이 떠받치고 있을 때는 피로감과 사기저하는 어느 정도 떨쳐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수배와 구속, 해고로 인해 투사들이 대중으로부터 어느 정도 격리된 반면, 출세주의 분자들은 적들에게 수천가지 지원을 받으면서 대중에게 갖가지 영향력을 미치게 되자 현장에서 역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출세주의 분자들은 노동자의식에 투철한 지도자들이 현장에서 밀려난 사이에 현장대중의 의식과 정신을 변질시켜 나갔다. 이른바 ‘실리주의’라고 불리는 자본주의적 의식을 그들은 대중 속에 계속 보급해나갔다. 그들은 ‘타 사업장과의 연대보다는 우리 사업장 노동자들의 이익에만 몰두하자’고 선동했다. 그들은 ‘결사적인 파업을 하면 해고자들이 대량으로 발생하고 무노동 무임금으로 손해도 막심하니 가능하면 투쟁을 자제하자’고 선동했다. 그들은 ‘노동조합 활동에 조합원들이 직접 참여하는 것은 피곤하지 않느냐, 그러니 노동조합의 일은 간부들에게 전담시키고 조합원들은 그 결과나 맛보라’고 선동했다.

    조합원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통제력, 그리고 전투적 지도자와 대중 사이의 끈끈한 결합력, 노동자의 대의를 지키려는 대중의 강력한 본능이 점차 약화되었다. 이제까지는 투쟁성과 헌신성을 단호하게 사수해왔던 가장 선진적 지도자들 속에서까지 피로감과 사기저하가 대량으로 퍼져갔던 시기도 바로 그 시기였다. 그들을 지탱하던 에너지의 원천인 대중과의 혈연적 연대감이 약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많은 투사들이 해체되면서 출세분자들, 실리주의자들의 정신에 감염되기 시작했다. 특히 조합원대중의 정신이 어느 정도 해체되고 변질되자, 선진노동자들의 상당수마저도 ‘대중과의 결합’이라는 이름으로 실리주의 정신에 굴종했다. 이런 식으로 실리주의 정신은 적들에 의해 출세분자들이나 연약한 지도자들에게 주입된 것이고, 다시 이들에 의해 조합원대중에게 이식된 뒤 상당수 선진노동자들마저 집어삼켜갔다.

    그와 동시에 대량의 변질이 시작되었다. 87년 직후 몇 년간은 노동자의 정신에 무한히 충실했던 현장투사들의 상당수가 자본주의의 정신에 포섭되면서 출세분자들의 정신과 분위기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다시 조합원대중에게 반작용을 가했다. 과거에는 그토록 투철했던 지도자들까지 출세분자들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자, 원칙을 지키면서 남아 있던 가장 건강한 조합원대중까지 믿음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이따위 지도자들이라면 우리가 애써 노력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가 그들의 마음 속 깊은 생각이었다. 이제 출세분자들을 견제하던 마지막 밧줄까지 풀려버렸다. 출세분자들이 민주노조운동을 마음껏 유린하고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제 노동조합 지도자의 지위는 더 이상 수배와 구속, 해고, 무한한 헌신을 뜻하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그 자리는 특권, 특혜, 편안함, 현장의 고된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에어컨이 나오는 사무실, 으스대기, 심지어는 국회의원과 시장이 될 수 있는 티켓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이 노동조합관료층은 전투적 투쟁으로 자신의 안정적인 지위가 흔들리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섭과 타협 중심의 노동운동 전략으로 그들에게 표현되었다. 이 노동조합관료층은 노동조합의 집행기구들이 조합원대중에게 통제되기를 전혀 희망하지 않는다. 이것은 조합원들의 참여를 최대한 봉쇄하고 모든 것이 노조 실무자들의 선에서 처리되는 관료적인 자판기노조로 표현되었다. 이 노동조합관료층은 연대투쟁을 죽어라고 싫어하고, 당장 손에 쥐는 직접적인 실리적 성과에만 집착했으며, 노동자 대의에 대한 충성심은 조금도 없었다. 이것은 비정규직 제도가 대량으로 들어오고, 계급적 연대투쟁이 무참히 파괴되며, 모든 것이 당장의 실리적 성과라는 측면에서만 측정되는 비참한 현실로 모습을 드러냈다.

    진정 헌신적인 투철한 지도자들을 민주노조운동은 더 이상 재생산하지 못하게 되었다. 젊은 층은 기본적으로 더 대의에 민감하다. 하지만 선진노동자로 도약할 잠재력을 가진 훌륭한 젊은 노동자들의 열정과 관심을 끌기에는 민주노조운동이 너무나 형편없이 타락해버렸다. 노동운동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그들은 잠자코 있거나 아니면 사회봉사써클이나 취미써클에서 열정을 분출하고 있다.

    가장 선진적인 층의 붕괴

    그러나 가장 선진적이고 투철한 지도자들이 소수일지라도 힘을 모았다면 상황은 어느 정도 저지되면서 반격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일어났던 불행이 한국에서도 재현되었다. 87년부터 수년간 운동을 선두에서 주도했던 가장 투철한 지도자들의 다수, 그리고 운동이 뒤로 후퇴하려는 시기에도 원칙을 사수하고 반격을 조직하려 했던 가장 선진적인 지도자들의 다수는 노동해방을 열려는 정치조직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정치조직은 숱한 한계를 갖고 있었지만 러시아 노동자 당처럼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배양하고 단련시키는 거점이었다.

    1920년대 후반부에 러시아 노동자당의 가장 선진적인 부위가 꺾이고 말았던 것은 계급투쟁의 더 높은 단계에 부응할 수 있는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노동해방 사회 건설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잃어버린 그들은 결국 관료화되면서 출세주의 관료들의 영향력에 포섭되어 갔다.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정치조직에 소속된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은 그들의 활동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바로 그 국면에서 러시아국가의 붕괴 소식과 마주쳤다. 그런데 당시의 정치조직들은 스탈린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조직들은 선진노동자들에게 러시아와 북한이 노동해방 사회라고 교육해왔다. 그런데 그들이 목표로 삼고 의지하던 바로 그 국가들이 무너진 것이다. 게다가 통상적인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은 반동적 국가라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당시의 정치조직들은 추풍낙엽처럼 파산하기 시작했다. 정치조직의 주축을 구성했던 지식인들의 변질과 이탈은 더욱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노동자계급을 버리고 적들에게 달려갔다. 대부분 운동을 청산했지만 소수는 노동운동에 남았다. 하지만 노동운동에 남은 이 소수마저도 대부분 개량주의 -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정치 - 로 전향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의 정치조직이 배출했던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 투사들이 상황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다수는 해체되어 운동을 청산하거나 사기저하에 빠져 개량주의를 받아들였다. 심지어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진 가장 약한 자들은 출세분자로 변신했다. 마지막 저지선이 붕괴되고 말았다. 퇴행과 반동의 물결은 노동운동을 마음껏 유린했고, 민주노조운동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만들어낸 계급적 진지들의 대부분을 잃고서 껍데기만 남기 시작했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반혁명이 한국에서는 민주노조운동의 퇴행으로 마찬가지로 반복되었다. 러시아에서 1917년에 형성된 노동자 국가가 1930년대 이후 껍데기로만 남겨졌듯이, 1987년에 한국에서 형성된 민주노조운동은 90년대 중반 이후 사실 껍데기로만 남겨져 있다. 두 경우 모두 노동자계급은 결정적인 패배를 겪었다.

    러시아 혁명의 패배를 딛고, 한국에서 승리를 개척하자!

    러시아에서 관료주의는 ‘국가권력(경찰과 군대, 정보기구)’과 ‘생산수단’과 같은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 괴물은 노동자당과 노동자권력을 무참히 파괴하면서 노동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결국 이 괴물은 새로운 자본가계급(관료 자본가계급)으로까지 전화했고, 지금은 통상적인 사적 자본가로 변신했다. 노동운동이 겪은 상처와 패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왜냐하면 노동운동의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사실은 노동자계급을 억압하고 짓밟는 반동계급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 관료주의는 아직 생산수단과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지위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이들은 아직까지는 노동조합에 주로 포진해있고, 최근 민주노동당과 같은 의회주의 정당의 관료층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저지르고 있는 일은 스탈린 관료집단의 범죄와 기본적으로 같다. 그들은 노동대중의 열망을 짓밟고 노동대중의 힘을 제거하며 노동운동을 출세와 편안함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온갖 배신과 치떨리는 범죄들을 통해 노동운동을 향해 다가서려 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실망과 염증을 심어주고 있다. 그들은 실리주의와 노사협조주의, 단사주의를 조장하면서 노동대중 속으로 매일 같이 자본주의적 근성과 분열의식을 주입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조합 민주주의의 흔적들을 매일 매일 지우고 노동조합을 소수 관료들의 기구로 변질시키면서 조합원대중을 기만하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에서도 노동운동은 결정적인 패배를 겪고 있다.

    그러나 다음 또한 분명하다. 한국 노동자계급이 관료주의라는 괴물에 맞선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결정적인 의미를 획득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가 맞서고 있는 적은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완전한 승리를 달성하기 일보 직전에 맞닥뜨렸던 가장 위험하고 결정적인 적,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의 민주노조운동이 관료주의를 척결하고 진정한 노동운동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면, 우리는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넘어서지 못했던 그 결정적인 고지를 이미 점령한 셈이 될 것이다. 한국노동운동은 바로 이 고지를 장악한 가운데 권력장악 투쟁에 나설 것이다. 그 때 장악한 권력은 당연히 훨씬 더 안정적일 것이고, 이 승리는 거의 확실하게 최종적인 승리가 될 것이 분명하다. 일보후퇴를 견디어내고 관료주의를 척결한 우리 운동은 열 걸음 전진이라는 거센 진격의 나팔소리를 울릴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만큼 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 노동자계급 내부의 적을 척결하고 자본주의적 요소로부터 자유로운 결정적인 단계로 도약하는 것은 엄청나게 어렵다. 간단히 말하자면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뒤에서야 마주쳤던 자본가계급의 최종 진지들을 한국 자본가계급은 이미 전면적으로 동원하고 있다. 한국 노동자계급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의식, 단호하고 철두철미한 지도자, 대중의 전면적인 발전을 반드시 확보해내야만 한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되게 노동대중에 복무하고 그들의 힘을 제대로 결집할 줄 알며, 자본주의적 요소와 결연하게 단절한 명실상부한 노동자계급당을 건설해내야만 한다. 이 과업에 성공적으로 착수할 수 없는 한, 우리 운동이 다시 전진할 수 있는 가능성은 결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도 너무나도 충분한 후퇴는 계속될 것이다.

    퇴행하는 노동운동에 밑바닥은 없다. 자기 내부의 적을 척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가계급의 정신을 내면화한 노동운동은 완전히 해체되는 운명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내부의 적(관료들)과 맞서 투쟁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정신을 내면화하고 있는 현장 동지들이 있다. 그 수가 아직 적지만, 바로 이들의 정신에 입각해서 그리고 바로 이들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노동해방 조직만이 이 결정적인 과업을 지도할 수 있다. 이들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한국에서 이들은 명확한 노동자 사상으로 무장하고, 하나의 조직으로 결집해야만, 그리고 대중을 둘러싼 관료들과의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전진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해야만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담당할 수 있다. 그 임무를 그들이 달성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그들과 실천 경험을 나누며 그들과 어깨 걸고 관료에 맞서면서 대중들을 지도해나가는 것, 그리하여 노동해방 정당을 향해 현장투사들이 체계적으로 결집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복무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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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치코프·쉴라 피츠페트릭, 《러시아 혁명사》, 대왕사, 67쪽

    2) ≪세계를 뒤흔든 열흘≫

    3) ≪세계를 뒤흔든 열흘≫, 21쪽

    4) ≪세계를 뒤흔든 열흘≫, 55~56쪽

    5) ≪세계를 뒤흔든 열흘≫, 30~31쪽

    6) ≪세계를 뒤흔든 열흘≫, 187쪽

    7) ≪세계를 뒤흔든 열흘≫

    8) ≪세계를 뒤흔든 열흘≫

    9) ≪세계를 뒤흔든 열흘≫

    10) 레닌

    11) (레닌, <제3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의 연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앎과 함, 32-33쪽)

    12) (레닌, <제3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의 연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앎과 함, 31-32쪽)

    13) (레닌, <제3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의 연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앎과 함, 34-35쪽)

    14) (레닌, <제3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의 연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앎과 함, 36-37쪽)

    15) 레닌, <제3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의 연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앎과 함, pp.32-33

    16) 레닌, <제3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인민위원회 사업에 대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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