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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교양도서 2권_세계노동운동사(3) 2차 세계대전 후부터 오늘날까지
 사노련  | 2009·11·11 23:14 | HIT : 3,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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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련에서 발행한 <일하며 배우는 노동자 교양도서> 2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에 실린 글입니다.)

    세계노동운동사3 - 2차 세계대전 후부터 오늘날까지

    최지명

    2차 세계대전도 제국주의 전쟁이다

    2차 세계대전은 1차 세계대전과 달리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라 ‘민주주의 대 파시즘의 전쟁’이라고 바라보는 견해들이 많았다. 하지만 연합국이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것은 거짓 ‘신화’일 뿐이다. 이는 연합국의 중심축인 영국, 러시아, 미국을 검토하면 간단히 드러난다.

    연합국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처칠은 나일 강의 해상 운송권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에서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다. 1910년에는 군대를 보내 파업 중이던 광부들을 쏴 죽였다. 영국령 이라크 내 쿠르드 반군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인 무솔리니를 찬양하기도 했다.

    ‘반파시즘’ 연합에 참가한 스탈린도 진보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는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 핵심당원들을 학살했다. 끔찍한 ‘강제적 농업집산화’로 수백만 농민들을 몰살했다. 1939년에는 히틀러와 뒷거래를 해 폴란드를 나눠가졌다. 볼셰비키가 1917년에 독립국으로 인정했던 발트 해 연안 공화국들을 다시 강제로 종속시켰다. 그는 러시아 국내에서는 독재자였고, 러시아 바깥에서는 제국주의자였다.

    미국의 루즈벨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차 세계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강국들이 전쟁으로 모두 기진맥진해지기를 바랐다. 군사무기를 팔아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챙기기를 원했다. 미국이 참전한 것은 동아시아 식민지들을 놓고 일본과 나눠먹기를 하려던 뒷거래가 무산돼 ‘협상’이 아닌 ‘무력 대결’로 식민지 분할을 결정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본질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 바로 원자폭탄 투하였다. 1945년 5월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다음 일본의 항복도 예고되고 있었다. 그런데 미국은 서둘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래야 소련군보다 먼저 일본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 전리품을 더 많이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2차 세계대전은 파시즘 대 민주주의의 전쟁이 아니라 1차 세계대전과 마찬가지로 두 제국주의 강도들 간의 전쟁이었을 뿐이다.

    2차 세계대전 시기 노동자운동

    야만적인 전쟁과 이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자본가계급의 공세, 그리고 이를 막아낼 수 있는 혁명적 노동자당의 부재로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지역에서 노조 운동이 무너져 버렸다. 프랑스 노동총동맹(CGT)의 운명은 유럽 노동자가 파시스트한테 어떻게 파괴당했는지를 정확히 보여주었다. 1940년 히틀러의 괴뢰정부인 비시(Vichy) 정권은 당시 80만 조합원을 갖고 있던 노동총동맹(CGT)을 공식 해산시켜 버렸다. 그리고 1941년 10월 파업을 금지시켰다.

    ▲ 2차 대전 때 무기를 만드는 여성노동자들

    전쟁 기간에 파시스트들은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크게 떨어뜨렸고 노동조건을 극도로 악화시켰다. 모든 지역의 노동자들이 노예와 다를 바 없었다. 세계노동자들의 피어린 투쟁을 통해 쟁취한 8시간 노동제가 사라진 대신 12시간 노동제가 폭넓게 부활되었고, 주 100시간까지 일했던 경우도 있다. 영국, 미국, 소련 같은 ‘연합국’ 제국주의 정부도 ‘파시즘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구하자’는 구호를 앞세우며 노동자들의 파업을 금지시켰고 군사무기 생산에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했다.

    하지만 2차 대전 시기에 노동자운동이 무너져 내린 것은 단순히 자본가계급의 공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노동운동 지도부는 전쟁과 탄압의 광풍 속에서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투항해 노동자들을 자본가들 앞에 제물로 바쳤다. 각국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소련 스탈린 반동권력의 통제를 받으며 ‘파업 중단’, ‘생산성 강화’에 적극 앞장섰다. 1차 세계대전 때 유럽 사회민주당들이 저질렀던 범죄를 2차 세계대전 때는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저질렀던 것이다.

    그렇다고 노동자운동의 목숨이 끊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치화된 유럽에서 노동자투사들은 지하 노조활동을 했다. 혹독한 감시, 투옥, 강제 징용, 고문은 물론 총살조차 일상적으로 벌어졌지만 그 어떤 위협도 노동자들의 저항정신을 완전히 꺾을 수는 없었다. 1940년대 초중반에 이르면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영국 등 여러 지역에서 파업의 물결이 급격히 높아지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는 1944년 1월의 정치범 총살 직후에 꽤 큰 파업이 일어났다. 3월에는 30만 명이 참가한 파업이 밀라노에서 시작돼 전국 주요도시로 번져 갔다. 저임금 노동자들과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의 선봉에 섰고, 독일군은 체포와 대대적인 국외 추방으로 대응했다. 1945년 이탈리아가 '해방‘될 즈음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해 완강히 투쟁했으며, 농촌의 빨치산 조직 및 도시의 지하 무장투쟁조직들과 함께 무장봉기에도 적극 참여했다.

    2차 세계대전 시기 노동자운동의 경험은 노동자해방을 향해 과감하게 전진하지 않으면 수십 년 동안 쌓아왔던 성과가 야만적 반동 때문에 하루아침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점과 아무리 엄혹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노동자투쟁의 불꽃과 혁명의 투혼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에게 생생하게 가르쳐준다.

    2차 세계대전 후 서유럽 혁명의 좌절

    처칠은 1944년 10월에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나 “당신들은 루마니아에서 90%의 우선권을, 우리는 그리스에서 90%의 우선권을 갖고 유고슬라비아는 50대 50으로 하면 어떻겠소?” 하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처칠, 루즈벨트와 그런 더러운 계약―식민지 노동자 민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의 계약―을 맺었고 세계를 분할했다. 유럽의 운명을 결정한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던 노동자투사들이나 레지스탕스 전사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동서 제국주의 정부 관료들이었다.

    스탈린은 서유럽 공산당들이 혁명을 시도해 영국, 미국 제국주의자들과의 협정에 차질이 생기는 일을 어떻게든 막으려 했다. 그들은 세계 혁명을 배신했고, 대신 러시아 제국주의의 이익을 추구했다. 1944년 11월 전임 소련 외무장관 리트비노프는 미국 대표단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서방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것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졌다. 1944년 봄에 이탈리아 공산당 당수는 모스크바 방문을 마치고 귀국해 그동안 경멸해 왔던 바돌리아 정부(1943년 7월 국왕 중심의 군부와 보수파가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새로 세운 정부)에 참여할 것이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주제를 보전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프랑스 공산당 당수는 1945년 1월에 모스크바에서 파리로 돌아와 기존 국가 기구에 대한 모든 저항을 중단하라고 투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군대, 하나의 경찰”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리스 레지스탕스 전사들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구질서가 거의 평화적으로 복구됐다. 하지만 그리스에서는 결국 내전이 벌어졌다. 1944년 말에 독일 군대가 퇴각하자 그리스 민족해방전선이 사실상 전국을 통치하게 됐다. 영국은 옛 군주제를 강요하고, 불신을 받던 옛 지배계급 출신의 정치인들로 새로운 정부를 꾸렸다. 이런 새 정부는 나치에 부역했던 경찰과 우익 집단을 되살려 냈으며, 전국의 레지스탕스 조직에 즉각적인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그리고 그에 항의해 일어난 시위대한테 총을 쏴 28명을 죽이고 수많은 사람을 다치게 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그리스 민족해방전선은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처칠이 런던에서 아테네로 날아와 영국이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전이 “스탈린 원수와 루스벨트 대통령의 완벽한 승인”을 얻어 이루어지고 있다고 발표하자 그리스 민족해방전선은 수도에서 철수하고, 한 달 뒤에는 공식 해산까지 했다. 하지만 그 대가는 1945년 1년 동안 적어도 5만 명의 민족해방전선 지지자들이 투옥·구금되고, 우익 조직들이 완전히 부활한 것이었다.

    만약 그리스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면 그 파장은 유럽과 세계로 확산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의 총파업과 무장봉기 경험을 통해 단련된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까를 처칠이 몹시 두려워할 정도로 유럽 노동자들의 잠재력은 상당히 크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혁명의 파도가 휘몰아쳤다면 위대한 혁명전통을 간직하고 있던 프랑스 노동자계급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독일에서도 1945년 5월에 나치 정권이 붕괴하자 노동자들이 대중적인 반(反)나치위원회를 만들고 친(親)나치 경영자들이 도망가서 방치하던 공장들을 직접 운영했다. 이런 독일 또한 혁명의 물결에 동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계혁명의 잠재력은 1차 세계대전 이후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잠재력을 현실화할 수 있는 혁명 주도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은 그 역할을 절대 할 수 없었고, 1938년에 건설된 트로츠키주의 제4인터내셔널은 분명한 혁명적 지향을 갖고 있었지만 그 숫자나 영향력이 아직 너무 취약했다. 게다가 노동자계급 속에 조직적 거점을 내리지 못하고 주로 혁명적 지식인들 중심인 제4인터내셔널은 점차 우경화되거나 분열로 치닫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동유럽과 중국 - 사회주의로?

    동유럽이 2차 세계대전 뒤 ‘인민민주주의’ 단계를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갔다는 것은 ‘신화’일 뿐이다. 동유럽에서는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혁명이 없었다. 소련군 탱크가 동유럽에 들어와 소련식 체제를 옮겨 심었을 뿐이다. ‘국유화’, ‘계획경제’라는 형식들만으로는 사회주의가 아니다. 사회주의란 무엇보다도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이다. 노동자계급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 실질적인 주인이 되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란 노동자와 인민을 기만하기 위한 장식 문구일 뿐이다. 동유럽 국가들이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이 이후 50년대부터 수십 년 동안 줄기차게 지배세력에 맞서 저항했다는 사실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 마오쩌둥 (모택동)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1949년 혁명은 혁명이기는 했지만, 노동자혁명이 아니라 민족해방혁명이었을 뿐이다. 상해에 입성한 홍군 속에 노동자는 거의 없었다. 홍군은 본질적으로 농민들로 구성되었고 농민 일부와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이 장교를 맡고 있었다. 상해에 입성할 때 도시 노동자들이 파업이나 봉기로 길을 닦아준 것도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단순히 수동적인 방관자였다. 그들에게 ‘해방’은 외부로부터 주어졌다. 이것은 중국 노동자들이 싸울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공산당이 그걸 철저히 막았기 때문이었다. 공산당은 다음과 같이 지령을 내렸다. “모든 생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종업원들은 일을 계속하고 영업은 평상시처럼 돌아가게 하라. … 국민당 관리들과 경찰관들은 자기 직무에 그대로 남아, 인민해방군과 인민 정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이런 정책들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중국공산당이 수행한 투쟁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왜냐하면 중국공산당에게는 혁명이 무엇보다도 민족해방혁명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혁명의 목표는 강력한 자립적 민족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구 지배계급을 타도하는 데 무장 혁명이 필요했지만, 그러나 위로부터 엄격히 통제된 혁명이어야 했고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의 방향으로 전진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중국 또한 결국은 소련과 비슷하게 나아갔다.

    인도도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다. 중국과 인도의 민족해방은 다른 수많은 나라들의 민족해방운동 세력들을 무한히 고무하고 격려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도 중국과 인도의 뒤를 따라 다양한 형태의 자본주의 체제를 건설했을 뿐이었다.

    폭풍전야의 고요

    1910년에서 1940년대까지는 크게 보아 ‘전쟁과 혁명의 시대’였다. 1950년대와 60년대 중후반까지 세계는, 특히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대단히 안정된 것처럼 보였다. 자본주의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며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고, 격렬한 계급투쟁이나 혁명은 옛날 이야기처럼 들렸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저항세력 안에서도 자본주의는 특유의 고질적 위기를 극복했고, 선진국 노동자들은 더 이상 혁명적이지 않다는 비관주의 정서가 널리 퍼져갔다.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자본주의 체제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었다. 반체제 세력은 고립당하고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계급투쟁의 역사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겉보기에 고요한 지표면 아래에서 마그마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마그마는 자신의 거대한 위력을 1968년에 드러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련의 사회적 격변과 갑작스런 경제 위기와 격렬한 파업투쟁이 잇따랐다. 역사는 끝나기는커녕 속도를 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새로운 시대를 연 1968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68혁명은 '학생들의 반란'일 뿐인가?

    1968년은 글자 그대로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 시기는 거대한 세계적 격변의 시기였다. 오랫동안 지배자들은 68년 혁명을 ‘철부지들의 하찮은 바보짓’ 쯤으로 여겨 왔다. 그렇게 해야 노동자들이 68년 혁명에 관심을 갖고 배우는 걸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투쟁의 기억’을 깨끗이 지워버리려 한 것이다.

    한편 지배자들과 의도는 다를지라도 운동세력 안에도 68혁명을 ‘학생들의 반란’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세력도 있다. 하지만 68혁명은 단순히 ‘학생들만의 반란’이 아니었다.

    물론 그 해에 학생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로 격렬하게 싸웠다. 서베를린, 뉴욕, 바르샤바, 프라하, 런던, 파리, 멕시코시티, 로마 등 세계 곳곳에서 학생들의 시위와 점거농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이런 학생들의 투쟁은 역사적으로 자주 그랬듯이 더 거대한 생산자대중의 운동을 촉발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을 뿐이다.

    1968년에는 단순한 학생반란을 넘어서는 훨씬 더 많은 일이 일어났다. 미국 흑인들의 반란이 절정에 달했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군사적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러시아 군대가 저항에 직면했다. 프랑스에서 사상 최대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향후 7년 동안 이탈리아 사회를 뒤흔들 노동자투쟁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1970~71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꽤 큰 노동자반란과 1974년에 히스 정부를 붕괴시킨 영국 노동자들의 파업물결이나 1974년 포르투갈과 1976년 스페인의 파시즘 종식, 1970년대 초반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의 격동도 잉태했다.

    따라서 68혁명을 68년에 일어난 프랑스혁명이나 전 세계적 학생반란에 국한시켜서 보면 안 된다. 68년 전부터 발전했고 그 뒤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분출한 광범위한 세계 노동자, 민중투쟁으로 넓혀서 보아야 한다. 사물은 총체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 이 총체적 연관 사슬을 간과한 채 하나만을 고립적으로 고찰하면 사물의 본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다. 68혁명처럼 세계적 격변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경제성장이 반란의 동력을 낳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투쟁이 벌어질 수 있었는가? 특히 그토록 안정적으로 보이던 상태에 어떻게 그런 거대한 잠재력이 있을 수 있었는가? 1968년의 폭발은 그 진원지가 된 사회들이 워낙 안정돼 보였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미국에서는 1930년대부터 존재했던 좌파들이 분쇄된 데다가 노조 지도자들은 관료적이고 보수적이기로 악명 높았다. 체코는 동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부유했으며 1956년의 격변에서 가장 영향을 적게 받은 나라였다. 프랑스에서는 드골의 전횡적인 지배체제가 10년째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좌파는 선거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으며 노조들은 힘이 약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여러 정부들이 차례로 집권했지만 어느 정부에서나 다수당을 차지했던 기독교민주당이 가톨릭교회를 통해 사람들의 투표 성향을 통제했다.

    이 나라들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누려온 덕분에 그만한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성장이 안정의 토대를 허무는 힘을 창조했다. 이런 역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자본가들이 점점 더 많은 부를 쌓으려면,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쥐어짜야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성장은 자본가들에 맞서 싸울 노동자계급의 성장을 뜻한다.

    다른 한편 자본주의의 호황은 실업을 줄여 억눌려 왔던 노동자들이 기대감을 갖고 단결해서 투쟁할 수 있는 기회도 준다. 그리고 만약 경제성장이 더뎌져 임금과 노동조건 등이 노동자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제대로 나아지지 못할 때 노동자들은 투쟁에 나서도록 자극받는다. 경박하게 ‘노동자투쟁은 끝났다’고 떠벌였던 자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장과 안정만 바라볼 뿐 그 안에서 발전해가는 자본주의 모순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세계를 뒤흔든 1968년 뒤에는 바로 이와 같은 모순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이 관점을 견지하면 세계 각지에서 거대한 투쟁이 어떻게 그렇게 갑작스레 벌어질 수 있었는지를 잘 이해할 수 있다. 과학적 관점이 없으면 모든 것이 우연처럼 보이고 신비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이 있다면 어지럽게 널린 우연의 실타래 속에서 필연의 붉은 실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신비해 보이는 현상 속에서도 자신을 관철해내고야 마는 철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

    먼저 미국을 보자. 호황이 찾아오자 일자리를 구하려고 도시로 떠나는 흑인들이 늘어났다. 1960년에는 흑인 인구의 3/4이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도시 내 흑인 인구의 밀도가 높아지자 국가와 인종 차별주의자들에 맞서 싸울 자신감도 생기기 시작했다. 1965년, 1966년, 1967년에는 LA, 뉴욕, 디트로이트 같은 북부 도시에서 흑인 반란들이 터져 나왔다. 흑인 지도자 마틴 루터 킹이 암살된 1968년에는 미국의 거의 모든 흑인 빈민가에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많은 흑인 청년들이 무장을 통한 자기 방어와 혁명을 설파한 흑표범당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

    서유럽과 체코의 경우도 마찬가지

    다음으로 서유럽을 보자. 1940년대 말에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기존 질서가 안정을 되찾고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파시스트 권력이 온전히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나라 인구의 대다수가 여전히 기존 질서를 받아들이도록 윽박지르거나 매수하기가 쉬운 소농들이었기 때문이다. 소농은 생활방식이나 인간관계, 사고가 너무나도 협소하고 단순하다. 따라서 소농들이 많다는 특성을 반영해 많은 지역에서 보수적인 카톨릭 교회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기호황이 이것을 바꿔놓았다. 1968년에는 수많은 농민 출신 남녀들이 남부 유럽 각국의 공장과 대형 작업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처음에 그들은 노조에 반대하거나 보수적인 가톨릭 노조를 지지하는 등 지방의 편견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장시간 노동, 비인간적 대우, 숨 막힐 듯한 노동통제를 당해야 했다.

    그래서 신참 노동자들은 점차 1930년대와 전쟁 말기의 거대한 파업투쟁을 기억하고 있는 더 나이 든 노동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됐고, 그들과 함께 투쟁에 나서게 됐다. 그래서 1968년과 1969년에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새롭고 강력한 하나의 세력이 됐다.

    마지막으로 동유럽의 체코를 보자. 1950년대 중반에 체코가 누렸던 안정도 경제호황 덕분이었다. 연간 7퍼센트의 경제성장률 덕택에 지배 관료들은 자기만족에 빠질 수 있었고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도 꽤 올랐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 들어 경제성장이 느려지면서 모든 사회 계층 안에 불만이 쌓여 갔고 지배관료들은 분열했다. 당의 지도적 인물들은 대통령을 사임하게 만들었다.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2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자유롭게 드러냈다. 검열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시위를 진압해야 할 경찰은 별안간 무기력해 보였다. 학생들은 자유로운 학생들의 연합체를 결성했고, 노동자들은 국가가 임명한 노조 지도자들을 선거에서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1968년 8월에는 소련군이 체코에 쳐들어와 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체포해 모스크바로 끌고 갔다. 그들은 체코 사람들의 불만을 간단히 잠재울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그렇게 행동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은 오히려 불만을 더욱 키웠을 뿐이다. 그 뒤로 9개월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시위와 파업이 벌어졌다.

    프랑스 68년 5월 혁명

    혁명의 역사에서 흔히 그런 것처럼 68년 5월 혁명도 아주 작은 사건들에서 출발했다. 여자 기숙사에 남학생 출입금지와 같은 ‘비정치적 사안’을 둘러싸고 소규모 학생투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런 작은 사안에서도 프랑스 자본가계급은 양보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 강국들 간의 자본축적 경쟁 강화는 프랑스 자본가계급으로 하여금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를 통해 축적을 강화할 것만을 요구했다.

    이런 조건에서 대학 당국과 교육부 장관이 소규모 학생 시위에 대해 파리 대학 전체를 폐쇄하고 폭력경찰을 투입해 강경 진압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학생 시위가 거대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바리케이드의 밤’으로 불리는 5월 10일에는 경찰 병력이 잠시 파리 일부에서 완전히 밀려나기도 했다. 프랑스의 학생운동은 파업과 집회에 무장 경찰을 언제든지 투입할 용의가 있었던 드골의 권위주의 질서 전반에 맞선 성공적인 저항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때가 왔음을 느낀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불만이 거대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국의 민주노총, 한국노총처럼 서로 경쟁하던 프랑스 노총들의 지도자들은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대응해 5월 13일 하루 총파업을 호소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응은 그들 전부를 놀라게 했다. 5월 13일 파리 시위는 1944년 나찌 점령에서 파리가 해방된 이래 최대 규모였다. 수십만 노동자들이 소속 노조의 깃발을 앞세우고 수만 명의 대학생, 고등학생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자본가정부나 노조 관료들 모두 이 시위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다음 날에는 전날의 총파업이 거둔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젊은 노동자들이 낭트에 있는 쉬드 아비아시옹 공장을 점거했다. 젊은 노동자투사들은 공장 순회선동을 통해 다른 노동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관리자들의 사무실은 봉쇄해 버렸다. 공장에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2,000명 정도가 모여 밤샘 농성투쟁까지 했다.

    ▲ 1968년 5월 시트로앵 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 집회

    이런 모범적 투쟁에 자극받은 프랑스 노동자들은 앞 다투어 공장점거에 들어갔다. 프랑스 전역은 이틀 만에 1936년의 공장점거운동을 뛰어넘는 훨씬 더 큰 공장점거 파업을 전개했다. 자그마치 2~3일 만에 900만에서 1,00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 총파업은 역사상 그 어떤 계급보다도, 노동자계급은 거대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런 잠재력은 적절한 계기만 주어진다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엄청난 폭발력으로 터져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더없이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이 총파업으로 무려 2주 동안 정부는 마비됐다. 기차도 버스도 안 다녔고, 은행은 문을 닫았으며, 우편 업무도 중단됐다. 어디서나 공장은 점거됐고 파업사수대가 공장 문을 지키고 있었다. 파업은 전통적인 산업에만 머무르지 않고 병원, 방송사, 박물관, 극장 등 모든 곳으로 확대됐다. 그나마 방송, 출판을 계속한 언론 매체의 경우에도 온통 ‘혁명’에 관한 이야기만 다루었다.

    물론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해일처럼 일어난 노동자대중들에 맞선 전면전에서 군대와 경찰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제5군에 경계령이 내려지자 병사위원회들이 꾸려져서 상관의 명령에 반대하고 수송과 장갑차의 출동을 거부할 조짐까지 나타났다. 자본가정부로선 경찰이 군대보다 더 믿을 만했지만 경찰들도 2주 정도는 자본가정부의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절박해진 드골은 독일로 도망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런 드골이 마침내 반란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노조 관료들, 특히 공산당 관료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오직 약간의 임금인상과 총선 약속에 만족해 노동자들에게 업무에 복귀하라고 부추겼다. 드골이 “내전이냐 총선이냐”의 양자택일을 강요했을 때, 개량주의에 찌들어 있던 노조 관료나 공산당 관료들은 ‘자본가정부를 넘어선 노동자정부 수립 선언’은 꿈도 꿔보지 못한 채 ‘선거를 통한 심판’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대중은 지도부가 세상을 바꿀 생각이 없음을 감지했고 수면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처럼 노동자대중들이 사기저하에 빠진 상태에서 치러진 선거는 불을 보듯 훤하게 좌파의 참패로 끝났다.

    프랑스 혁명세력의 약점

    이런 파업파괴 책동에 맞서 트로츠키주의 혁명세력들과 견고한 노동자투사들이 싸웠지만 이들의 영향력이 당시로선 너무나 미약했기 때문에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68년 5월 혁명이 시작됐을 때 프랑스의 혁명적 좌파는 대단히 미약한 상태였다. 트로츠키주의 조직과 마오주의 조직은 각각 400명 정도의 조직원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대부분 학생이어서 노동계급 안에서는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대부분의 혁명적 학생들은 무정부주의나 기타 잡스런 사상에 영향을 받아, 노동자계급이 체제에 ‘매수’됐다고 여기고, 자본주의가 아니라 물질적 향상을 추구하는 ‘소비’사회가 주요한 적이라고 간주했다. 또 그들은 노조 관료들이 파업을 순전히 경제적 요구에만 국한시키려 한 것과 정반대로 경제적 요구를 부적절한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하면서 ‘계몽’, ‘반권위주의’, ‘혁명’, ‘상상력에 권력을!’과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아주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친숙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지식인의 언어로 말하는 경향이 있어서 노동자들에게 ‘먼 세계에서 온 이상한 동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약점은 혁명적 학생들이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들과 같이 싸우면서 노동자계급의 삶의 현실을 배우고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일반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극복해야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이것을 위한 조직적 수단으로서 ‘실행위원회’가 있었다. 하지만 ‘실행위원회’는 명확한 강령, 혁명적 지식인과 의식적 노동자의 유기적 결합, 철의 규율을 갖춘 미리 준비된 혁명정당이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실행위원회가 시행착오를 거쳐 혁명정당으로 발전하거나 그 내부에서 혁명정당을 만들 혁명적 분파가 탄생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68년 혁명은 줄 수 없었다. 그것은 어느 혁명이나 마찬가지다. 혁명은 매우 빠른 템포로 진행되기에 ‘미리 준비된 혁명정당’을 요구할 뿐이다. 결국 실행위원회는 매우 중요한 순간에 끝없는 논쟁에 휘말려 옴짝달싹도 못했다. 그렇기에 자본가정부와 노조 관료, 공산당 관료들의 책략이 비교적 순순히 먹혀들 수 있었다.

    진정한 혁명세력이 취약했다는 약점 때문에 갑자기 우뚝 솟아오른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어마어마한 힘을 세계에 과시하고도 다시 ‘초식공룡’처럼 순하게 길들여져 갔다. 이 경험은 다가오는 혁명의 고동소리를 미리 감지해내고 이론, 조직, 실천의 모든 측면에서 철저히 준비해낼 노동해방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것이 사활적임을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이탈리아의 '길고 뜨거운 가을'

    프랑스의 불꽃은 갑작스레 타올랐다가 쉽게 꺼져버렸다.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불꽃이 서서히 타올라 상당히 오래도록 불길을 이어갔다.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은 1977년까지 근 10년 동안 지속됐다. 이탈리아에서도 학생들이 먼저 투쟁의 첫 테이프를 끊었다. 67년부터 여러 쟁점을 둘러싸고 일어난 학생들의 저항은 미국의 베트남전에 맞선 반전투쟁, 68년 5월 프랑스혁명의 영향력과 결합하면서 거대하게 타올랐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곧이어 노동자들이 움직였다.

    1968년과 1969년 사이에 파업이 네 배 증가했다.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의 피렐리 공장과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 같은 주요 현장에서 최초의 파업들이 벌어졌다. 이런 파업들은 흔히 노조의 통제를 벗어난 비공식적(비공인) 파업이었다. 투쟁 경험은 별로 없지만 전투적이었던 노동자 조직들이 파업을 이끌었다. 1969년 가을의 투쟁은 자본가들이나 노조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격렬했다.

    ▲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

    피렐리와 피아트 공장에서 일어난 일이 이 공장 저 공장으로 번져나갔다. 1968년에 북부의 주요 공장에서 처음 시작된 ‘질풍 같은 5월’은 천천히 발전해 마침내 ‘1969년의 뜨거운 가을’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투쟁은 노조의 주도권을 뛰어넘는 것이었고, 생산 중단이나 공장 점거 같은 급진적 투쟁 형태를 포함하고 있었다. 투쟁요구도 ‘주 40시간제 실시하라’나 ‘보험, 연금, 사회복지 혜택을 화이트칼라 노동자 수준으로 재조정하라’와 같이 대단히 계급적인 것이었다.

    투쟁은 다른 공장으로만 퍼져나간 것이 아니라, 육체노동자들에게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게로 번져나갔다. 그 결과 1969년의 ‘뜨거운 가을’은 2,000만이라는 기록적인 수치가 보여주는 것처럼 전형적인 대중파업의 양상을 띠면서 전개됐다.

    하지만 대중파업을 혁명으로 이끌 수 있는 혁명적 지도부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은 이탈리아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지 못한 채, 10여 년의 긴 공방전을 향해 나아갔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은 지그재그의 과정을 겪었지만 지속적으로 치열하게 투쟁했다. 하지만 결국은 70년대 후반에 쓰라린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공산당은 투쟁을 꺾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탈리아 자본가계급은 파시스트 조직의 지지율이 증가하자 이를 무기로 관료화된 스탈린주의 공산당을 위협해 자본주의 개혁전략을 지지하고, 파업 파괴에 앞장서게 했다. 공산당은 1970년대 초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점점 더 비판의 강도를 낮추면서 이탈리아 자본주의에 더 철저히 봉사해갔다.

    공산당의 타협책동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노동해방 혁명의 계기로 전환시킬 수 있는 진정한 혁명세력은 전혀 없었던 것일까? 1968년 전에는 이탈리아에 혁명적 좌파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이들조차도 서구 최대의 공산당이었던 이탈리아 공산당의 150만 당원 앞에서 완전히 짓눌려 있었다.

    이탈리아 혁명좌파의 치명적 약점

    하지만 거대한 노동자반란이 일어난 다음인 1973년에 이르면, 이탈리아의 혁명적 좌파는 다른 어떤 선진자본주의 나라의 혁명좌파보다 훨씬 더 크고 영향력 있는 집단이 돼 있었다. 그들은 수십 만 명의 지지자들과 세 개의 일간신문을 가진 세력으로 엄청나게 성장했다. 1968년 전부터 학생운동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혁명좌파의 일부가 젊고 전투적인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왜소했던 혁명좌파가 겨우 몇 년 사이에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수만 명의 노동자 투사들이 혁명적 정치 쪽으로 빠르게 이끌렸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이 혁명좌파를 급성장하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혁명세력은 노조 같은 대중조직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격류 속에서 표류할 수 있다. 급성장한 이탈리아 혁명세력은 명확한 이론적 강령과 계급적 규율, 대중과의 유기적 결합력을 갖고 격류를 헤쳐 나갈 수 있을 만큼 준비된 성숙한 세력이 아니었다. 그 결과 그들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쪼개지고 무원칙하게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대중의 꽁무니를 따르거나, 대중 투쟁을 대신하는 테러리즘에 빠져들면서 결국 무너져버렸다.

    혁명적 지도력을 갖추지 못한 가운데 이 미숙한 그룹들이 드러냈던 가장 중요한 한계는 단지 ‘대중의 자생성’만을 찬미하면서, 지도력의 중요성을 놓쳤다는 것이다. 대중의 자생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은 노동자운동이 상승할 때는 관료주의에 맞선 대중의 저항을 지지하고 고무할 수도 있지만, 노동자운동이 가라앉을 때는 좌파 관료나 노동자대중의 뒤를 따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대중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로 폭력을 휘두를 때는 테러리즘에 가까운 ‘폭력을 위한 폭력’ 경향에 빠져들 수 있다. 대중이 의기소침해 있을 때는 커다란 사기저하와 좌절감에 빠져들어 개량주의 사슬에 걸려들 수 있다.

    이탈리아의 혁명세력은 정확히 이런 과정을 거쳐 급속히 성장했던 것만큼이나 급속히 해체되어 버렸다.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사> 서문에서 “지도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혁명에너지는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1970년대 후반 이탈리아에 꼭 들어맞았다.

    70년대 초반 영국 노동자운동의 전진

    영국에서는 1968년부터 1974년 봄까지 투쟁의 물결이 꾸준히 상승했다. 1920년대 이후 영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난 이 투쟁의 물결은 자본가들과 정부가 노동자들의 생활수준, 노동조건, 현장 노조 조직을 잇따라 공격한 데서 비롯했다.

    이런 자본가들의 공세는 영국계 산업자본이 국제경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노동자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좁아진 결과였다. 영국은 1960년대가 되자 세계시장 쟁탈전에서 서독과 일본에 밀리게 됐다. 자본가들은 새로운 임금체계를 도입해 노조 직장위원들과 자본가가 작업시간을 놓고 벌이던 현장 단위의 단체교섭을 폐지하고, 직장위원들의 권한을 빼앗아 노조 상근 관료들에게 주려 했다. 정부는 노동법 개악을 통해 자본가들을 도우려 했다.

    이에 맞서 1926년 총파업 이후 최초의 공공연한 정치파업이 1969년 2월에 일어났다. 작업거부 투쟁에 50만 명이 참가했으며, 런던에서만 2만 5천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자본가정부의 임금통제 정책에 맞선 투쟁은 전통적으로 전투적이었던 부문에서 시작해 투쟁경험이 거의 없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1970년 6월 총선에서 히스가 이끈 보수당이 승리한 다음, 히스 자본가정부는 노동자계급을 더 강하게 공격했다. 실업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취업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에 제동 걸기, 공공부문 임금가이드라인 설치, 파업을 봉쇄하는 노사관계법 제정, 복지예산 감축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노조 지도부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한도 안에서만 제한적으로 대중을 동원하려 했다. 예를 들면 정부 정책에 대해 열심히 폭로는 하지만 그 정책을 분쇄할 대중파업은 차단한 채 소수 간부들만의 온건한 집회 정도로 투쟁을 제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투사들은 아래로부터 강한 압력을 넣어 소수 간부들만의 집회를 대중 집회로 바꾸었고, 관료들이 어쩔 수 없이 선언한 파업을 대중적 파업으로 만들어버렸다.

    1971년 초 우편노동자들의 파업이 패배한 다음 영국노동자운동은 잠시 소강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그 해 여름 클라이드 조선소 노동자들이 사측의 6,000명 해고와 공장폐쇄 계획에 반대해 ‘일자리 지키기 투쟁’에 돌입하며 노동자들의 반격이 다시 시작됐다. 1972년에는 공장점거투쟁의 물결이 일어났고, 1926년 이후 46년 만에 처음으로 전국적인 광산 노동자파업이 벌어졌으며 건설노동자들과 항만노동자들의 전국적 파업도 있었다. 이런 파업투쟁 속에서 노동자연대도 활성화됐는데,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다음은 투쟁에 참가했던 어떤 노동자가 한 이야기다.

    ▲ 1973년 런던에서 열린 메이데이 시위

    “시위 행렬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정문 앞은 각지에서 온 금속노동자들과 광원들로 가득 찼다. 우리는 곧 4만 명의 금속노동자들이 파업 호소에 응했고 1만 명이 행진과 피켓팅에 참가했음을 알게 됐다. 노동자들의 연대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시위에 참가한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우리는 모두 매우 강력한 힘을 느꼈고 우리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투쟁의 물결은 1972년 11월 히스 자본가정부가 임금동결 조치를 실시하자 분노에 찬 ‘100만 노동자들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영국노총(TUC)이 벌인 1973년 5월 1일 정치총파업에는 2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했다. 런던에서만 10만 명 이상이 시위를 벌였다. 투쟁물결은 1973년에서 1974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에 절정에 이르렀다.

    광산 노동자들이 잔업 거부에 들어가자 자본가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 투입을 통한 무력 대결까지 구상했다. 이런 위협적 조치들은 광산 노동자들을 고립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오히려 두 번째 전국적인 광산노동자파업을 촉발시켰다. 자본가정부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고 총리는 신경쇠약에 걸릴 지경이었다. 보수당 정부는 “누가 이 나라를 통치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광산노동자파업을 총선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그러나 광산노동자파업 분쇄 시도는 실패했고 보수당은 선거에서 지고 말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수준에서 아주 빠르게 전투적으로 바뀌었지만, 이런 전투성을 유지하고 그것을 승리로 이끌 조직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노동자운동도 결국 좌초하고 말았다. 이렇게 투쟁을 좌초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좌파 노조관료들이었다.

    자본가정부가 1973~4년 오일쇼크 이후의 경제위기 실상을 생생하게 설명하고, 만약 노조가 양보하지 않을 경우 자본가들이 더 이상 기업들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하자 좌파 노조관료들은 며칠 만에 임금통제 반대 입장에서 찬성 입장으로 돌변했다.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노동조건의 개선을 추구하는 조합주의 운동은 결국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회사 살리기’, ‘나라경제 살리기’ 입장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미국의 베트남 반전운동과 흑인운동

    역사상 전쟁이 혁명의 기관차 역할을 한 경우가 많았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독일) 전쟁은 1871년 빠리꼬뮌을 낳았다. 1904년 러일전쟁은 1905년 러시아 1차 혁명을 낳았다. 1914~1919년 1차 세계대전은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과 세계적 혁명투쟁을 낳았다. 베트남 전쟁도 ‘전쟁과 혁명의 공식’에 어느 정도까지는 들어맞았다.

    1964년 11월에만 하더라도 미국 지배자들에게 베트남은 전 세계적으로 처리해야 할 수십 개의 짐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하지만 외세의 지배에 오랫동안 저항해온 전통이 있었던 베트남 민중은 베트남 전쟁을 미국의 가장 큰 골칫거리로 만들어버렸다. 미국은 전쟁 사상 최대 규모의 폭격을 퍼부었고, 미군 파병을 계속 늘려갔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큰 늪에 빠져들 뿐이었다. 확전에 따라 군비지출이 폭증하고, 물가는 오르는 반면 복지가 축소되자 생존의 위협을 느낀 미국 노동자민중 사이에서 저항의 기운이 커져갔다.

    1961~64년 시기에는 겨우 2~300명만이 반전운동에 참여했지만, 전쟁이 확대된 다음인 1965년 봄에는 반전시위대가 2만 명으로 늘어났다. 전쟁이 보다 확대된 다음인 1970년대 초반에 이르러 반전운동은 400만 학생들이 동맹휴업을 하고, 주요 도시마다 수십만 명이 거리시위를 전개하는 등 거대한 반란으로까지 발전했다.

    흑인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흑인활동가들도 반전투쟁에 적극 결합했다. 보수적인 노조관료들의 통제 아래 있었던 백인노동자들은 처음에 일부가 전쟁찬성 시위에 참가하거나 전쟁에 관심조차 갖지 않기도 했지만, 점차 전쟁반대 분위기로 바뀌어 갔다. 이런 국내의 반전투쟁 기운은 전선에 있는 병사들에게까지도 전해졌다. 반전 신문들이 베트남에 있는 병사들의 손에까지 전달됐다. 병사들은 토론을 하고, 조직을 만들기까지 했으며, 장교들을 부분적으로 통제하기도 했다. 이렇게 저항이 곳곳에서 커져가자 자본가언론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부가 “전쟁에 반대하는 반란에 직면했고, 아마도 국내의 혁명에 대처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표명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미국의 지배자들을 위태롭게 만든 것으로는 반전운동만이 아니라 흑인운동도 있었다. 흑인운동은 처음에는 주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도한 비폭력 평화운동의 형태로 전개됐다. 하지만 미국 경찰들은 평화적 운동도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그래서 젊은 흑인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경찰의 폭력에 맞서기 위한 정의의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정서가 퍼져 나갔다. 1964년 7월 뉴욕 할렘 가에서 경찰이 10대 흑인 소년에게 총을 쏘자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폭동은 계속 이어져 1967년 7월에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산업 중심지인 디트로이트에서 흑인노동자들까지 포함한 도시 흑인들의 자생적 봉기와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여기에서도 약탈은 있었지만 가게 주인이 미움을 산 곳만 약탈당했다.

    그러나 봉기는 자생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는 자본가국가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지만, 곧 균형감각을 되찾은 국가권력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고 급속히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흑인투쟁조직이 있었지만 이 조직들은 ‘경찰폭력에 맞선 폭력투쟁’만을 선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흑인노동자들(더 나아가 백인노동자들까지)을 계급의식으로 무장시키고, 강고한 규율을 가진 조직으로 결속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막상 이 조직들은 대중의 자생적 폭력이 분출했을 때 더 이상 할 말이 아무 것도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흑인 혁명조직들의 한계

    ▲ 흑표범당의 자위대

    운동의 급진화 분위기는 흑인 혁명조직들을 탄생시켰다. 가장 대표적인 조직은 흑표범당이었다. 이들은 백인경찰의 살인적 탄압에 맞서 수백만 명의 흑인 청년들을 조직하고, 킹 목사의 비폭력노선을 거부하고 ‘총’으로 무장해서 싸웠다. 그런데 이 조직의 지도부는 당을 ‘거리의 형제들’, 즉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를 끌어들여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룸펜들은 공장에서 집단적 노동을 통해 규율을 몸에 익힌 노동자들과 달리 전혀 규율이 없었고, 좀도둑질 버릇을 버리지 못해 오히려 반감만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문제들이 심해지자 지도부는 자기 당을 맑스레닌주의 당이라고 선언하고, 일부 당원을 정리해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한 맑스레닌주의란 사실은 마오주의였다. 그들은 ‘민중에게 봉사하라’는 마오주의 구호를 중심구호로 제기했고, 지역 아이들을 위해 아침식사를 제공하는 등의 활동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흑표범당은 한편으로 무장투쟁을 강조하는 무장조직의 성격과 ‘민중에 대한 봉사’를 강조하는 온건한 시민단체의 성격을 이중적, 모순적으로 갖고 있으면서 좌충우돌하다가 결국 산산이 붕괴됐다.

    흑표범당보다는 덜 알려졌지만 주목해볼 만한 혁명조직으로 ‘드럼’(DRUM : 도지 혁명적 노조운동)이 있었다. ‘드럼’은 흑표범당과 달리 디트로이트의 노동자들에 기반을 뒀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립공장을 하루만 닫아버리면 크라이슬러 회사에 자동차 1,000대 상당의 손실을 입힐 수 있고 … 자동으로 거리에서 5,000~10,000명을 단 한 번에 조직할 수도 있다. 반면에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을 모은다면 그만큼 모으기가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혁명적 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전위이며, 원래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는 일반적으로 분열돼 있는 계급이고 규율이 전혀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이 조직은 스탈린주의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와 함께 <자본론>도 학습했으며, 여러 사회주의 모임에 참여했고, 다양한 흑인운동에 열성적으로 결합한 여섯 명의 흑인 혁명가들이 주도했다. 1967년 디트로이트 봉기 직후 이 그룹은 혁명적 신문을 발간했고, 크라이슬러의 도지 메인 공장에서 일어난 비공인파업에 참가해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주간 소식지 <드럼>도 발간했다. 이 소식지가 성공해 ‘드럼’은 비공인파업을 성공적으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이런 성공사례는 비슷한 조직들로 확산됐다. 그리고 이런 조직들이 결합해 결국엔 ‘혁명적 흑인노동자연맹’이 만들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조직은 결정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그것은 이 조직이 흑인노동자들을 백인노동자들과 분리시켜 조직해야 한다는 ‘흑인 분리주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백인노동자들도 백인우월주의에 깊이 빠져 있다고 보고, 백인노동자들에게는 유인물도 나누어주지 않았다. 그 결과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많은 백인노동자들은 ‘혁명적 흑인노동자연맹’이 조직한 파업에서 빠져나갔고, 백인노동자들과 친한 많은 흑인노동자들도 백인노동자들을 따라갔다. 그래도 일부 계급적 백인노동자들은 파업에 참가했지만 대세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분열되어 있어 힘이 강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파업이 끝난 다음 파업 주도자 다섯 명을 해고해 혁명적 흑인노동자연맹의 공장조직을 분쇄해버렸다. 혁명적 흑인노동자연맹은 흑인노동자인가 백인노동자인가에 관계없이 노동자계급 전체를 단결시켜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분명한 전망을 갖지 못한 채, ‘흑인분리주의’라는 뒤집어진 인종주의에 감염되었기 때문에 결국 이런 패배를 자초한 것이다.

    남미의 불꽃 - 칠레 혁명

    1960년대 말의 급진적 학생운동이 1970년대에 노동자투쟁의 물결로 이어진 곳은 비단 유럽만이 아니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남쪽 끝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다. 1960년대 말에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 시에서는 거의 봉기가 일어나다시피 했고, 칠레에서는 토지점거운동이 확산돼 기독민주당 정부를 위협했다. 두 경우 모두 혁명을 향한 아래로부터의 동력은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 머물다가 유실됐다.

    ▲ 아옌데

    칠레에서는 의회주의 정당인 사회당이 새롭게 부상한 전투적 운동의 수혜자가 됐다. 사회당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인 아옌데가 1970년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데 그때 의회 안의 우익 다수파는 아옌데한테 군대의 지휘체계를 문란하게 하지 않겠다는 헌법상의 약속을 받아내는 대가로 그의 집권을 승인해 줬다.

    그러나 주요 미국 자본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옌데 집권 2년 만에 칠레 주요 부문의 자본가들 모두가 정부에 등을 돌렸다. 1972년 가을에는 트럭 운수업자들이 주도해 아옌데 정부 퇴진을 노린 ‘사장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하고 각각의 공장들을 서로 연결하기 위해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와 비슷한 기구인 코르돈을 조직함으로써 사장들의 기도를 좌절시켰다. 1973년의 쿠데타 시도는 군부의 분열과 대규모 가두시위에 부딪혀 실패로 끝났다.

    그런데도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사회당의 주류는 사람들에게 코르돈을 해체하고 ‘헌법을 존중하는’ 군대의 전통을 믿어달라고 호소했다. 아옌데는 우익을 달래고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피노체트를 포함한 군 장성들을 정부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그해 9월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아옌데가 있는 대통령궁을 폭격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 활동가들을 살해했다. 유럽에서는 노동계 지도자들이 나서서 노동운동을 잠재운 반면 라틴아메리카 남부에서는 노동운동이 피의 강물에 익사하고 말았다.

    역사적 배신

    1968년은 서구 자본주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노동자파업, 베트남전에 맞선 반전투쟁, 체코의 반란 등이 하나로 겹쳐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그동안 노동조합들, 대부분의 노동자 정당들까지 포함해서 지배적이었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몇몇 나라에서는 소규모 혁명좌파가 상승하는 노동자운동과 결합해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4~76년은 두 번째 전환점이었다. 소규모 혁명좌파는 대중의 역동성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결과 모든 곳에서 자본가계급의 지배는 안정됐다. 자본가계급은 내적 결속력을 회복했으며,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지배시스템을 복구시켰다.

    이렇게 자본주의 체제가 안정을 찾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스탈린주의 공산당 등 개량주의 정당들과 노조 관료들의 역사적 배신행위였다.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프랑스, 포르투갈 등 어느 나라에서나 자본가정부는 혼자 힘만으로는 노동자투쟁을 중단시킬 수 없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역사적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에서는 ‘사회협약’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에서는 ‘몬클로아 협약’이라는 이름으로, 칠레에서는 아옌데 정부의 타협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적 배신’이 이루어졌다. 이런 협약들은 장기호황이 끝나갈 무렵에 노동자투쟁을 잠재우는 효과를 톡톡히 발휘했다.

    크게 보자면 한국에서 지금 자본가정부가 노리고 있는 것도 70년대 중반의 서유럽 상황을 재현하는 것이다. 87년부터 97년 총파업까지 근 10여 년간 한국노동자운동은 부침을 겪었지만 상당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이제 역사의 무대에 당당히 등장한 한국노동자운동은 자본가계급이 물리적 탄압만으로는 꺾을 수 없는 세력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정부는 노사정위, 산업별, 지역별 노사정 회의 등 여러 형식을 통해 여전히 그 전투력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은 노동자운동에 관료제라는 재갈을 단단히 물리려 해왔다. 비록 이런 시도들은 때로는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지만 자본가계급은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서유럽 운동의 경험은 한국 노동자운동이 더욱 단호하게 관료제와 협조주의에 맞서 싸워야 하며, 이를 위해서 혁명적 지도력을 더 굳게 세워나가야 한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유럽 혁명좌파의 위기

    1968~74년의 노동운동 고양기가 70년대 중후반을 거쳐 퇴조기로 바뀌자 노동운동 안에서 방향감각 상실, 혼란과 좌절, 변절, 사기저하, 좌우익적 일탈이 극심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90년대 초반 구소련이 바뀌고, 군사독재에서 민간정부로 넘어갔을 때 한국에서 나타난 혼란과 동요, 변절과 비슷했다. 대표적인 것들만 몇 가지 살펴보자.

    미국의 흑인 혁명조직이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 때문에 흑인 분리주의에 빠져들었듯이, 미국에서 여성운동은 미국 운동권 안의 남성 우월주의를 역겨워하며 여성 분리주의로 빠져들었다. 이런 여성 분리주의는 남성 자본가들(과 여성 자본가들)이 아니라 남성 일반을 ‘적’으로 간주하고,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이 아니라 모든 여성의 단결(여성 노동자+여성 중간계급+여성 자본가)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재앙적이었다. 유럽에서는 남성 노동자들과 여성 노동자들의 공동투쟁 경험이 축적돼 있었기에 처음엔 여성 분리주의 경향이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중에 유럽노동운동이 쇠퇴하고, 노동운동 안에서 남성 우월주의가 커지자 여성 분리주의 경향은 유럽에도 꽤 널리 확산됐다. 여성 분리주의는 ‘노동자는 하나다’는 정신과 정반대로 성에 따라 노동자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다른 한편 활동가들은 스탈린주의와 모택동주의의 기계적 규율이 지배하던 시절에 반발해 이제는 모든 규율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관료적 중앙집중제, 상명하달식 체계에 질식당했던 활동가들이 이제는 민주집중제도 부정하고 ‘개성 존중과 자발성’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다. 이렇게 자율성을 맹목적으로 강조하는 입장은 혁명조직들이 노동자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혁명조직의 지도와 결합하지 못하는 자생적 노동운동은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이데올로기적 공격을 도저히 당해낼 수 없었다.

    여성운동, 반전운동, 학생운동, 환경운동 등 여러 ‘자율적’ 부문 운동을 강조하자, 혁명운동도 여러 개로 잘게 쪼개졌다. 노동자계급 전체를, 그리고 피억압 인민을 자본가계급에 맞선 투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총체적이고 정치적인 분석이 사라져 버렸다. 혁명운동이 잘게 쪼개지자 혁명조직도 잘게 쪼개졌다. 그런데 잘게 쪼개진 협소한 부문운동은 자본주의 질서를 털끝만큼도 위협하지 않기에 혁명적 전망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수많은 혁명가들이 혁명운동을 포기해버렸다. 마치 한국에서 90년대 초중반에 혁명적 전망이 흔들리면서 부문운동에 들어갔던 수많은 운동가들이 결국 혁명운동을 포기했던 것처럼 말이다.

    혁명적 전망을 상실한 운동이 개량주의로 빠져드는 것은 필연이다. 1974~76년에 이탈리아 혁명좌파의 주요 조직들이 대세를 따라 우경화했다. 프랑스의 LCR(혁명적 공산주의동맹)은 선거를 통해 사회당-공산당 연립좌파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새로운 혁명적 고양기를 열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LCR은 프랑스 사회당, 공산당의 정치가 영국노동당이나 독일사회민주당의 정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을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그래도 LCR은 조직을 해체하지는 않았다. 영국, 독일, 스페인의 일부 혁명좌파 지도자들은 아예 독자 조직을 해체하고 노동당이나 사회당, 녹색당 등에 기어들어가 부르주아 정치가가 되어버렸다.

    68년 혁명의 교훈

    68년 혁명은 동서방 체제의 내적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며,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이 있다는 것을 맹아적으로나마 보여주었다. 68년 혁명은 프랑스에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총파업을 낳았으며, 그 다음 해 이탈리아의 ‘뜨거운 가을’과 70년대 초중반 유럽과 남미의 노동자투쟁을 낳았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일부 신좌파들의 낡은 편견과는 달리 노동자계급만이 낡은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으로부터 뒤흔들고 착취와 억압이 없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진정한 혁명세력임을 보여주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사>에서 1905년 러시아 노동자들이 전년에 비해 무려 115배나 많이 파업에 참가한 것을 설명하며 “노동자계급은 정세의 흐름에 따라 즉흥적으로 유례없는 혁명활동을 전개하도록 동력이 주어진 계급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의 올바름은 68혁명에서 분명하게 입증됐다. 68년에 프랑스에서 이틀 만에 900~1,000만 노동자가 총파업에 떨쳐 일어섰다. 이탈리아에서는 69년 ‘뜨거운 가을’ 때 2,000만이 파업했다. 영국, 포르투갈, 칠레 등 세계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70년대 초반의 결정적 시기에 과감히 투쟁의 무대에 뛰어올랐다.

    하지만 이런 혁명적 잠재력을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제대로 바꾸어내기 위해서는 혁명적 노동자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무리 노동자계급의 수와 투쟁이 많아도 노동해방을 향해 노동자계급을 일관되게 이끌 수 있는 진정한 혁명정당이 없다면 그 잠재력은 결코 1/10도 발휘될 수 없다는 점이 68년 혁명을 통해 거듭 확인되지 않았는가?

    혁명조직은 미국 흑인혁명조직들의 사례를 통해 잘 알 수 있듯이 노동자계급 현장에 단단히 기초를 두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삶과 실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노동자계급과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이방인들’ 같아서는 안 된다. 로자가 말했듯이 “자본주의의 사슬은 그 사슬이 만들어지는 바로 그곳에서 끊어야 한다.” 주요한 현장에 기반을 두고, 그곳에서부터 노동해방 선전, 선동, 조직화를 활발하게 펼쳐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모범을 다른 현장으로 확산시켜가야 한다.

    혁명조직이 각각의 현장, 노조, 현장조직 등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의 느슨한 협의체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혁명조직이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경제투쟁을 따라다니는 데 급급할 뿐인 전투적 노동단체 수준으로 전락해서도 안 된다. 특히 좌파 관료들의 뒤꽁무니를 좇는 방식의 활동은 결국 현장에서 활동하는 혁명가를 붕괴시키고, 혁명조직의 혼을 앗아가버릴 것이다.

    혁명조직은 분명한 혁명강령과 정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결사체이며, 구성원 개개인을 사회와 역사의 참된 주인으로 세워내는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이고자 하기에 관료적이고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꽂는 스탈린주의적 조직규율을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하지만 ‘신좌파’처럼 구성원의 자율성과 개성을 ‘신’처럼 떠받드는 것은 조직을 사실상 해체시켜 거대한 자본주의에 맞선 응집력 있고 효과적인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다.

    모든 선배 노동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혁명적 시기에는 과거의 혁명으로부터 최대한 교훈을 뽑아내고, 혁명적 중핵을 견결히 유지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노동자계급과 유기적으로 결합하면서 다가올 혁명의 시기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제2의 68혁명은 반드시 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노동자계급은 그것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68혁명의 소중한 교훈을 철저히 소화하자!

    스탈린주의 나라들에서의 노동자 투쟁

    소련, 중국,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스스로를 ‘노동자의 천국인 사회주의 국가’라고 불렀다. 한국과 미국, 서유럽의 지배자들도 ‘사회주의’를 비난하기 위해 그 국가들을 사회주의 국가라고 불렀다. 하지만 소련, 중국, 동유럽의 스탈린주의 국가들은 한국, 미국, 서유럽 국가들처럼 한줌의 지배자들이 다수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반동 국가였을 뿐이다. 이것은 그 나라들에서 벌어진 노동자투쟁의 역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68혁명을 다루면서 체코의 ‘프라하의 봄’은 간단히 다뤘다. 여기에서는 1956년 헝가리 노동자혁명과 1980~81년 폴란드의 대중파업, 1989년 천안문 혁명을 다룰 것이다.

    1956년 헝가리 노동자혁명

    2차 대전이 끝난 다음, 패전국인 헝가리에는 소련군 탱크가 들어왔다. 그때부터 소련의 배후조종을 받는 스탈린주의 노동당이 헝가리 노동자들의 삶을 파탄내고, 자유를 억압했다. 1953년에 스탈린이 죽고 ‘스탈린 격하운동’이 소련에서 펼쳐지자, 스탈린식 전체주의에 숨죽이고 있던 동유럽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가장 먼저 1956년 여름 폴란드 포즈난에서 노동자들의 시위가 터져나왔다. 이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헝가리에서도 10월 23일 학생들이 전국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 소련 탱크에 맞선 헝가리의 수십만 군중

    수만 명의 시위가 점차 격해지자 지배자들이 총을 쏘았는데, 이를 계기로 시위는 혁명으로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갔다. 시위대에 공감한 군인과 경찰들이 시위대에 무기를 주기 시작해, 10월 24일부터는 무장한 노동자민중이 소련군, 정부군과 맞서 싸웠다. 전국에서 노동자들은 전면파업을 벌이고, ‘헝가리 노동자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했다. 노동자평의회는 “봉기를 조직한 기구인 동시에 무장한 인민이 신뢰하는 인민의 자치기구”였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지 타도, 스탈린주의 타도’를 내걸었다.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침묵했다. 결국 11월 4일 소련은 3천대의 탱크와 20만 명의 병력을 앞세워 헝가리 노동자혁명을 무력으로 짓밟았다. 13일간 벌어진 혁명투쟁과 소련군의 무력 진압 과정에서 2,500명이 죽고, 2만 명이 다쳤으며, 20만 명이 외국으로 피신했다. 혁명 지도부 229명이 처형됐는데, 그 대부분은 20살 전후의 노동자들이었다.

    헝가리 노동자혁명은 비록 실패해지만, ‘철의 장막’이라 불리는 소련 지배체제를 처음으로 찢어버린 위대한 노동자투쟁이었다. 헝가리 노동자혁명은 스탈린주의 나라들의 노동자들에게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1980~81년 폴란드 연대노조의 대중파업

    폴란드에서는 스탈린주의 정권이 경제위기 때마다 노동자를 공격하면, 노동자들은 강력하게 반격해온 전통이 있었다. 1956년에는 헝가리 혁명의 직접적 도화선이 된 노동자 반란이 있었다. 1968년에는 서구 학생반란과 비슷한 학생 저항운동이 있었다. 1970년 겨울에는 정부의 식료품값 인상에 항의해 그다니스크 조선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1976년 6월에는 비슷한 인상안에 대해 바르샤바 인근의 노동자들이 저항했다.

    1980년 투쟁의 출발점도 정부의 육류 가격 인상 발표였다. 70년대 내내 여러 차례의 투쟁으로 단련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 파업으로 대응했다. 이 파업 물결은 1970년 투쟁의 근거지인 그다니스크 레닌 조선소에도 몰아쳤다. 이 파업은 곧바로 공장점거 파업으로 발전했다. 파업은 그다니스크의 다른 부문 노동자들에게로 쉽게 파급됐고, 겁먹은 경영진은 이틀 만에 임금인상에 합의했다.

    ▲ 1980년 8월 18일, 파업 중인 그다니스크 레닌 조선소 노동자들

    그러나 공장점거 노동자들 중 일부 선진노동자들이 이런 경제적 성과에 안주하길 거부하고 점거를 계속할 것을 동료 노동자들에게 설득하면서 역사의 방향은 급선회한다.선진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공장간 연대파업위원회가 조직됐다. 이들 조직의 주도 아래 레닌 조선소에서는 관제 어용노조로부터 독립적인 새로운 노조 건설을 비롯한 정치적 요구들(출산휴가 연장 등의 복지 요구, 정치범 석방 등)을 내건 점거파업이 계속됐다.

    파업위원회 지도자들은 정부 측과 협상이 있을 때마다 그 논의 내용 일체를 공장 확성기를 통해 동료 노동자들에게 알렸다. 공장 곳곳에서 매일, 매시간 정치토론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그동안 말뿐이었던 노동자 민주주의를 스스로 만들어냈다. 드디어 8월 31일 정부는 무릎을 꿇고, 노동자의 요구를 모두 수용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그다니스크 연대파업위원회는 ‘연대’라는 독립노조로 전환했다. 동유럽 스탈린주의 사회에서 등장한 최초의 독립 노동자조직이었다.

    그다니스크 합의가 체결되자마자, 그리고 연대노조가 출범하자마자 폴란드에서 전형적인 대중파업이 일어났다. 겨울이 될 때까지 1980년 내내 폴란드 전역에서 파업이 벌어졌다.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으로 바뀌고, 정치투쟁이 경제투쟁으로 바뀌는 양상이 연출됐다. 가령, 각 지역 파업 지도자들은 임금인상 파업이 일단락되자마자 파업 파괴에 앞장선 경찰 관료들의 퇴진을 요구하는 반부패 파업을 벌였다. 파업은 좀 더 광범위한 노동자들로까지 확산됐다. 1981년 1월부터 학생운동이 꿈틀거렸다. 체제 유지의 보루였던 농촌에서도 ‘농민 연대’가 등장했다.

    1981년 내내 폴란드에서는 노동자민중의 요구가 끓어오르는 가운데 연대노조와 정부가 팽팽하게 대결했다. 스탈린주의 정부가 노동자민중의 들끓는 요구를 수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유일하게 바람직한 해결책은 노동자해방을 위해 한줌 지배자들의 정부를 타도하고, 진정한 노동자권력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웬사 등 연대노조의 주요 지도부는 명확한 노동해방 전망을 갖고, 대담하게 혁명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정치 지도자들이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결정적 시기에 방향 감각을 잃고, 머뭇거리며 동요했다. 이 틈을 이용해 1970년대 초 칠레에서처럼 군부가 전면에 등장했다. 군부는 1981년 12월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파업 현장과 각 대학에 군대를 전격 투입해 투쟁을 짓밟았다.

    폴란드 연대노조의 대중파업은 동유럽 노동자계급 속에도 어마어마한 혁명적 잠재력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결정적 시기에는 노동해방 혁명으로 굳게 전진할 수 있는 혁명적 지도부가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1989년 천안문 혁명

    1989년 천안문 혁명은 수십 년간, 특히 1978년 개혁개방 이후 10여 년 간 쌓여온 사회적 모순이 폭발한 것이었다. 예산 적자가 갈수록 심해져 국가가 곡물 수매 가격을 거의 올려주지 않았는데, 이것이 농민들의 삶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위협했다. 전례 없는 인플레로 식료품 값이 치솟았다. 노동자, 농민, 학생 등 민중의 삶은 더 힘들어졌지만, 부패한 지방 관리들은 더 살찌고, 더 부유해졌다. 경제위기가 점점 더 극심해지자, 정부는 임금 일부의 지불을 보류하는 등 고통을 모두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 했다.

    4월 15일 지배세력 내 개혁파였던 호요방의 죽음이 불씨가 돼, 이틀 만에 노동자를 포함해 수만 명이 모이는 추모 집회가 열렸다. 여기서는 민주 선거, 언론, 집회의 자유, 부패 척결 같은 정치적 요구가 터져나왔다.

    4월 22일 토요일, 호요방의 장례식이 있었다. 지배세력은 천안문 광장에 수천의 군대, 경찰 병력을 배치해 놓고, 천안문에서 시위를 전면 금지시켰다. 하지만 15만 명이나 시위에 참여했다. 대량 학살을 하지 않고는 광장의 시위대를 해산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자 정부는 한 발자국 물러나 장례 시위를 허용했다.

    ▲ 천안문 항쟁

    러시아 대통령 고르바쵸프가 30년간의 중소 분쟁을 끝내기 위해 5월 15일 베이징에 오기로 했다. 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이 기회를 이용해, 200명의 학생 지도자들이 천안문에서 ‘등소평 퇴진 등’을 요구하며 단식을 시작했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고르바초프가 왔을 때는 천안문 광장에 200만 명까지 모여들었고, 여기에는 노동자들도 상당수 참여했다. 단식과 시위는 아주 빠르게 여러 도시로 퍼져 나갔다.

    5월 18일 지배자들은 천안문 광장을 방문해 학생들과 대화하는 척하는 쇼를 연출한 다음, 계엄령을 선포했다. 중국 군대의 10%나 되는 30만 군대가 베이징을 점점 조여들어 왔다.

    하지만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군대로부터 학생들의 투쟁을 방어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이렇게 해서 공공연한 반란으로 바뀐 항의 시위는 이제 혁명으로 불타올랐다. 버스와 트럭 또는 건설 장비로 군대를 막기 위한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학생들의 파업 요구에 응답해 수도의 제철, 제강 공장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했다. 어느 목격자에 따르면, 도시 인구의 반이 넘는 약 500만의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대부분 노동자들이었다고 이야기했다 한다.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노동자들이 군인들에게 이 운동에 대해 설명하자, 군대의 규율은 사라져 없어졌다. 노동자와 학생들이 베이징 거리를 통제했고, 어느 곳에서나 노동자들이나 학생들이 모여 정치토론을 활발하게 벌였다. 중국판 민주노조가 월요일에 총파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만약 이것이 성사됐다면, 중국 혁명은 한걸음 더 크게 전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총파업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그것은 이 운동의 공식 지도부인 학생들이 노동자계급을 혁명의 주도세력으로 보지 않고, 단지 거리 시위의 숫자를 늘려줄 수 있는 세력으로만 보았기 때문이다. 상하이에서는 심지어 운동 지도부가 파업이 경제에 손실을 입힌다는 이유로 파업에 반대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운동 지도부가 ‘계급적 관점’ 대신 ‘자유주의적 관점’에 어느 정도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운동 지도부가 한계를 드러내 혁명투쟁의 기운이 꺾이자, 지배계급은 다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지배계급은 결국 장갑차와 탱크로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수만 노동자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하며 피비린내 나는 진압작전을 벌였다. 천안문의 학생 지도부는 저항을 포기하고 철수해버렸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과 함께 노동자들은 벽돌, 화염병 등을 이용해 끝까지 저항했다. 몇몇 소대를 설득해 혁명의 편에 서게도 만들었다. 하지만 패배는 피할 수 없었다. 1989년 말까지 3만여 명이 체포되고, 이들 대부분이 비밀리에 총살당했다.

    1989년 중국 혁명은 패배했다. 하지만 수백만의 중국 노동자들과 혁명적 학생들은 이 패배를 통해, 자신들한테 지배자들을 꺾을 수 있는 힘이 있고, 경찰이나 관료들 없이도 세상을 운영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따라서 중국 노동자계급은 수만 명의 희생이란 값비싼 수업료를 내야 했지만, 언젠가는 기필코 노동자해방이라는 더없이 값진 결실을 반드시 쟁취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은 패배했다. 하지만 패배 속에서 승리가 자라나고 있다!”

    1980년대 제3세계 노동자 투쟁의 분출

    세계 자본주의는 2차 대전 이후 30년 가까이 ‘자본주의 황금시대’를 누렸다. 그만큼 그 시대에는 세계 자본주의 경제가 급속하게 확장했다. 하지만 1973~4년 오일쇼크를 계기로 많은 나라들이 잇달아 충격적 경제위기를 겪었다. 이 위기 이후 ‘황금시대’는 끝났다.

    이제 자본가들은 돈벌이의 새로운 원천을 찾아나서야 했다. 그들은 ‘구조조정’에 나섰다. 먼저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공장문을 닫았다.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렸다. 그와 동시에 한 나라를 넘어 세계로 더 많이 뻗어나갔다. 이른바 ‘해외공장’을 확대한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는 민간 자본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국가산업을 사들여(사유화) 이윤을 많이 남겼다. 이런 것이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과정이다.

    자본가들이 이런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나아간 것은 68혁명에 대응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거대한 68혁명에서 근본적인 위협을 받은 세계 자본가들이 그러한 혁명적 운동의 재건을 철저히 봉쇄하기 위해 반혁명의 일환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택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대규모 공장 이동이 이루어지고, 자본과 정권의 ‘경제위기’, ‘경쟁력 강화’ 이데올로기 공세도 훨씬 강해져 기존 노동자들의 숫자와 힘이 많이 약해졌다. 이 때문에 선진 자본주의에서는 일정 기간 파업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자본이 가는 곳에 노동자가 생기고, 노동자가 생기는 곳에는 반드시 투쟁도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자본이 제3세계로까지 나아감에 따라 노동자투쟁도 제3세계로까지 나아갔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는 선발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짧은 시기에, 더 고도로 경제를 성장시킨다. 한국 자본주의가 대표적이다. 그런 만큼 자본가들의 착취와 억압도 강하다. 하지만 노동자들도 짧은 시기에 대거 결집한다. 특히 팔팔한 젊은 노동자들이 구름처럼 한 곳으로 모여든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투쟁도 그만큼 폭발적이고, 위력적으로 펼쳐질 수 있다. 한국의 87년 노동자대투쟁, 브라질의 1978~80년 금속노동자파업, 남아공 노동자투쟁 등이 대표적이다.

    1978년 5월에 브라질 상베르나르두 자동차 노동자 파업이 전국 50만 노동자 파업으로 확산됐다. 1979년에는 300만 노동자들이 파업했다. 1970년대에 10여 건에 지나지 않던 파업은, 1980년대 전반에는 200~400건으로, 1980년대 후반에는 600~2,000건으로까지 늘어났다. 브라질 노동자들은 이런 파업의 성과로 1980년에 이미 노동자당을 만들고, 1983년에 브라질판 민주노총(CUT)을 건설했다.

    오랫동안 백인 자본가 계급이 흑인 노동자계급을 극심하게 ‘착취’하고 ‘차별’해왔던 남아공에서도 1983~84년에는 노동자파업에 불이 붙었다. 이 파업은 1983년에 흑인을 배제한 ‘삼원 의회’를 도입하려는 걸 저지하고, 노동법 개악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파업이 일어나자 백인 자본가 계급과 그 정권은 탄압을 대대적으로 퍼부었다. 파업에 참여한 흑인 노동자의 5% 정도가 해고됐다. 1983년에 흑인 노동자 56만 명 정도가 구속됐고, 1984년 흑인 노동자 1,300여 명이 살해당했다. 1985~86년에는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돼 사상자가 더욱 증가했다.

    ▲ 코사투 창립대회에 참가한 대표자들

    하지만 비합법 상태에서도 노조 운동은 탄압을 뚫고 꿋꿋하게 전진했다. 그 결과 흑인 노조원이 1983년 61만에서 1984년 83만으로 증가했다. 1985년 마침내 남아공판 민주노총인 코사투(COSATU)를 건설했다.

    한국, 브라질, 남아공 노동자들의 투쟁은 선발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운동이 조금 휘청거렸을 때 ‘노동자계급의 엄청난 잠재력’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래서 선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자본가들과 그 하수인들이 ‘노동자계급이여 안녕!’이라면서 계급투쟁은 끝났다고 비웃을 때,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의 심장을 겨누며 무섭게 진군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런 후발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이 보여준 놀라운 역동성도 아주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다수의 전투적 노조 지도부는 결국 자본가계급에 포섭돼 버렸다. 그것은 세계 어디에서나 조합주의 운동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자본주의를 그대로 둔 채, 일부 노동자들의 작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조합주의는 나날이 격해지는 자본주의 경쟁 압력 속에서 ‘회사가 살아야(나라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자본가의 논리를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노동해방의 전망을 확고히 할 때만, 그리고 혁명정당과 결합할 때만 전투적 민주노조 운동은 자본과 정권 및 보수언론의 총체적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곧게 전진할 수 있다.

    1990~2000년대 세계 노동자 투쟁의 물결

    세계 노동자계급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도 쉼 없이 싸웠다. 1995년 겨울에 프랑스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연금제도 개악, 공무원 임금 동결 등을 추진하는 자본가정부에 맞서 3주간 대규모 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에는 운수·전력·가스·통신·체신·병원·공무원·교사 등이 참여했다. 이 파업으로 노동자들은 의회의 80%를 장악한 쥐페 정부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1996년 말부터 1997년 초까지 한국 노동자들도 노동법 개악에 맞서 역사적인 총파업을 벌였다. 1997년 미국에서는 UPS(택배업체)의 18만 5천 노동자들이 2주간 파업을 벌여 파트타임 1만 명의 정규직화와 임금 격차의 단계적 축소를 쟁취했다.

    이른바 ‘반세계화’ 투쟁의 성장도 세계 노동자투쟁이 발전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 수만에서 수십 만까지 모인 반세계화 시위들(가령 1999년 11월 시애틀, 2000년 9월 프라하, 2001년 7월 제노바)은 자본주의 모순을 어느 정도 폭로하고, 규탄함으로써 노동자투쟁을 자극했다. 하지만 ‘반세계화 투쟁’은 자본주의 자체에 분명하게 맞서지 못한 채, 세계화를 맹목적으로 반대하거나 잡다한 경향이 뒤섞이면서 방향 상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일상적으로 계급투쟁을 벌이는 대신 WTO 같은 세계 자본가기구의 행사를 따라다니는 일회적 투쟁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 2002년 시위에 나선 아르헨티나 민중들. 큰 현수막엔 “도둑질하는 은행들 - 우리의 돈을 내놓아라!”라고 쓰였다.

    2001년 아르헨티나에서는 경제가 파탄나자, 수십만 노동자민중이 들고 일어나 대통령을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 뒤에도 노동자민중은 2주 동안 4명의 임시대통령을 갈아치웠다. 더 나아가 노동자들은 전국적으로 200여 개의 공장을 점거해 생산을 통제하고, 자주 관리를 했다. 아르헨티나 노동자들은 이렇게 뛰어난 역동성을 보여주었지만, 자본가권력을 무너뜨리고 노동자권력을 세우는 데로 대담하게 나아가지는 못했다.

    2002년 이탈리아에서는 해고를 제한하는 노동법(1969년 2,000만 노동자파업의 성과였다)을 개악하려는 데 맞서 1,300만 명이 총파업을 했다. 이 총파업에는 3개 노총 조합원들(총 1,100만)뿐 아니라 수백만 미조직 노동자들까지 참여했다. 총파업으로 공장과 은행, 학교, 우체국 등이 문을 닫았고 대중교통도 사실상 중단됐다. 로마와 볼로냐, 토리노와 피렌체 등 대도시와 공장 밀집 지역에서 각각 20~30만 규모의 대중집회가 열렸다. 이 4월 총파업과 그 뒤를 이은 10월 총파업으로 이탈리아 노동자운동은 큰 활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 노동자운동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에 맞서, 지난 1세기 가까이 노동운동에 잊혀졌던 ‘반전 총파업’까지 선언했다.

    이탈리아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스페인, 영국, 프랑스 노동자들도 뒤흔들어 놓았다. 스페인에서는 6월 월드컵 기간에 실업 수당과 연금 제도 개선을 요구하며 300만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벌였다. 영국에서는 11월 중순 사상 최초로 소방 노동자 파업이 벌어졌으며, 같은 시기에 런던의 교사 6만 명도 파업해 휴교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파업은 도미노처럼 확산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항공관세사들도 일제히 파업에 돌입했으며, 파리에서는 철도 노조를 비롯한 공기업 노조 조합원 8만여 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 유럽의 11월은 그야말로 ‘공공부문 파업의 달’이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자 반전 투쟁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반전 투쟁의 정점은 2003년 2월 15일이었다. 이날 전 세계 60여개 국가 600여 개 도시에서 1,000만 이상의 노동자민중이 거리에 나와서 미 제국주의 강도 집단의 이라크 침략전쟁을 규탄했다.

    이밖에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여러 노동자투쟁들이 있었다. 2006년 봄에는 프랑스에서 고등학생들과 대학생 시위로 시작해서, 3백만 노동자들이 총파업까지 벌여 프랑스판 비정규악법(CPE)을 저지했다. 2006년 3~5월에는 미국의 이주노동자들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테러리스트 취급하는 악법에 맞서 최대 2백만 명의 시위를 조직했다. 이밖에도 중요한 세계 노동자투쟁의 목록은 결코 그치지 않는다.

    이 모든 투쟁들은 노동자계급이 이후 더욱 거대한 힘으로 노동해방을 밀어붙일 힘을 물 밑에서 빠르게 축적해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직 결정적인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고, 또한 20세기 초중반의 거대한 혁명적 활력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21세기 노동자 투쟁은 일단 본궤도에 오르면 20세기 초중반의 노동자 혁명투쟁을 몇 배 이상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 초중반의 노동해방 운동의 물결에는 많아야 수억의 노동자계급이 세계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다가오는 21세기 노동해방 운동의 물결에는 수십억의 노동자계급이 참가할 것이다. 이 물결은 자본주의를 지구상에서 몰아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충분히 갖고 있다!

    인류의 운명은 노동자계급의 지도력에 달려 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강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강력한 현실적 힘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세계적 차원에서도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은 온갖 장벽 때문에 아직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가계급은 세계 어디에서나 노동자계급 사이에 거대한 분할의 골을 판다. 노동자계급을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여성, 현지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실업자와 취업자, 젊은 노동자와 나이든 노동자, 숙련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 등으로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체계적인 위계 사다리를 만들어 노동자들이 자체 분열과 갈등, 혼란 속에서 힘을 완전히 잃게 만들어 버린다.

    또한 자본가계급은 노조관료들과 개량주의 노동자당을 집요하게 감시, 통제, 관리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불만이 ‘고충상담’ 수준을 넘어서서 거대하고 조직적인 계급투쟁으로 자라나는 것을 사전에 철저히 봉쇄하려 한다. 한국의 대기업 노조, 산별연맹, 민주노총, 어용노총에서 흔히 나타나는 교섭기구의 비대화, 밀실교섭, 문화제 중심의 형식적인 집회, 얌전한 시위, 박제화된 파업, 숨 막히는 관료적 통제 등은 이미 전세계에서 숱하게 나타났으며, 지금도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미래는 이런 분열과 혼란, 협조주의의 늪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나 단결 투쟁의 길로 나서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노동해방을 일관되게 지향하면서 계급적 단결과 비타협적 투쟁을 진두지휘할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을 얼마나 빨리, 얼마나 강하게 만들어내느냐는 것이다.

    20세기 전반부(1910~1940년대)의 혁명적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인류는 파시즘과 대학살, 대공황, 세계대전이라는 끔직한 야만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만약 21세기에도 노동자계급이 다가올 혁명적 기회를 이용해 노동해방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인류는 20세기 야만보다 더 잔인한 야만을 겪어야 할지 모른다. 인류는 다시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 노동해방이냐 야만이냐? 노동자계급의 의식과 조직력이, 특히 혁명정당의 지도력이 결국 인류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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