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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교양도서 2권_세계노동운동사(2) 1920~30년대의 격변하는 혁명시대
 사노련  | 2009·11·11 23:11 | HIT : 3,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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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련에서 발행한 <일하며 배우는 노동자 교양도서> 2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에 실린 글입니다.)

    세계노동운동사2 - 1920~30년대의 격변하는 혁명시대

    최지명

    전 세계에 물결친 노동자 민중의 혁명투쟁

    1918년, 1차 대전은 끝났다. 자본가들을 위해 싸운 노동자의 앙상한 두 손에는 형제, 자매의 전사 통지서, 공장 파괴로 인한 해고 통지서, 식량 부족과 기아, 그들을 전쟁으로 내몬 지도자들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만이 주어졌다.

    이런 노동자들에게 러시아 노동자혁명의 소식은 새로운 희망을 던져 주었다. 이전에는 꿈으로만 알았던 그들 자신의 국가를, 그들과 똑같은 노동자들이 지구상의 1/6 지역에 만들어냈다는 것은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 1918년 11월 독일혁명 당시 칼 리프크네히트의 연설을 듣는 군중들

    191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독일의 200만 노동자가 파업했다. 이들은 유럽의 자본가국가들이 러시아 노동자권력을 침공하지 않는 조건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땅 일부와 노동자민중을 넘기라”고 요구한 것에 분노했던 것이다.

    1918년 11월에는 독일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그러나 그들의 지도자들인 사회민주당은 노동자들의 열망을 거스르고 자본가들과 협상했다. 그 결과 만들어진 정부는 자본가와 개량주의 지도자들 간의 연합 정부, 사실상 자본가정부일 뿐이었다. 노동자봉기를 지도했던 공산주의자(스파르타쿠스단) 로자와 리프크네히트는 체포됐다. 새로운 자본가정부는 이들을 잔인하게 죽여 시궁창에 버렸다.

    1919년 영국에서는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손을 떼라”는 요구를 내건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운동이 일어났다. 또 광부, 철도 노동자, 운수노동자를 중심으로 파업이 일어났다. 프랑스 자본가정부가 러시아 자본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해군 병사들을 보냈는데, 대다수가 노동자들인 이 병사들은 러시아 노동자의 사형집행인이 되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들은 러시아 노동자들과 어깨 걸고 시위에 참여했다. 중국에서는 부패한 정부에 반대한 5‧4 운동이 일어났다. 한국(당시 조선)에서는 3‧1 운동이 벌어졌다. 일본에서는 1,000만 명 이상이 참가한 쌀 소동과 8시간 노동제 투쟁이 벌어졌다. 이를 포함해 그야말로 전 세계 노동자민중이 떨쳐 일어섰다.

    제3인터내셔널을 만들다

    제2인터내셔널이 1914년에 ‘조국방위주의’를 내걸고 자국 자본가들의 하수인이 되어 노동자계급을 배신하고 무너졌을 때,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제2인터내셔널은 기회주의에 짓눌려 죽었다. 제3인터내셔널 만세!” 하지만 진실로 혁명적인 인터내셔널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사회적 위기의 심화, 그리고 대규모 노동자투쟁과 혁명들로 점철된 5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1917년 10월 혁명은 제3인터내셔널의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0월 혁명은 러시아 노동자권력이라는 제3인터내셔널의 가장 든든한 보루를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가져다주었다. 또한 10월 혁명이 촉발한 세계 혁명의 물결도 제3인터내셔널 건설의 또 다른 중요한 토대가 됐다. 제3인터내셔널은 이렇게 타올랐던 10월 혁명과 그 후의 세계혁명 물결이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제3인터내셔널은 혁명의 물결을 단순히 ‘반영’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제3인터내셔널은 폭발적으로 터져나온 혁명의 물결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고, 온갖 기회주의자들의 준동을 제압해 세계혁명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노동해방 투사들이 의식적으로 창조한 것이었다.

    러시아 볼세비키 외에는 아직 단련된 노동자계급 지도부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독일에서 1919년 1월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단의 모험적 봉기가 패배했다. 바바리아 소비에트공화국은 한 달 만에, 헝가리소비에트공화국은 다섯 달 만에 무너졌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독일 등 각국 노동해방 투쟁을 지도할 강력한 혁명적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것은 아주 중요했다.

    ▲ 1920년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2차 대회

    또한 제3인터내셔널 건설은 러시아 노동자권력을 사수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했다. 레닌과 트로츠키가 누누이 강조했듯이 “아무리 영웅적이고 잘 단련된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인민일지라도 세계 노동자들과의 강철 같은 연대가 없다면,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제3인터내셔널은 러시아혁명과 세계혁명 물결의 산물이자, 러시아혁명을 반혁명으로부터 사수하고, 세계혁명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굳센 의지의 산물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노동자계급의 혁명 경험을 일반화해, 기회주의로 뒤범벅된 운동을 혁신하고, 참으로 혁명적인 전 세계 모든 노동자계급 당들의 힘을 동원해 세계 노동해방 혁명의 승리를 촉진하는 것이다.”(1919년, 제3인터내셔널 1차 대회 선언)

    이탈리아의 '붉은 2년'과 당의 기회주의

    이탈리아는 당시 서유럽 노동자운동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중심적인 국가 중 하나였다. 이탈리아에서는 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50만 명이 죽었다. 거액의 전쟁부채도 떠안게 됐다. 전쟁으로 생계비는 6배나 올랐다. 그 결과 이탈리아 역사에서 ‘붉은 2년’으로 기록된 1919~20년 대투쟁이 벌어졌다.

    1919년 6월과 7월에 전국에서 식료품 가격을 둘러싸고 일어난 시위들이 몇몇 지역에서는 봉기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연대감의 표시로 2일간 전국총파업이 벌어졌다. 토리노에서부터 공장평의회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토지점거와 병사들의 군대반란이 뒤따랐다.

    ▲ 공장을 장악한 이탈리아 피아트공장 노동자들

    파업물결은 1920년에도 계속 이어져 4월에 토리노 지역에서 50만 노동자들이 공장평의회를 방어하는 파업을 벌였다. 1920년 8월에 금속노조는 임금협상이 결렬되자 태업에 들어갔다. 그러자 밀라노의 한 자본가가 공장을 폐쇄했다. 밀라노 금속노동자들은 모든 공장에 대한 즉각 점거로 맞섰다. 자본가들이 전국적 폐업을 단행하자 9월 4일 50만 금속노동자들은 전국적인 공장점거로 대응했다. 공장평의회를 통해 공장을 통제하고 ‘적위대’를 통해 공장을 방어하면서 노동자들은 생산을 계속했다.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운송기업 사장이 토리노 피아트공장에 전화를 걸어 그곳 사장과 통화하려 했다.

    “여보세요, 누구십니까?”

    “여기는 피아트 소비에트입니다.”

    “이런 … 미안합니다. … 다시 걸겠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회당은 여러 해 동안 혁명적 정책을 선전했지만 정작 혁명적 상황이 오자 어떤 계획도, 어떤 지도도 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면서 마비되어 버렸다. 제3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는 긴급호소문을 보냈다.

    “공장과 작업장을 장악하는 것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 운동의 범위를 더 넓은 노동자대중으로까지 확대하고, 일반화해야 합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전면전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방금 시작된 강력하고 거대한 운동은 해체되고 붕괴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충고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사회당이 어떤 정치적 지도도, 봉기에 대한 어떤 기술적 준비도 하지 않음으로써 예견된 대로 운동은 ‘해체와 붕괴’의 길로 나아갔다. 노동운동 지도부가 보인 무능력의 대가로 무쏠리니의 파시즘이 곧바로 뒤를 이었다.

    독일 당의 모험주의

    이탈리아에서는 중도주의 사회당 지도부의 동요로 혁명적 대중운동이 거대하게 패배했다. 그런데 바로 뒤인 1921년 3월 독일에서는 전국적인 혁명적 대중운동이 없는 상태에서 당 지도부가 억지로 전투의 속도를 높이고, 당원들이 대중을 대신하는 모험주의 행동 때문에 또 다른 참담한 패배를 겪었다. 이탈리아의 재앙과 독일의 패배 사이에는 연관이 있었다. 이탈리아 중도주의자들의 동요는 독일 좌익모험주의자들을 부추겼던 것이다.

    독일공산당 지도부와 당시 독일운동에 개입하고 있던 지노비에프 등은 “전투적 당원이 공세를 펼치면 독일노동자들이 활기를 찾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은 일련의 공세를 통해 전진할 수 있다”는 모험주의적 공세이론을 채택했다.

    1921년 3월에 작센 주의 사회민주당 장관이 공산당의 아성인 몇몇 공장을 점거하는 계획된 도발을 해오자, 즉시 여러 곳에서 봉기와 일련의 무장충돌이 일어났다. 1917년 6월 페트로그라드 봉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중심지에서 노동자들이 봉기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노동자계급 대중은 거기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가장 선진적인 부문들을 점검하고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질서정연하게 후퇴를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더 넓은 범위의 노동자대중이 합류할 수 있는 시점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은 극히 어렵고 복잡한 작전이다.

    그런데 낭만적 관념에 흠뻑 취한 독일공산당 지도자들은 정반대로 했다. 그들은 총파업과 국가에 대항하는 무장행동을 호소했다. 그리고 정부를 상대로 폭탄테러를 해 노동자들에게 활기를 되찾아주라고 당 군사조직에 지시했다. 전투적 당원들에게는 만약 노동자들이 파업호소에 응하지 않으면 그들을 강제로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공장을 점거한 공산당 노동자와 일하러 가는 사민당 노동자들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모험은 불가피하게 파국을 낳았고, 야만적 탄압이 뒤따랐다. 독일 공산당은 이 전면전에서 예정된 참담한 패배를 겪으면서 결국 불법화됐다. 당원은 (1919년 창당 때의 35만 명에서) 15만 명 정도로까지 참담하게 줄어들었다. 수천 명의 투사들이 차가운 쇠창살 안에 갇혔다. 독일 공산당은 당시 투쟁의 방어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고, 실제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방침을 채택할 수 없었기에 쓰디쓴 결과를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뼈아픈 패배는 기회주의적 동요와 모험주의를 모두 가차 없이 배격하고, ‘단호함과 유연함’을 동시에 겸비한 뛰어난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것, 노동자계급에게 명확한 목표를 제시하고 노동자계급과 유기적으로 호흡하면서 그 목표를 향해 일관되게 나아갈 수 있는 지도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얼마나 사활적인가를 가르쳐준다.

    독일혁명의 기운이 무르익다

    1921년 3월의 모험주의 행동으로 독일 공산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1921년 8월 당 대회를 통해 독일공산당은 공동전선 전술을 받아들이고 부분적 요구강령을 채택했다. 그 결과 이듬해 독일공산당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1922년 6월에 사회민주당이 주된 협력자로 참여하고 있던 연합정부의 외무장관이 극우 민족주의자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당했다. 그것은 군대, 경찰과 느슨하게 연결된 우익 폭력조직들이 저지른 일련의 백색테러의 절정이었다.

    독일공산당은 이런 백색테러에 맞선 공동전선 활동을 전개했다. 이것은 과거 투쟁의 패배로 침체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계급의식을 드높이고 자신감을 강화할 수 있는 유용한 계기가 됐다.

    노조 안의 공동전선 활동도 독일공산당에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당원이 1921년의 낮은 수준에서 회복되어 1922년 말에는 21만 8천 가량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에 독일사민당은 4만 7천명의 당원을 잃었다.

    ▲ 1923년 독일의 초인플레이션. 지폐뭉치를 땔감으로 쓰고 있는데,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나무보다 지폐뭉치가 더 오래 타기 때문이다.

    하지만 긍정적인 것도 도가 지나치면 부정적인 것으로 바뀌는 법이다. 이런 공동전선의 경험은 대단히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독일공산당의 우익 지도부는 독일사민당 좌파에 치근덕거림으로써 평화적 방식으로 무한정 성과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동전선을 ‘우익적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다. 이런 이론의 오류는 얼마 후인 1923년 10월 혁명 때 나타난 행동상의 오류를 예고했다.

    1923년에 독일은 새롭고 더 깊은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나날이 폭등했다. 1923년 6월에 미화 1달러를 사려면 300 독일 마르크가 필요했다. 6개월 뒤에는 8,000 독일 마르크가 필요했다. 물가는 처음에는 일주일 간격으로 오르더니 나중에는 날마다 올랐다. 그 결과 1923년 늦여름에 독일 돈은 실제 가치가 없어졌다. 이런 인플레의 결과로 노동자들의 삶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5~7월에 경제파업이 독일 전역을 휩쓸었다.

    한편 1923년 1월에는 프랑스 군대가 당시 독일의 공업 중심지였던 루르를 침공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체결된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르면 독일은 해마다 엄청난 전쟁 배상금과 상당한 석탄을 제공해야 했다. 그런데 독일정부가 석탄을 제공하지 않자 우익적인 프랑스정부가 석탄을 직접 가져가기 위해 루르를 점령한 것이다.

    제국주의 강도들은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야만적 전쟁을 일으켜 전쟁 기간에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쟁배상금 등 온갖 명목으로 자국 및 타국 노동자들에 대한 수탈을 강화했던 것이다.

    이에 맞서 제3인터내셔널은 국제연대를 적극 조직했다. 프랑스공산당은 파리 등지에서 곧바로 강력한 항의시위들을 펼쳤다.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는 “여러분의 적은 국내에 있다”면서 자국 자본가정부에 맞선 비타협적 투쟁을 호소했다. 이런 국제 선동 덕분에 독일노동자들도 ‘민족적 단결’이라는 망령에서 점차 벗어날 수 있었다.

    앞서 말한 5~7월의 전국적 대중파업의 물결 속에서 노조 지도부는 통제력을 잃었다. 대신 공장평의회가 실질적 지도부로 떠올랐다. 그 평의회들에서 독일공산당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노동자 6만 명 정도로 이루어진 8백 개가량의 노동자민병대가 만들어졌다. 독일 공산당의 영향력과 당원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노동자들은 급속히 좌로 나아갔고, “(사회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는 말을 “안녕하세요” 만큼이나 매일같이 했다.

    어느 프랑스 공산당원은 다음과 같이 그 상황을 설명했다. “9월과 10월과 11월에 독일은 혁명을 충분히 겪었다. … 백만의 혁명가들이 공격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 뒤에는 수백만의 실업자, 굶주리는 사람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있었다. 군중의 근육은 준비되어 있었고, 손에는 이미 총을 쥐고 독일 제국 군대의 장갑차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트로츠키도 이렇게 얘기했다. “1923년 후반, 독일에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하며 절대적으로 유리한 혁명의 기회가 찾아왔다.”

    독일의 10월 혁명이 어이없이 무너지다

    오류는 독일 10월 혁명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것은 어느 정도 당연하다. 혁명의 파고가 높아질수록 기회주의적 오류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 오류와 객관적 임무 사이에는 더 큰 간극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공산당 지도자들은 과거 5년에 걸쳐서 1919년 스파르타쿠스 봉기, 1920년 카프반란 초기에 가졌던 기권주의, 1921년 3월 행동 등 일련의 ‘초좌익주의적’ 잘못을 저질렀다. 이런 잘못을 반성하면서 그들은 공동전선 등 올바른 행동을 해왔지만, 우익주의적 역편향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것은 혁명적 상황이 무르익을수록 더욱 더 커져서 혁명 자체를 삼켜버리는 무서운 질병으로까지 발전했다.

    독일 공산당 지도자들은 혁명에 대해 과감하고 단호하게 얘기하는 대신 무서움에 떨면서 얘기했다. 기술적 준비는 했지만 정치적 준비, 즉 대중선동, 노동자계급 대중과 계속 접촉하는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했다.

    이런 약점 때문에 자본가정부가 군대를 앞세워 도발했을 때, 독일 공산당은 10월 22일로 예정된 봉기를 취소하는 등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며 후퇴했다. 그 결과 독일혁명은 ‘유례없이 좋은 기회’를 놓치고 패배했다. 이것은 다시 러시아혁명을 위기의 늪에 더욱 깊이 빠뜨려 버렸다. 독일 10월 혁명은 러시아 10월 혁명을 구원할 역사적 임무를 맡고 있었지만, 어처구니없이 패배하면서 10월 혁명을 고립시키는 비극적 역할을 맡았다.

    독일 혁명이 패배하자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을 정점으로 지치고 병든 관료층이 더욱 고개를 치켜들었다. 레닌조차 죽자 관료층은 거칠 것이 없다는 듯이 본격적으로 행동에 나섰다. 트로츠키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광적으로 펼쳤다. 출세주의자들을 대거 당으로 끌어들여 자신들의 지지 기반으로 만들려고 ‘당원 배가 운동’을 벌였다. 갈수록 특권을 많이 누리던 관료들은 자신들이 소련 바깥의 상황에 휘말려 들어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끔찍이 두려워했다. 그래서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완성시킬 수 있다’는 황당한 ‘일국 사회주의’론을 퍼뜨렸다. ‘일국 사회주의론’은 간단히 말하자면 세계혁명 포기론이었다.

    1923년의 전환점

    1923년에 러시아 노동자권력과 제3인터내셔널은 함께 아슬아슬한 운명의 기로에 서 있었다. 러시아 노동자권력은 이미 레닌의 손을 떠나 있었다. 레닌은 중병으로 누워 있었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권력은 점차 모습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던 관료들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러시아 노동자계급과 수많은 노동해방 투사들이 1차 세계대전과 국내외 반혁명세력에 맞선 내전 속에서 엄청나게 죽어갔다. 산업시설은 대거 파괴됐다. 기근이 만연했다. 그래서 러시아 노동자권력을 위기에서 구출할 수 있는 주요한 힘은 당시에 외국혁명에, 특히 독일혁명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공산당 지도부의 성숙함과 정치적 능력에, 그리고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제3인터내셔널의 지도력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는가? 독일혁명의 뼈아픈 패배, 그에 뒤이은 러시아 관료제의 확대와 스탈린 부르주아 반혁명, 또 그에 뒤따르는 제3인터내셔널의 타락과 각국 공산당의 소련의 외교 도구화, 잇따른 혁명의 좌절들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과 그 뒤의 유럽혁명 물결, 반혁명으로부터의 러시아 노동자권력의 사수, 볼셰비키 당이 이끄는 제3인터내셔널과 각국 공산당 건설이라는 ‘혁명의 선순환’은 이제 ‘좌절과 반혁명의 악순환’에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1923년이 바로 그 전환점이었다.

    좌충우돌

    유능한 운전사가 없다면 차는 방향감각을 잃어 좌충우돌하고, 속도감각을 잃어 때로는 과속으로 질주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더디게 갈 것이다. 차는 여기저기 부딪혀서 찌그러뜨려지고 망가질 것이다. 곳곳에서 충돌사고를 일으켜 교통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을 것이다.

    ▲ (왼쪽부터) 스탈린, 리코프,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레닌과 트로츠키가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운전대를 잡았을 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가 밀려나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관료들이 운전대를 잡았을 때는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관료들은 레닌, 트로츠키 등 위대한 혁명가들에 비해 많이 무능력했다. 하지만 무능력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관료들이었기 때문에 세계 노동자계급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코민테른은 관료들이 점차 확고하게 장악해가고 있던 소련의 단순한 외교수단 정도로 전락해갔다. 그래서 코민테른은 관료들의 그때그때의 이해관계에 따라 좌우를 향해 번갈아가며 돌진하는 고장난 자동차처럼 돼버렸다. 이 점이 1923년 10월 독일혁명이 실패하고, 1924년 1월 레닌이 죽은 다음의 제3인터내셔널을 이해하는 데에서 가장 중요하다.

    1923년 10월 독일혁명이 비참하게 패배했지만, 지노비예프 중심의 코민테른 지도부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희생양을 만들어내기에 급급했다. 심지어는 독일에서 혁명적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이것은 트로츠키가 얘기했듯이 ‘혁명이 이미 등을 돌린 다음에, 그 등을 얼굴이라고 믿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관료적인 코민테른 지도부는 객관적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평가하지 못했으며, 미사여구나 허풍, 몽상으로 자신과 세상을 기만했다.

    1924년 12월에 힘이 약한 에스토니아 공산당은 성공을 몹시 원하는 지노비예프의 부추김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결과는 뻔했다. 봉기는 실패하고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1925년 4월 불가리아에서는 공산당이 대규모 테러를 저질렀다. 불가리아 공산당 군사조직은 불가리아 정부 관료들이 장례식 때문에 성당에 모여들었을 때 폭탄을 터뜨려 100명 이상을 죽이고 300명 넘게 부상시켰다. 이 일로 수백 명의 공산당원이 체포됐으며, 대다수가 처형당했다.

    좌익 모험주의가 이렇게 현실의 벽에 부딪히자 이제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우익 기회주의로 180도 돌변했다. 각국 공산당들의 ‘좌익’ 지도자들은 그들이 폭력적으로 임명됐던 것처럼 폭력적으로 축출됐다. 대신 ‘우익’ 지도자들이 그 자리에 심어졌다. 이런 조치들은 이후에 벌어지는 수많은 우익 기회주의 오류의 예고편이었다.

    1926년 영국 총파업이 패배하다

    보수당 정부가 들어서자 영국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공세를 다시 강화했다. 광산 자본가들이 먼저 싸움을 걸었다. 비록 쓰라린 패배를 겪은 바 있지만 광산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철도노조와 운수노조 역시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해서 전면 투쟁에 나서기로 했다. 이 세 노조뿐만 아니라 여러 부문의 노조들도 자본가들의 공세에 맞서 일전을 치르겠다는 의지를 모아나갔다.

    ▲ 1926년 영국 총파업

    1926년 5월 4일, 노총 지도자들이 총파업 명령을 내리지 않고 시간을 질질 끌고 있을 때, 인쇄노동자들이 먼저 파업에 돌입해 버렸다. 인쇄노동자들의 행동이 곧 총파업 명령이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여러 영역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그 규모는 2백 50만에 달했다.

    2백 50만 노동자들이 펼치는 투쟁의 위력은 대단했다. 총파업이라는 말 그대로 영국 사회는 완전 마비됐다. 1919-21년의 상황처럼 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거대한 힘을 드러내보였다.

    그런데 바로 이때 갑작스럽게 후퇴했다. 총파업 9일차인 1926년 5월 13일, 노총 지도부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어떤 설명도 하지 않은 채 파업중단 명령을 내렸다. 지도부의 터무니없는 배신에 분노한 광산노동자들이 6개월 동안이나 파업을 밀어갔으나, 노동운동 전체의 엄호를 받지 못해 결국 패배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거대한 총파업 물결이 갑작스럽게 패배의 물결로 바뀐 것인가? 이유는 무척 간단했다. 자본가 수상이 1926년 총파업을 ‘국가에 대한 정치적 도전’으로 공공연하게 규정했다. 처칠이 이끌던 자본가 언론은 이에 발맞춰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악을 썼다.

    노조 관료들은 자본주의 안에서 개량을 추구했을 뿐 노동해방은 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본가국가에 맞서 단호하게 싸우는 대신, 그 국가에 협조하는 길을 택했다. 협조를 위해 파업노동자들을 비롯해 광범위한 노동자들이 희생양으로 바쳐졌다.

    그렇다면 이때 영국 공산당은 무엇을 했는가? 공산당은 자본가 정부의 공세를 앞두고 좌파 노조 관료들의 수동성을 지속적으로 날카롭게 비판하고, 임박한 재앙을 경고해야 했다. 그리고 좌우 노조관료 모두에 맞서 독립적으로 평조합원들을 준비시키고 이들을 당의 영향력 아래로 묶어세우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그러나 공산당은 좌파 노조관료들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고 그들이 노조운동을 계속 통제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코민테른은 이들 직책 높은 파업파괴자들에게 비열하게 아양을 떨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권위를 이들에게 빌려주어 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이 결과 가증스러운 배신자들은 축출되지 않은 채 그대로 노조관료 지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영국 노동운동은 치명타를 입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물론 영국공산당 지도부에는 노조 관료들한테 적응한 기회주의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기회주의 노선을 일관되게 추구할 수 있게 보장한 것은 점차 타락의 길로 빠져들고 있던 코민테른과 소련 관료들이었다.

    1925~27년 중국 혁명이 비극적으로 무너지다

    스탈린이 이끈 코민테른은 세계사적 중요성을 갖는 1925~27년 중국혁명 또한 철저히 무너뜨렸다.

    중국 노동운동은 1925년 5·30운동을 시작으로 27년 봄에 최고조로 발전한다. 당시 중국 노동운동의 중심지였던 광주와 무한의 경우 파업위원회가 사법권까지 장악해 국민당 정부와 공존하는 노동자권력으로서 작동했다.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또한 높아 공장 안에서 당면한 정치문제를 열렬하게 토론하는 노동자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중국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해가던 노동자계급은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범죄적인 정책 때문에 순식간에 파괴당한다.

    ▲ 1927년 초 상해에서 행진하는 노동자들

    스탈린의 첫 번째 범죄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본가로부터 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사수해야 한다는 근본원칙을 무시한 채 국민당에 운동의 주도권을 내준 것이다. 스탈린은 자본가정당인 “국민당에 공산당원이 가입할 것”을 지시했다. 그 우두머리인 장개석을 “혁명군의 지도자”로 포장했다. 소련 안에서 기득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싶어서 관료들은 거대해 보이는 국민당과 협잡질을 한 것이다. 그 대가로 중국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충실한 손발이 될 것을 강요받았다.

    그런데 성장하는 노동자의 힘에 위기의식을 느낀 장개석은 27년 상해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반납할 것을 요구한 다음, 곧바로 노동자들을 대학살했다. 노동자들은 스탈린이 ‘지도자’로 떠받들라고 지시한 장개석에게 개죽음을 당했다.

    상해 대학살로 중국 노동자계급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 다행히도 기회는 아직 남아 있었다. 다른 곳에서 혁명의 기운은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국민당 우파인 장개석은 우리를 배신했지만, 국민당 좌파가 동맹자로 남아있다”며 계속 자본가 정당에 복종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자본가세력에 맞서 노동자계급이 정치적, 조직적, 물리적인 힘을 쓰지 못하도록 손발을 꽁꽁 묶는 조치였다. 국민당 좌파는 배신과 무자비한 노동자탄압으로 이에 응답했다.

    이렇게 되자 노동자들의 혁명적 열기는 썰물처럼 가라앉았다. 노동자투쟁의 썰물 속에서 혁명의 중심지는 반혁명의 중심지로 바뀌어 버렸다. 이때 스탈린주의 집단의 두 번째 범죄가 시작되었다. 스탈린은 잘못된 범죄적 정책에 대해 쏟아지는 비판을 덮어버리려고, 갑자기 ‘새로운 고양기’를 떠벌이며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이미 그 전의 대학살 속에서 대중의 투쟁열기는 완전히 가라앉고 있었다.

    결국 객관적 조건을 무시한 채 인위적으로 운동을 조작할 수는 없다는 교훈만을 남기고 광주 봉기는 처참히 분쇄되고 말았다. 중국 노동자계급의 마지막 남은 대중적 거점이었던 광주에서 극좌 모험주의 봉기가 처절히 박살나면서, 중국 노동자계급은 궤멸되고 말았다. 거대한 상처를 입은 중국 노동운동은 이후 20년 이상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대공황은 묻는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 세계대공황 시기 한 노동자 가족의 어머니

    1929년 10월 24일 미국의 주가가 거의 1/3로 폭락하면서 대공황이 세계를 덮쳤다. 미국과 독일노동자의 1/3, 영국노동자의 1/5이 일자리를 잃었다. 자신을 중산층으로 생각해 왔던 화이트칼라 노동자들도 길거리로 내몰렸다. 농산물 가격 폭락으로 농민들은 은행 빚 독촉에 어려움을 겪었다. 공황은 착취자 계급들에게도 큰 타격을 주어 전통 깊은 기업들도 쓰러뜨렸다. 모두들 파산의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대공황은 이른바 ‘IMF 위기’라는 한국공황 때보다 몇 배는 더 가혹하게 가난한 노동자 민중의 삶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굶주림과 질병, 가정 파괴와 도덕적 혼란이 그들을 덮쳤다. 이런 비참한 상태는 새로운 희망의 도화선이 될 수도, 절망에 찬 광기의 전조가 될 수도 있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1930년대는 희망과 절망이, 노동자혁명의 가능성과 파시즘 같은 반혁명이 격렬하게 투쟁하던 10년이었다. 1930년대에 세계 곳곳에서 노동해방 투사들은 공황이 초래한 상황에 맞서 가장 헌신적으로 싸웠다. 그 투쟁의 파고가 대단히 높았기에 1930년대는 종종 ‘붉은 10년’으로 불린다.

    하지만 결국 이런 격동의 붉은 10년은 소련의 스탈린 전체주의와 코민테른과 각국 공산당들의 타락, 변절, 파시즘 반혁명의 승리와 끔찍한 2차 세계대전으로 끝나고 말았다.

    히틀러의 집권 - 1930년대 최초의 대재앙

    1929년 세계대공황은 독일에 특히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실업이 꾸준히 늘어나 1933년 1월에는 실업자가 600만을 넘어섰다. 공식수치로만 그 정도였다. 실제로는 800~900만 임금노동자들이 실업 상태에 있었다. 노동자들은 근본적 해결책을 간절히 갈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 공산당은 “경제위기가 심해지고 있다. 소련은 놀랄 만큼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따위의 일반적 얘기만 늘어놓을 뿐 노동자들의 분노와 열망을 모아 투쟁으로 이끌 구체적인 요구들을 제기하지 않았다. 독일 공산당은 말은 많았지만 행동에서는 대단히 수동적이었다.

    1930년 9월에 선거가 실시됐다. 독일 공산당은 13.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독일 사민당은 29.8%에서 24.4%로 하락했다. 반면에 나치는 놀라운 성장을 해 1928년에 얻은 표보다 8배나 많은 640만표를 얻었다. 득표율도 18.3%나 됐다.

    그런데도 독일공산당 지도자들은 기뻐 날뛰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은 성공에 도취돼 나치의 커다란 진출을 가볍게 여겼다. 독일공산당 일간지는 “독일의 나치운동은 절정을 맞았다. 그러나 곧 몰락할 것이다.”라고 썼다. 그리고 “히틀러 다음은 우리다.”라고 썼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무지, 허풍 그리고 의회주의 백치병이 뒤섞인 것이었다.

    나치당은 단순히 선거용 당이 아니었고, 선거를 주된 목적으로 하는 당도 아니었다. 당 조직 핵심부에는 준군사집단인 전투원들(돌격대)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30년 말에 10만 명이던 그 수는 1932년 중반에 40만 명으로 늘어났다.

    거리를 장악하고 다른 모든 사회조직을 굴복시키기 위해 언제든 싸울 태세가 되어 있는 이런 무장력의 존재야말로 나치즘과 파시즘을 기존 자본가당으로부터 구별짓는 특징이었다. 금융 자본가 등이 공황과 극심한 사회혼란에 직면해 나치즘을 ‘자본주의 최후의 보루’, 즉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최후의 보루’로 받아들인 것도 이런 특징 때문이었다. 그런데 독일공산당 관료들은 사민당 관료들과 비슷하게 ‘나치가 집권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 집권하더라도 곧 우리에게 권좌를 넘길 수밖에 없다’는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던 것이다.

    ▲ 1933년 1월 30일 총통에 임명된 날, 열광하는 군중에게 답례하는 히틀러

    그래서 결국 히틀러가 1933년 1월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권력을 장악했다. 히틀러는 처음에 독일 공산당을 불법화했다. 기관지 발행을 중지시키고 1만 명의 당원을 집단수용소로 끌고 갔다. 그 다음에는 독일사민당을 불법화했다. 마지막으로 노조까지 불법화했다. 파시즘의 본질은 이렇게 모든 노동자조직을 완전히 절멸시키려 하는 것이다.

    히틀러의 집권 다음에 나타났던 것은 ‘우리(독일 공산당)의 차례’가 아니라 ‘우리의 파괴’였다. 노동자운동은 분쇄당하고 노동자계급은 원자화됐다.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한 때부터 1939년에 전쟁이 터질 때까지 22만 5천 명 가량이 정치범으로 징역형 선고를 받았다. 600만 명의 유대인이 집단 수용소에서 대량 학살당했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집권은 오스트리아의 돌푸스, 스페인의 프랑코 파시즘의 집권으로 이어졌고, 5,000만 명이 희생당한 2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다.

    파시즘을 막지 못한 것은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범죄적 무능력 때문이었다. 이런 무능력 때문에 결국 인류는 오래도록 소름끼치는 대재앙을 겪은 것이다. 트로츠키가 말했듯이 결국 “혁명 지도력의 위기” 때문에 끔찍한 “인류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1936년 프랑스 혁명이 좌절되다

    세계경제공황의 여파로 프랑스 경제도 불황에 빠져들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 프랑스 자본가들은 임금을 깎아내렸다. 자본가정부도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하고, 여전히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의 수입을 떨어뜨리는 정책을 펼쳤다. 한편 자본가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연루된 금융 스캔들이 계속 터져 나왔다. 그에 따라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분노는 더욱 깊어져 갔다. 공무원 노동자들이 항의시위를 하고, 농민들이 격렬한 대중투쟁을 벌였다.

    프랑스 공산당은 스탈린 반동 권력의 안정을 위한 도구가 되라고 주문받았다. 그것은 자본가 중도정당과 인민전선을 맺는 걸로 나타났다. 그러나 노동대중은 이 인민전선을 뛰어넘는 혁명적 가능성을 거듭 드러냈다. 이 인민전선이 1936년 5월 선거에서 압승했고 우익은 심각하게 패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가 일정수준 회복되자 자신감을 회복한 노동자들이 대거 파업과 공장점거에 돌입했다.

    ▲ 1936년 6월 13일, 파업에 나선 프랑스 건설 노동자들

    6월에만 600만이 넘는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 봄에 100만을 약간 웃도는 수준에 그쳤던 전체 조합원 숫자가 여름에는 500만을 넘는 수준으로 폭발적으로 늘었다.

    파업물결은 단순히 경제적 성격만을 띠지 않았다. 직장통제, 국유화 등 근본적 변화를 갈망하는 온갖 혁명적 요구들이 자생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진짜 ‘노동자들의 축제’였다. 과거에 싸운 적이 전혀 없는 미조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직장을 점거했다. 어떤 경우에는 실제 요구들이 작성되기 이전에 먼저 점거부터 했다.(한국에서도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이렇게 전개됐다.) 이제 혁명적 노동자당이 노동자투쟁을 노동해방을 향한 권력투쟁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러나 프랑스공산당은 더 이상 혁명정당이 아니었다.

    겁에 질린 자본가들은 입바른 약속만으로는 사태를 잠재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상당한 양보안을 제시했다. 몇 주 전만 해도 노조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자본가들은 10인 이상 작업장에서 노동자대표 선거, 대폭적인 임금인상 등을 즉시 실시하겠다고 했다. 곧바로 자본가정부도 2주의 유급휴가제, 주 40시간 노동제(당시로선 획기적인 성과였다) 법안을 국회로 보냈다. 국회는 유례없이 7일만에 신속하게 통과시켰다. 하지만 거세게 타오르는 노동자투쟁의 불길은 이 정도로는 쉽게 끌 수 없었다.

    노동자들 중에는 단지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휴가만을 바랐던 게 아니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회 전체를 바꾸고 싶어 했다. 그들은 파업을 계속 밀어붙였다. 이때 소방수로 나선 것이 바로 프랑스공산당이었다.

    1년 전만 해도 조그만 파업이 일어날 때마다 부적절하게 ‘혁명적 투쟁의 상승’을 얘기하고 ‘모든 곳에 소비에트를 건설하라!’고 외쳐댔던 프랑스공산당이 파업을 혁명으로 발전시켜야 할 때 오히려 끝장내 버렸다.

    ▲ 1936년의 트로츠키

    프랑스 공산당 당수는 “현재로서는 권력을 잡는 것이 불가능”하기에 업무에 복귀할 수밖에 없으며 “파업을 끝내는 법을 알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파업을 계속하는 것은 ‘트로츠키주의’이며 ‘트로츠키주의’는 파시스트의 앞잡이라고도 했다. 공산당을 가장 급진적인 좌파로 생각했던 전투적인 노동자들은 마지못해 철저한 약속이행을 전제로 업무 복귀에 동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프랑스 노동자계급은 노동자권력을 수립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자본가들이 자신감을 되찾아감에 따라 힘의 균형추는 노동자계급에서 자본가계급으로 급속히 기울었다. 인민전선 정부의 저울추는 이제 더욱 오른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프랑스공산당도 그랬다. 1936년 말에 프랑스공산당은 독일에 반대만 한다면, 인민전선을 우익 보수세력을 포함하는 프랑스 전선으로 바꾸자고까지 했다.

    프랑스공산당이 이런 식으로 자본가당들과 야합하자, 자본가정부는 노동자들이 협약을 통해 얻은 성과들을 조심스럽게 파먹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사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더 보수적인 자본가정부가 들어섰다. 그때마다 프랑스공산당은 일관되게 자본가정부 지지 입장을 밝혔다.

    그래서 노동자계급 운동은 완전히 후퇴했다. 사기저하가 널리 확산됐다. 조합원 수도 상당히 줄었다. 반면 히틀러는 계속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모든 곳에서 패배의 냄새가 났다. 결국 1939년 프랑스 공산당은 불법화됐다. 1940년 6월에 인민전선은 파시스트에 가까운 정권을 세우기로 결정하는 데까지 추락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인민전선은 노동자계급의 심장부에 비수를 꼽고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다.

    비극이 되풀이되다 - 스페인 혁명의 재앙

    스페인 혁명의 패배 스토리는 기본구조에서 프랑스 혁명의 그것과 같았다. 스탈린과 인민전선 전술이 스페인혁명을 무덤에 빠뜨렸던 것이다. 물론 구체적인 사태의 전개과정은 무척 다르지만 말이다.

    스페인 군주정은 1931년에야 비로소 무너졌다. 넓게 본다면 스페인혁명은 1931년부터 시작되어 6~7년간 계속됐다고 볼 수 있다. 1936년 2월 선거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했다. 이 인민전선에는 네 개의 자본가 정당과 사회당, 공산당 그리고 중도주의 정당인 맑스주의 통일노동자당이 참여했다. 인민전선의 선거강령에서는 노동자의 공장점거, 농민의 토지점거 등 진지한 사회적·경제적 요구들이 완전히 빠져 있었다. 인민전선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의 급진적 수호에 머물렀던 것이다.

    인민전선 정부는 매우 온건했다. 하지만 인민전선 정부의 집권은 노동자 파업, 농민의 토지점거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게 만들었다. 6월 10일에는 노동자들 100만 명이 파업을 했는데, 10일 뒤에는 파업 노동자들의 수가 50만으로 줄었다. 그러나 7월초에는 다시 100만으로 늘어났다. ‘법과 질서’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각료들과 사회당과 공산당이 이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상황은 혁명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7월 17일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것은 노동자,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대항하는 프랑코 군사 파시스트 세력의 반혁명 책동이었다. 군사 파시스트들은 단 몇 시간이면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겁에 질리고 혼란에 빠진 인민전선 정부는 그럴 여지를 줬다. 하지만 군부의 예상을 뒤엎은 것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대응이었다.

    전투적 노동자조직들은 총파업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노동자투사들은 소극적인 총파업에만 머물지 않고 병영을 장악하고 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기회만 닿으면 총을 들어 자생적 봉기로 군사쿠데타에 강하게 맞섰다. 노동자투사들이 동요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단호하게 싸운 곳에서는 거의 언제나 노동자들이 승리했다. 이 기세로 노동자봉기가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 1937년 바르셀로나의 노동자 민병대

    러시아, 독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스페인에서도 노동자봉기의 확산과 함께 이중권력이 형성됐다. 프랑코 군사 파시스트 세력이 매우 제한된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노동자민병대가 유일한 군대였고, 그곳에 설치된 노동자위원회가 행정기구 역할을 담당했다. 자본가 공화국 정부는 ‘실체’는 없고 ‘그림자’만 있을 뿐이었다.

    다음의 글이 그걸 잘 보여준다. “국경을 넘자마자 우리는 무장한 사람들한테서 정지 명령을 받는다. 그들은 누구인가?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민병대원들(즉 평상복을 입은 노동자들)이다. … 노동자위원회는 주변 마을 전체를 책임지고 그곳에서 완전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상적인 자치 기능을 담당하고 지역 민병대를 조직하고 무장시키며, 민병대에 식량을 공급하고 모든 지역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어 민병대에 숙박시설을 제공하는 것도 바로 위원회다.”

    간단히 말해 당시 상황은 1917년 3월의 러시아나 1918년 11월 독일 상황과 비슷했다. 그런데 자신들을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부른 스탈린주의자들은 이제 거꾸로 자본주의 공화정을 복원하는 일에 착수했다. 마치 1918년에 독일에서 사회민주당이 그랬듯이 말이다.

    프랑스 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스페인 공산당도 노동자혁명으로 나아가던 혁명의 물결을 뒤로 돌리기 위해 투쟁했다. 스페인공산당은 1934년에 당원이 1천 명일 정도로 매우 작았다. 하지만 노동자봉기의 확산과 함께 공산당의 영향력은 순식간에 커질 수 있었다. 당원 규모가 1934년 1천명에서 1937년 6월에 11만 7천명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하지만 이 늘어난 당원들 중에는 기술자들, 상인들, 지주들, 소작농들, 소규모 제조업자들 등 소자산가들의 이해를 적극 대변하는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렇게 코민테른의 통제를 받고 있었고, 자국 소자산가들의 이해를 적극 대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공산당은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넘어 노동자혁명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통제했다.

    공산당 관료들은 스탈린과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아 ‘노동자들이 사회혁명을 시도하면 공화파 안에서 제2의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에 재갈을 물렸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에 반대해 자본가 장관들을 지지했다. 그리고 인민전선 정부의 경찰들이 맑스주의 통일노동자당, 무정부적 조합주의 좌파 등을 탄압하고 죽이는 것도 묵인했다. 그렇게 해야 ‘노동자들이 사회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군대에서는 장교들이 다시 지배권을 회복했고, 민병대는 정규군에 흡수되거나 해체됐으며 경찰조직이 대거 부활했다. 이렇게 해서 1936년 혁명의 성과들이 점차 사라져갔다. 이처럼 인민전선이 노동자혁명을 목 졸라 죽였다.

    그러자 프랑코 파시스트세력이 공화국을 패퇴시켰다. 프랑코는 1939년 3월에 승리를 거두고 박정희 18년 독재보다 훨씬 긴 30년 장기 군사독재를 실시했다. 이 기간 동안 약 50만 명이 처형당했다. 20년이 넘게 사회주의는 물론이고 자유주의 이념조차 표현할 수 없었다.

    스탈린과 히틀러가 손잡다

    ▲ 히틀러와 스탈린

    1939년 8월에 스탈린은 그의 대외정책을 180도 바꾸었다. 영국 및 프랑스와 맺은 군사동맹이 실질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에 실망한 스탈린은 8월 23일에 히틀러와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골자는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고 소련이 발트해 연안 국가들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병합하고 다가올 전쟁에서 소련이 중립적 태도를 취할 것을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에 2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9월 1일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9월 3일에 독일은 영국 및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나찌와 맺은 조약을 충실히 지켰다. 9월 17일에 소련군은 국경을 넘어 폴란드에 입성해 스탈린 몫의 전리품을 챙겼다.

    영국 공산당과 프랑스 공산당은 히틀러-스탈린 조약을 ‘위대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평화정책의 승리’라고 환영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터지자 그들은 자국 자본가 정부를 지지했다. 제2인터내셔널이 1차 세계대전 때 보였던 조국방위주의가 더 볼품없는 형태로 코민테른 안에서 등장했다. 스탈린주의 소련 공산당이 자국(소련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해 국제주의를 오래전에 내팽개친 마당에, 영국공산당, 프랑스공산당이 그걸 따라간 것은 자연스런 것이었다.

    결국 코민테른은 빈껍데기만 남았다. 그래서 스탈린은 1943년 5월 그 껍데기 코민테른을 해체시켰다.

    올바른 혁명전통만 계승 발전시키자

    87년 노동자 대투쟁 속에서 탄생하고 노동해방 학습을 통해 단련된 과거의 ‘선진노동자’와 대기업노조와 개량정당의 관료일 뿐인 무늬만의 ‘선진노동자’는 완전히 다르다. 둘을 날카롭게 구별하지 못하면 아주 우스꽝스러워진다.

    과거의 영웅적인 모습만 주목하고 현재의 배신적인 모습을 간과하면 관료를 여전히 영웅으로 떠받들게 된다. 반대로 현재의 배신적인 모습에 대한 커다란 염증은 과거의 선진노동자운동 자체를 깡끄리 부정해버릴 수도 있다.

    이 문제가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에 대해서도 나타난다. 10월 혁명과 그 뒤를 잇는 세계혁명의 물결 속에서 탄생한 초기의 제3인터내셔널과 스탈린 반동권력의 외교기구로 전락한 후기의 제3인터내셔널을 엄밀히 구분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우리는 현재 관료주의에 찌든 대기업 민주노조운동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87년 대투쟁과 그 직후의 전투적 대기업 노조운동에서 많은 것을 적극 배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혁명적 맑스주의의 전통을 올곧게 계승했고, 노동해방 운동의 보물창고 역할을 하는 초기의 제3인터내셔널을 깊이 있게 검토해 완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초기의 제3인터내셔널은 급격한 고양기와 퇴조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왜 어떤 혁명은 성공하는 반면 다른 혁명은 실패하는지, 노동해방 운동에서 부딪치는 장벽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노동해방 투사들이 얼마나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을 갖고 활동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대단히 풍부한 교훈을 준다.

    “혁명 전통이 없는 운동은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와 같다.” 따라서 우리는 제3인터내셔널 초기의 혁명전통을 되살려내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미래는 노동자계급 운동의 한가운데에서 진정한 혁명전통을 이어가려는 노동자투사들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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