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노동자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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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노선 : 1호_<우리의 입장> 해설 (1부)
| 2008·02·21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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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의 입장

    <우리의 입장> 해설 (1부)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핵심 사상을

    논쟁적으로 밝힌다!



    최영익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충분히 완성된 ‘최대강령’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명백히 이것은 약점이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이후 명실상부한 최대강령을 제출할 수 있는 시점을 앞당기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본적인 정치적 좌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좌표 없는 정치조직이란 상상할 수 없다. 그런 조직은 무늬만 정치조직일 것이다. 최대강령 제출 시점까지 우리의 정치활동을 이끌고, 우리의 실천을 일차적으로 규정할 정치노선을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우리의 입장>으로 분명하게 제출하고 있다.

    연합이 공식 출범하고, 정치적 실천 과정을 축적하면서 지속적으로 정교화되고 완성되어, 이후 최대강령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과도적 강령’임에도 우리가 대담하게 <우리의 입장>을 공개한 이유가 있다고 본인은 믿는다. 우선은 우리 스스로 정치적 좌표를 분명히 세우고, 바로 이 정치적 좌표에 입각해 모든 성원들의 정치활동을 체계화시킬 절대적인 필요성을 거론할 수 있다. 다음으론 “명확한 정치적 입장의 공개적 천명의 부재”가 최근 몇 년간 한국 노동자 정치운동의 좌익들을 규정하는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 어떻게 보자면 가장 결정적인 약점이었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각각의 정치조직이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하는 것은 몇 가지 중요한 효과를 보장할 수 있었다.

    첫째 정치조직에 속한 성원들 개개인의 실천에 대한 이러저러한 지엽적 평가―대개 개별 활동에 대한 평가일 뿐 정치적 실천에 대한 평가가 아니었던 바로 그러한 평가―를 뛰어넘어 각각의 정치조직이 천명한 정치적 입장에 기초한 정치적 검증과 평가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이것은 정치조직들로 하여금 정치적 긴장감과 책임감을 갖도록 강제했을 것이다.

    둘째 ‘공개성의 잣대’는 각각의 조직 운영에서도 조합주의적 편향을 뛰어넘어 정치적 운동가로 성원들을 조직하고 정치적 규율을 부여하는 소중한 효과를 낳았을 것이다.

    셋째 각각의 정치조직의 공식 입장을 근거로 하는, 정치적인 공개 논쟁의 확대는 각각의 정치조직의 정치적 발전, 정치조직들 사이의 정치적 노선에 근거한 결합 및 구별 정립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선진노동자 투사들의 정치적 발전을 추동하면서, 이들을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도자로 성장시키는 데 중요한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나아가서 바로 이들 선진노동자 투사들의 경험과 본능, 계급적 직관은 무엇이 노동자계급의 노선인지를 판별하는 데서 소중한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

    불행하게도 “명확한 정치적 입장의 공개적 천명"은 사실 없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우리 운동은 비참한 상황에 머물러 왔다. 민주노동당을 엄청나게 비판해왔지만, 그 비판은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명확한 정치노선으로 대당하는 방식으로 치밀하게 수행되지 못했다. 이런 불행한 상황이 발생하게 된 데는 몇 가지 사정이 영향을 미쳤다.

    우선 2000년을 전후로 하여, 공개적인 활동 영역에 막 들어선 혁명적 조직들은 과거의 비공개적 활동 방식을 즉각 넘어설 수가 없었다. 다음으론 개량주의에 맞서고자 했지만, 혁명적 노선을 아직 충분히 정립하지 못한 불완전한 상태가 정치적 입장을 공개하는 데 발목을 붙잡았다. 게다가 혁명성을 견지하고자 했던, 민주노동당 바깥의 좌파들은 역량의 부족 때문에 정치활동을 본격화하지 못한 채 민주노동당에 사실상 압도당해버렸다. 이것은 그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상대적으로 적은 역량으로도 기반을 내릴 수 있었던 노동조합운동의 영역, 그것도 몇몇 사업장의 노동조합운동 영역 뒤로 숨어버리도록 밀어붙였다. ‘강요된 추방’은 이들에게 조합주의적 습성들과 분위기들을 불어넣었고, 이것은 ‘정치활동 경시’라는 질병을 만들어냈다.

    이상의 요인들이 얽히고 섞여 가장 분명하고도 엄격한 정치노선에 입각해 활동을 펼쳐야 하는 혁명적 조직들, 특히 사회주의 혁명 조직들은 정치적 무능력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최근 7~8년간 형성되었던 정치적 자유의 비옥한 토양들을 혁명적 조직들이 전혀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비극적 상황이 발생했다. 음습한 지하에서 뛰쳐나와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대지 위에서 살아 움직여야 할 혁명적 사회주의의 위대한 노선과 사상이 과거와 똑같이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했다.

    이제는 판도라의 상자를 대담하게 열어야만 한다. 그래서 공개성이라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면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가 정치그룹들 속에서, 선진 노동자 투사들 속에서, 노동자계급 속에서 살아 약동하면서 미래를 인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모든 동지들이 <우리의 입장>이나 <대중행동강령>을 작성하고 치열하게 토론하면서, 그와 같은 필요성을 완벽하게 공유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본인의 생각에는 그런 정치적 책임감과 결단이 밑바탕에 깔리고 사실상 공유되지 않았다면,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우리의 입장>, <대중행동강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그 점에서 나는 명료한 강령의 수준은 비록 아닐지라도 <우리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제출한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시도는 정당하고 옳았다고 확신한다.


    노동자의 힘 - 정치적 모호함으로 점철되다!


    이것은 도전적이고 공격적 방식으로 말하자면, 노동자의 힘이 줄곧 견지해왔던 정치적 모호함이 가진 약점과 비교할 때 더욱 주목할 만하다. 가장 먼저 노동계급 정치조직의 깃발을 공개적으로 들었던 조직이 노동자의 힘임에도, 노동자의 힘은 아직까지 명료한 정치강령을 한 번도 제출한 바가 없다.

    노동자의 힘 소개란에 실린 노동자의 힘의 입장을 보자면, “강령은 항상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계급투쟁 그 자체로부터 나와야 하며, 계급투쟁에 대한 개입을 통해서 실질적인 무기로 전화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강령 건설 작업은 계급투쟁의 현실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개입이라는 정치적 실천 그 자체로부터 시작”되며, “강령 건설의 궁극적 주체는 노동자 계급 그 자신의 투쟁이라는 점을 승인”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령은 정치적 조직 내부의 자족적 정치행위로 제한되어서는 안 되며”, “항상 노동자계급의 투쟁에 대한 정치적 개입을 통해서 획득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다시 검증되고 교정을 받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럴싸한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이 주장에는 자신의 정치 강령을 공개적으로 제시하고, 이것을 실천 속에서 검증받고자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강령의 공개적 제시를 제외하고는 “검증되고 교정받는 길”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강령을 제시하는 행위는 ‘정치적 조직 내부의 자족적 정치행위’가 아니다. 강령의 공개적 제시를 통해서 정치조직은 비로소 자족적이고 무정형한 수준을 뛰어넘어 ‘외부’와 소통하고 논쟁할 수 있으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검증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계급투쟁에 대한 개입”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진행되었음에도 노동자의 힘이 이 개입으로부터 획득하여 공개적으로 제출하는 ‘강령’에 대해 우리는 지금껏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 조직의 공식적인 정치적 입장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에 비판하며 논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길 자체가 봉쇄된 폐쇄적 조직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거의 대부분의 조직들이 바로 노동자의 힘을 거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공개적인 무대가 열리면서 이미 거의 대부분의 혁명적 정치조직들이 “사회주의”라는 깃발을 공공연하게 들고 있다. 민주노동당마저 비록 그 진정성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 ‘사회주의적 지향’을 당 강령에서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의 힘은 자신을 소개하는 입장에서 사회주의라는 명확한 규정을 극도로 피하고 있다. 몇 년째 바뀌지 않는 노동자의 힘 소개란은 “끝으로 본 ‘노동자의 힘’이 현재 수준에서 갖고 있는 정치 원칙을 밝히고자 합니다. 1)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 건설을 위해 투쟁한다. 우리는 자본의 신자유주의적인 공세에 맞선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투쟁과 민주적 권리수호투쟁과 함께 해 나가면서,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 건설”(?) 이것은 가장 평범한 노동조합이라도, 가장 낮은 수준의 현장조직일지라도 천명하고 있는 기본적 지향이다. 그런데 정치조직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을 뛰어넘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노동대중의 본능적 지향에 대해 “혁명적 사회주의”가 바로 그것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정치적으로 안내해주지 않는다면 과연 정치조직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최소한 그 점에 대해서는 아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오직 노동자계급의 세계적인 사회주의 체제 건설만이 현재 막다른 골목에 직면한 자본주의가 낳는 참화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다. 사회주의 사회는 개인 혹은 주식회사제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생산수단과 교환수단에 대한 자본가 소유를 대신하여 사회적 공동소유를 도입함으로써, 그리고 자본가들의 무정부적 생산을 대체하여 사회 전체에 의한 계획적 생산을 도입함으로써, 나아가 이러한 계획 경제를 생산자들 스스로가 민주적으로 결정하고 수평적으로 협동하는 자주관리 생산과정과 전면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함께 사회의 모든 계급들을 철폐하고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불평등을 폐지한다. 그리고 생산력 발전의 모든 결과들을 전체 사회구성원들의 완전한 복지와 전면적인 발전을 보장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만든다. (중략)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착취자들의 모든 저항을 제압하기 위해 자본가 권력을 철폐하고 노동자 권력을 수립하는 것이다. 이 노동자 권력의 힘을 바탕으로 모든 형태의 착취와 억압을 철폐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은 국가를 소멸시키고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공동체를 향한 최종적인 목표를 향해 진군한다.


    1) 공장과 사무실, 각 지역에서 선출되는 노동자와 여타 피착취 근로인민들의 대표자 기관을 국가의 최고 권력으로 세운다. 입법․사법․행정의 모든 권력이 이 기관으로 단일하게 통합된다. 이 기관은 법을 제정할 뿐만 아니라 재판관을 포함한 모든 공무원들을 직접 선출하며, 그들을 언제든지 소환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중략)

    3) 경찰과 상비군은 폐지하며, 이를 노동자와 인민의 민병대로 대체한다. 이 민병대는 성에 구별없이 17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사람들이 의무적으로 참여하여 구성되며, 이들이 군사훈련이나 순찰, 간호, 노인부양 등의 공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데 종사한 시간은 노동시간으로 계산되어 국가로부터 임금을 지급받는다. 민병대 내에서는 어떠한 계급제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휘관은 민병대원들에 의해 선출되며 그들에 의해 언제든지 소환된다. (중략)

    5) 공장, 광산, 선박, 병원을 비롯한 자본가 소유의 모든 생산수단과 은행, 보험회사, 증권사, 백화점을 비롯한 자본가 소유의 모든 교환수단을 “사회의 공동재산으로 전환”시킨다. 모든 토지를 국유화한다.


    이 입장은 노동자의 힘이 그토록 희망하는 “계급투쟁의 현실과 그것에 대한 개입이라는 정치적 실천”과 분리된 강령 놀음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위에 인용된 혁명적 사회주의의 강령은 세계 노동자계급이 몇 백 년에 걸쳐 전개해 온 자기해방 투쟁의 과정에서 과학적으로 검증하고 실천적으로 체득한 확고한 노선일 뿐만 아니라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일 같이 목도하고 있는 계급투쟁의 현실들, 매일 같이 제기되는 노동자 생존의 문제가 보여주는 단 하나의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완벽한가? 그 세부적 지점들, 그리고 이 혁명적 사회주의의 근본 과업들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중간 항들의 확정이라는 점에서는 결코 완벽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본 과업들의 완수 없이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말할 수 없다는 점, 이러한 목적에 대한 승인 없이는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에 포함할 수 없다는 점 또한 대단히 분명하다. 이러한 근본 과업들을 자신의 정치적 노선으로 명확하게 천명하지 않은 채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 건설”이라는 하나마나한 모호한 선언 뒤에 숨어버릴 때, 여기서는 정치적 입장을 거론하고 동지적으로 소통할 여지조차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모호한 선언으로는 개량주의, 심지어는 사민주의와 같은 노골적 기회주의자들의 입장과도 구별지을 수 없지 않은가?

    <우리의 입장>에 천명된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노선은 그것과는 정반대의 정신을 대변한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모호함 뒤에 숨지 않고, 정치조직답게 솔직하게 우리의 정치노선―다름 아닌 혁명적 사회주의―을 공식적으로 천명할 것이다. 그것이 몇 백 년에 걸친 노동자의 계급투쟁 경험을 반영하는 정치적 결론이며, ‘정치적 자족주의’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자 계급투쟁을 통해 검증받을 수 있는 유일하게 진지한 정치적 태도라 믿기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들 사이의 논쟁과 소통의 길을 개척할 것이며, 실천적 검증을 덧붙여서 하나의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으로 결집하는 길을 열어나갈 것이다.

    나는 그 점에서 노동운동 내 좌파 세력 중에서 가장 수적으로 많고 역사적 전통이 오래되었으며 정치조직의 깃발을 공개적으로 가장 먼저 든 노동자의 힘이 민주노동당과 같은 개량주의 세력이 득세하도록 방조한 결정적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민주노동당 바깥의 전투적 좌파 세력을 정치적으로 결집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노동자의 힘이 몇 년에 걸쳐 보여주었던 정치적 무기력성과 후진성,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하게 천명하기를 꺼려하는 극도의 정치적 비겁성이 민주노동당의 주도권을 허용했던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라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현재의 노동자의 힘을 중심으로 하는 혁명적, 노동계급적 좌파 세력의 정치적 결집에 전혀 찬성하지 않는다.

    노동자의 힘에게는 민주노동당에 대당하는 혁명적 노동자 정치세력이 결집하는 데 주도 세력으로, 심지어는 주체로 나설 자격이 현재로는 없다. 그 대신 노동자의 힘은 스스로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공개적으로 명확히 밝히는 데 우선 힘을 쏟아야 한다. 만약 조직적으로 정리된 입장이 없다면 지금부터라도 내부 토론과 논쟁을 통해 그것을 정리해내는 작업에 우선 나서야 한다. 그 입장이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이 갖추어야만 하는, 최소한의 필수적 조건을 충족시킨 이후에서야 비로소 노동자의 힘과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이의 소통과 논쟁, 토론, 정치적 협력의 길―혁명적 사회주의 조직들 사이의 협력의 길―이 옳게 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지금처럼 이러한 정치적 자기 정리의 과정을 회피하고 “노동계급정당” 또는 “계급투쟁 속에서의 강령 작성” 같은 공문구 뒤로 숨어버릴 때, 아마도 노동자의 힘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다. 노동계급정당 건설이란 추상적 선언 뒤에 숨어서, 이 노동계급정당을 구성하는 핵심적 정치 항목들에 대해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천명하기를 꺼리며 단지 이후의 논의로 돌려버릴 때, 게다가 스스로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구체적 강령으로 밝히지도 못할 때,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조직으로서는 고사하고, 정치조직으로서의 미래도 결코 없을 것이다.


    근본 노선


    모든 정치세력 앞에 던져지는 근본 문제는 어떤 계급을 반영하는가이다. <우리의 입장>이 지지하는 정당이란 바로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혁명적 정당이다. ‘노동자계급 혁명정당’은 우리가 지향하고 그것에 복무하며 그 일부가 되고자 하는 미래의 정당의 근본 정체성이다. 이 당은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기 위한 역사적 도구, 그러나 사활적이고도 중차대한 근본 도구이다. 당은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하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계급 자신의 해방과 함께 인류의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는 데서 ‘길잡이’, ‘안내자’이다.

    오직 노동자계급 다수의 의식과 의지, 결단, 경험, 조직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사회주의 과업을 당이 ‘대신’해서 수행할 수는 없다. 게다가 모든 혁명은 단지 사회구조를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의 전제조건이자 그것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인간의 능동적 의지’를 대표하는 혁명계급 자신이 과거 사회가 자신의 몸속에 심어놓은 낡은 오물을 뱉어내고 새로운 주체로 재탄생하는 역사적 과정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입장>이 모든 대리주의와 완벽하게 단절하고 있는 이유다. 사실 ‘대리주의’란 부르주아 의회주의, 개량주의 의회정당,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비롯한 부르주아적, 소부르주아적 경향의 표현이자, 그 경향들이 생명을 부지하는 요인일 뿐이다. 이에 반해 <우리의 입장>이 지지하는 정당의 상은 노동자대중이 계급의식을 획득하도록 돕는 역사적 도구이며, 그 계급의식을 혁명적 행동으로 물질화시키는 작업에서 최선두에 서서 실천하는 중핵 조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리주의에 대한 반대를 기계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흔히 제기되는 “당의 지배인가, 노동자계급의 지배인가?”라는 물음은 가장 쉽게 발견되는 사례다. 만약 진실로 노동계급적인 당이라면 이 당의 지도력이 노동자 권력과 대립될 이유가 전혀 없다. 예컨대 당의 적극적 지도의 결과, 소비에트와 같은 노동자계급의 권력이 노동자대중을 대표하고 그들의 사회 지배의 토대로 작동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과정이 스탈린주의 정당과 같은 억압적이고도 관료적인 방식(게다가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임무 실현과 대립되는 방식)이 아니라 진정 노동계급적인 방식(노동자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이뤄진다면, 노동자계급의 지배가 당의 영향력 확대와 충돌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이는 어떤 지도자의 ‘지도력’이 완전하다는 것이 그가 그 조직과 충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조직의 발전에서 필수적 요소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르주아 정당의 지배도 그 점을 보여준다. 부르주아 정당의 지배가 자본가계급 전체의 지배와 충돌하는 경우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적 경험은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과제를 가장 분명하게 정식화시키고 있는’ 노동계급 혁명정당의 지도력과 주도권 없이는 ‘노동자계급 지배’에 도달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계급 해방정당이 스탈린주의 정당, 개량주의 정당, 부르주아 정당들과 구분되는 것은 “이 당이 대변하고 있는 정치의 계급적 성격”, “계급과 관계 맺는 데서 이 당이 의지하는 지도력의 ‘자발적’ 성격”, “당의 정치활동의 근본이 계급과 당 사이의 간극을 넓히는 것이냐 아니면 그것을 좁혀나가면서 최종적으로 당을 폐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냐”에 달려 있다.

    스탈린주의 정당의 독재는 ‘노동자계급의 독재’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에 대한 독재’이며, 그 당의 지도방식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포통제와 군사적 억압에 의지하고 있다. 반면 노동계급 혁명정당의 영향력은 ‘노동자계급의 지배’를 향하며, 이 당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동의와 의식, 자발성에만 의지해서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당은 “우리가 전위 정당이고 노동계급당이므로 우리 당의 지도력을 승인하라!”고 노동자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이 당은 “우리는 노동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정치적으로 대변하고 행동으로 실현하려 최선을 다하는 당이다. 만약 우리가 옳고 진정 노동운동의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의 당이라면 지지해 달라. 그러나 우리는 강요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경험과 관찰, 시험을 통해 우리가 맞는지 틀린지, 신뢰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해야만 한다”라고 말한다. 이 당은 “우리는 결코 완전하지 않다. 여러 오류와 한계가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이것들을 노동대중과의 소통과 실천을 통해서 극복해나갈 것이다. 틀렸다면 비판하고, 올바른 길을 안내해 달라. 다만 우리는 오류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방향에서 노동계급에게 무한히 충실할 것이며 그 점에서 기본적으로 올바를 것이다”라고 말할 뿐이다.

    이상이 <우리의 입장>이 추구하는 노동계급 혁명정당이 노동계급과 맺는 관계의 핵심이며,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이러한 관계의 원칙을 조직의 모든 실천에서 일관되게 적용하기 위해 분투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입장>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연합이 지향하는 노동자계급 정당은 관료적이고 기계적인 지도를 추구하는 정당이 아니다. 당이 권위를 강요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지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당 창건에 선행하는 시기에 대해서건, 그것에 뒤따르는 시기에 대해서건,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의 시기에 대해서건 결코 옳지 않다.

    노동자계급을 선두에서 이끄는 능력은 사회주의자 조직이 자신을 노동자계급의 지도적 기관이라고 “선포”함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 능력은 우선 노동자계급의 한 부분으로서 노동자계급의 모든 부문과 자신을 긴밀히 연결시키고, ‘계급투쟁의 객관적 조건’에 의해 요구되고 지시되는 방향으로 노동대중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조직하는 데 “실제로” 성공함으로써만 획득되고 증명될 수 있다. 다음으로 노동자운동을 노동자가 해방되는 사회의 실현을 향해 일관되게 밀어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오직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에만, 연합은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부분의 지지를 끌어내면서 노동자계급 정당 창건을 현실화시키는 의미 있는 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중주의와의 단절


    노동계급정당이란 규정은 핵심적 지점에서 구체화에 성공해야만 비로소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두 가지 측면이 가장 우선적으로 거론될 수 있다. 하나는 정치적 노선과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조직적 노선과 관련되어 있다.

    우선 정치적 노선을 점검하자면,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사상인데, 이는 “권력의 문제”로까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입장>은 노동자계급의 당파적 입장을 수호하는 데 전적으로 헌신한다. <우리의 입장>은 노동자․학생․농민 사이의 동맹이라는 3자 동맹론, 또는 모호한 “민중의 이해”를 거부한다. 학생과 농민은 결코 단일한 계급이 아니다. 학생에는 경영자, 정부 고위 관리, 검판사, 병원장, 어용 지식인 등 자본가계급으로 편입되는 인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중간 관리자, 회계사, 약사, 고수입 전문직, 기자 등 중간계급으로 편입되는 인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오직 학생 가운데 일부만이 노동계급으로 편입되거나 노동계급을 지지하고 노동운동에 헌신하는 노동계급 지식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농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농민들 중에서는 가령 한농련과 같은 농민단체에 속한 농업 자본가들이 있다. 이들은 민족농업 사수라는 이름으로 사실 자신의 농업자본 이해를 수호하려 하는데, 이들은 정기적․부정기적으로 농업 노동자들을 수탈함으로써 이윤을 획득하는 자본가들이다. 스스로 노동에 종사하지만, 수입의 상당 부분을 농업 노동자들이나 빈농들을 고용해서 착취하는 데 의존하는 부농층도 존재한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이 맞서 투쟁해야 할 적대 계급이다.

    노동자계급은 우선 농업 노동자들의 이해―가령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 근로기준법의 적용, 고용안정 쟁취, 생산협동조합 건설 등―를 대변하는 데 전적으로 헌신한다. 이들은 노동자계급의 한 부분이다. 다음으로 노동자계급은 작은 농지를 가지고 생산에 종사하지만, 일년 중 상당 기간을 농업 자본가나 부농의 농장에서 일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서 생존하는 빈농(半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하며, 이들에게 노동자계급의 입장―노동자 권력 수립과 이 권력에 의한 농업의 집단적 소유와 생산 체제로의 전환―을 지지하고 채택할 것을 요청한다. 이 양자 사이에서 동요하는 중농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정책은 그들을 획득할 수는 없되 그들의 동요성을 마비시키고 중립화시키는 데 맞춰진다.

    이른바 민중민주주의 경향, 그리고 이러한 모호한 민중주의를 아직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한 세력들은 ‘노동자 민중의 권력’ 또는 ‘민중 권력’ 수립을 제기한다. 반면 <우리의 입장>은 오직 노동자 권력,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이해만을 전적으로 대변한다. 만약 노동자계급 이외의 민중들이 합류하는 권력이라면,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입장을 지지하고 노동자권력을 지지하는 민중들을 노동자계급이 동맹자로 받아들인다는 측면에서만 그러하다. 이것은 ‘민중의 지지를 끌어내되’, 우선 “민중의 범위”를 모호하게 하지 않고 계급적으로 명확히 한다는 점을 전제하며, 다음으로는 “노동자계급의 헤게모니” 즉 “사회주의적 헤게모니”를 철저히 고수한다는 점을 전제하는 것이다. <우리의 입장>은 이러한 노동자계급의 당파적 사상을 다음으로 요약한다.


    연합은 자본주의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오직 “혁명적 사회주의”일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한다. 만약 이 혁명이 ‘민중’의 혁명일 수 있다면,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동화된 여타의 피억압 인민들이 노동자계급과 노동자 권력을 지지하여 노동자 혁명에 참여한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여타의 피억압 인민들을 이 혁명에 참여시키는 경우에도 그들이 노동자계급의 입장에 서는 경우에만 그들을 노동자계급의 동맹군으로 받아들이며, 아울러 그들이 불가피하게 보여줄 동요와 일탈에 맞서 사회주의적이고 국제주의적이며 혁명적인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일관되게 수호할 것이다.


    <우리의 입장>에 대해 흔히 제기되는 비판 가운데 하나는 <우리의 입장>이 “여성, 장애인, 환경” 등의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 장애인, 환경”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혁명적 사회주의는 무관심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우리의 입장>은 상당히 부족하며, 사실 그와 같은 지점들에 대해서 <우리의 입장>은 거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당장 보완하지 않고, 최소한의 요구들에만 한정한 것은 솔직히 말하건대 충분한 연구 검토가 부족하며 그 분야에서의 실천 경험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에서 섣부른 제기는 옳지 않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후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연구와 실천 경험을 바탕으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다음의 점 또한 분명히 하는 것이 <우리의 입장>에 녹아 있는 정신을 독자들이 이해하는 데서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우리는 ‘무지개 동맹’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치환하려는 경향에 대해 반대한다. “노동운동, 생태 환경운동, 여성운동, 장애인운동” 등의 제 부문운동의 종합으로서의 사회주의 운동 노선은 “노동계급정당으로서의 사회주의 정당의 근본 노선”을 침해하는 것이다. ‘부문운동의 종합’이 결코 아니다. 비록 자동적인 방식은 결코 아니며, 또한 노동계급운동의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는 그 문제들을 배제할 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해방운동”을 통해서만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여성과 장애인에 부가된 억압의 구조들까지 완전히 철폐할 수 있다.

    둘째, 이처럼 노동자계급의 당파적 관점을 우선시하는 것은 ‘여성운동과 장애인운동’이 범할 수 있는 몰계급성을 경계하며, 사실 ‘노동계급운동’과 분리된 ‘여성, 장애인 해방’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령 여성운동에도 계급적 분화가 존재한다. 부르주아 남성들과 대등하게 경쟁할 수 있는 조건을 꿈꾸는 부르주아 여성들의 운동은 이 범위 바깥을 넘어서면 노동계급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또한 부르주아 여성들의 운동은 “여성 대 남성”이라는 성적 대립 구도를 상정함으로써 분열을 조장하는데, 이러한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영향력에 빨려들면 노동자계급의 분열이 확대된다. 이것은 자본가계급의 이해에 부응하는 것인데, 바로 여기서도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계급적 실체가 묻어난다.

    반면 노동계급 여성들의 해방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이들은 우선적으로 자본가계급의 억압에 신음하고 있다. 남성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사이의 차별이란 사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분할하고 저항과 분노를 엉뚱한 곳으로 돌리기 위해 일부러 조장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노동자계급 단결의 요구는 응당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고, 그럼으로써 자본가계급에 맞선 일치단결을 강화하는 데 맞춰진다.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적 태도를 취하는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에 대한 억압 이전에 ‘노동자계급의 분열’이란 관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또한 다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남성과 대등한 권리를 확보하고, 당당한 주체적 인간으로 평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서, 여성 노동자들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사회적 일자리’다. 일자리를 갖지 못한 채 가사노동에 결박당한 여성의 처지에서 ‘주체성과 독립성, 남성과의 평등’을 말하는 것은 사치다. ‘모든 형태의 해고 금지 및 모든 이에게 사회적 일자리 제공’이라는 노동자계급운동의 요구는 무엇보다도 여성들 자신을 위한 요구다.

    장애인 문제도 마찬가지다. 장애인에도 여러 부류가 있다. 자본가 장애인도 있고, 노동자 장애인도 있다. 또한 노동자 장애인의 요구와 자본가 또는 중간계급 장애인의 요구는 상당히 다르다. 노동자 장애인들에게 가장 절박한 요구는 ‘장애인 이동권’이 아니다. 가장 절박한 것은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는 일자리’인데, 이것은 자본가계급이 끔찍이도 싫어하고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 이것은 모든 사회구성원들에게 스스로를 부양할 수 있고 착취당하지 않는 노동의 권리를 부여하고자 하는 노동자계급에게는 너무나 기본적인 요구이다.

    결국 이 점을 강조하고 싶다. 흔히들 많은 비판자들이 착각하는 것은 <우리의 입장>에 ‘장애인, 여성 문제’가 거의 담겨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 부족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지점에서 그 문제들에 대한 입장은 <우리의 입장>에 녹아 있다.

    <우리의 입장>이 제시하는, 노동자계급을 향한 기본적 요구들―일자리 보장, 모든 형태의 착취 철폐,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직접 참여하여 구성하는 노동자 권력, 생산수단의 사회화―모두는 다름 아니라 노동계급 여성과 장애인들에게도 가장 사활적인 요구들이다. 무지개 동맹 대신 노동자계급의 당파적인 사회주의 노선을 전면에 내거는 것만이 여성과 장애인, 환경 문제 등 자본주의 착취로부터 파생되거나 자본주의 착취 때문에 온존하고 있는 제반 모순과 억압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현장 분회 사상


    민중, 심지어는 노동자계급을 대표한다고 하지만 사실 중간계급 지식인들이나 노동조합 관료들, 출세분자들을 대표하는 정당이 바로 개량주의 정당들이다. 이 정당의 조직구조는 그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본주의 선거제도가 가리키는 선을 따라 이 당은 자신을 조직한다.

    가령 선거구별로 형성되는 지역구 조직이 그것이다. 이 지역구 조직에서는 노동자들의 대표성과 통제권이 대단히 좁은 범위로 쪼그라든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는 집중되어 있지만 거주 지역에서는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다.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은 약 40여 개의 선거구로 흩어지며, 철도노동자들의 경우 200개 이상으로 쪼개진다. 기아 화성공장 노동자들도 4개 이상의 선거구로 흩어진다. 이런 현상은 거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작업현장에서라면 노동자들은 집단적 노동의 실을 따라 공통의 요구와 목표로 쉽게 집결할 수 있지만, 지역 선거구에서라면 이들은 거의 힘을 쓸 수 없다. 여기서는 같은 동네에서 산다는 것 말고는 노동자들을 서로 연결시킬 끈이 대단히 가늘다. 최소한 작업장 단위에서 조직되는 힘에 비한다면 몇 배 아니 몇 십 배 이상 작을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는 선거구를 작업장 단위가 아닌 지역구 단위로 확정해 놓는다. 작업장 단위의 정치구조를 배제함으로써 삼손의 힘의 근원인 머리카락을 뽑아버리는 것이다.

    반대로 노동해방의 거대한 힘을 결집하고자 하는 당이라면, 이 당은 작업현장 단위를 빼놓고서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거점을 마련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가장 강력한 힘은 오직 이 작업현장 단위를 기본으로 해서만 형성되고 강화될 수 있으며 최대치로 발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조직과 전국 조직은 이 작업현장 단위에 튼실하게 기반하고, 그것의 통제력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존재할 때만 참된 계급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사소한 개선만을 추구하는 개량주의 정치가들에 의해 좌우되는 개량주의 정당은 자본주의 선거구를 따라 자신을 조직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세 가지 의미에서 그들에게는 좋은 것이다.

    첫째, 바로 이런 구조 아래서 이들 개량주의 관료들은 노동자당원들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현장 단위를 토대로 해서 건설되고 운영되는 당이라면 노동자당원들의 통제는 당연히 강력해진다. 반면 거주지역 단위를 따라 형성되는 조직구조에서 노동자들의 통제권은 형편없이 약해진다. 이 경우 상근자 체계에 바탕을 둔 개량주의 관료들은 마음대로 노동자들을 주무를 수 있고, 노동자들의 요청에 귀를 기울이더라도 그것은 기껏해야 지역 민원사항과 관련해서일 뿐이다. 최선의 경우에도 그들은 노동조합 관료들이 떠벌이는 상투적인 구호들을 반복하기만 할 뿐이다.

    오히려 노동조합 관료들에 비해 개량주의 당 관료들은 훨씬 더 큰 이점을 누린다. 왜냐하면 현장 노동자들과 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노동조합 관료들은 파업을 하는 흉내라도 내야 하지만, 이 개량주의 당 관료들은 선거에 출마해 몇몇 요구를 말로만 떠들면서 노동자들에게서 표를 얻는 식의 아주 부담 없는 방식으로 생존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합법적으로 등록된 정당이라면, 그리고 선거에만 매몰된 의회주의 정당이라면, 이 정당의 관료들은 구속이나 수배, 손배 등 어려움과 고통으로부터도 대부분 벗어날 수 있다. 현장대중으로부터 버림받고, 늙고 지쳐서 투쟁성과 헌신성이란 눈꼽만큼도 없는 노동조합 관료들이 개량주의 당 관료로 변신하기 위해 줄을 서는 이유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책과 노선에서도 동일한 상황이 전개된다. ‘지역선거구 활동’이라는 이름으로 개량주의 당 관료들은 지역 민원을 정식화한 요구들, 즉 환경개선이나 쓰레기문제 해결, 도로개선, 노인문제 등과 같은 대개 몰계급적인 영역에 쉽게 똬리를 틀 수 있다.

    둘째, 이런 구조 아래서는 비노동계급적이고 출세지향적인 인물들이 마음껏 활개를 치고 영향력을 넓힐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현장 단위라면 노동자들은 ‘어떤 인물이 과거에 무엇을 했고, 지금은 어떤 상태인지’를 어느 정도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선출권과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선거구 단위 구조라면 노동자들이 선출권과 통제권을 제대로 행사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 삶의 본모습에서는 부르주아적이고 타락했지만 정치적 야심은 갖고 있는 출세주의 분자들이나 정치영역 말고는 활로를 찾을 수 없는 몰락한 지식인들이 당으로 기어 들어와서 결정적인 지위를 차지할 여지가 대단히 넓어진다. 또한 노동현장에서의 삶과 투쟁에서 검증되지 않은 채 단지 당의 구조 속에서만 실무적으로 기능하는 데 익숙한 상근자들―이들의 대부분은 실무적 일처리에 능숙한 지식인들로 구성된다―이 차지하는 비중과 지위가 대단히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당은 형식적으로는 노동자정당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출세분자들이나 당 사무실의 지식인들의 당이 될 가능성이 대단히 커진다. 노동자당원들의 역할이란 주로 선거에서 표를 찍어주는 것이며, 이 표를 발판으로 출세분자들이나 몰락한 지식인들이 자본가 사회의 한 귀퉁이를 점하면서 화려한 지위를 확보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성립한다. 뇌물수수, 갖가지 추문 등 당의 타락이 상층에서부터 점차 만연하기 쉽다. 당을 발판으로 국회의원, 장관, 수상 등 화려한 지위를 획득한 상층부는 이 지위를 바탕으로 출세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이 상층부를 규정하는 문화와 정체성은 거의 전적으로 부르주아적인 속물근성이다. 이들은 겉으로는 노동자의 요구를 외치지만, 그들의 삶의 환경은 거의 전적으로 부르주아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부르주아적 문화와 속물근성, 출세주의가 당의 조직구조를 따라 일반 노동자당원들 속으로까지 스며들며, 이런 식으로 개량주의 당은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일익을 담당한다.

    셋째, 이런 구조 아래서는 기회주의 노조관료들과 개량주의 당 관료가 서로 결탁하는 것이 더욱 손쉬워지기 때문이다.

    일종의 개량주의적 분업체계를 통해 두 종류의 관료층 모두는 노동자들을 기만하고 통제하면서 노동자 투쟁의 폭발력을 억누르는 데 협동하게 된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정치투쟁이나 노동해방과 관련된 영역’은 노동조합이 할 일이 아니고 개량주의 노동자당이 할 일이라고 핑계를 늘어놓으면서 노동조합을 단지 편협한 개량적이고 경제적인 요구 수준에만 묶어둔다.

    개량주의 정당의 관료들은 파업투쟁 등은 노동조합 관료들이 관장할 사항이며, 당의 역할은 ‘순수하게 정치투쟁―물론 이 정치투쟁은 순전히 개량주의적인 것이며, 의회주의적인 것이다―에만 집중하는 것’, 즉 지지표를 확대하면서 국회의원 수를 늘리고 장관직을 획득하며 최종적으로는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처럼 자본가정부의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이른바 집권)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개량주의적이고 선거주의적인 전망, 한마디로 의회주의적인 전망이 자연스럽게 당을 지배하게 된다.

    이런 식의 분업구조에서는 노동자들이 통제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된다. 노동조합 관료들은 자신의 무능력과 투쟁의지 결핍에 따른 모든 책임을 ‘개량주의 노동자당’이 아직 큰 힘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에 돌리면서, 개량주의 당 관료들에 대한 더 강화된 지지를 요구한다. 반대로 개량주의 당 관료들은 노동자의 절박한 요구를 내건 현장투쟁에 대한 지원과 지지를 방기하면서 ‘이것은 노동조합의 소관사항이지 우리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며 발뺌한다.

    노동조합과 당 상층부에 이중의 진지를 구축한 관료집단과 맞서기란 훨씬 더 힘들다. 노동자들은 이 이중의 진지와 맞서 투쟁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춘 당―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하나로 결합시키며, 현장노동자들과 노동자 투쟁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현장중심의 조직구조를 갖춘 당―을 통해서만 비로소 관료집단에 체계적으로 대항할 수 있다.

    결국 정리하자면 개량주의 당은 어느 정도는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대중정당으로 자신을 포장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노동대중의 삶에 깊숙하게 뿌리박고 그들의 주도성과 통제권을 보장하며, 만약 당이 결단한다면 이 결단을 따라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쟁할 수 있을 만큼의 헌신적인 대중결합력을 갖출 수 없다. 개량주의 당과 노동대중 사이의 연결성이란 자본가정당과 국민 사이의 연결성 수준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지 못한 피상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당은 결정적인 고비에서 노동대중의 투쟁력과 분리된 의회주의 정당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갖가지 추문과 뇌물, 타락, 출세주의 등으로 인해 노동대중의 신뢰를 저버린다. 대중정당이란 단지 외관상의 모습일 뿐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니다.

    <우리의 입장>은 이러한 의회주의 개량정당과는 명백히 대립되는 방식의 조직 구조를 제기한다. <우리의 입장>이 철저히 고수하려 하는 노동계급정당 사상, 그리고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사상은 조직적 측면에서는 “현장분회 사상”으로 구체화된다. 이 현장분회 사상은 ‘조직의 한 기구에 참여해서 활동하는 동지들로만 회원 자격을 제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격하게 조직의 성격을 노동계급적인 것으로 보장하는 장치이다.

    ‘조직의 한 기구에 참가하는 것’은 물론 최소한의 출발점이다. 이런 출발점이 분명하지 않다면, 사회주의 조직은 무규율하고 방만한 포럼식의 조직으로 전락하며, 이런 조직으로는 노동계급해방운동을 이끌 수 없다. 동시에 이런 방만한 조직은 현장 노동대중에 기반한 일상적인 실천으로부터 자유로운 지식인들이나 직업적 상근자들의 주도권을 보장하기 쉽다. 단지 강령을 승인하는 것에만 그친다면, 정치적 동의와 실천이 따로 놀고 규율성과 실천성이 떨어지는 지식인들에게 문호를 지나치게 열어주게 되면서 사회주의당은 학생들, 지식인들, 교사들, 교수들의 잡담가게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의 입장>은 그런 조치만으로는 부족하며, 그보다 훨씬 더 엄격한 조직적 장치를 통해서만 노동계급 노선을 수호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모든 회원들은 하나 이상의 “현장분회”와 연결지어 활동해야 할 의무를 가지며, 조직의 지역위원회, 중앙위원회 등에서 “현장분회”의 주도력과 통제력이 십분 발휘되어야 한다. 지역위원회와 중앙위원회는 이 현장분회를 매개로 하여, 광범위한 노동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지도력을 창출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것은 노동대중을 사회주의적 주체로 조직하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 대신 쓸데없이 방만한 실천에 매달리는 모든 조직들과 구별되는 장점을 사회주의 조직에 제공한다. 지역위원회와 중앙위원회의 역할이란 조직의 세포인 현장분회가 전체 노동자계급의 파견자의 지위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면서 대중을 지휘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모든 현장분회가 빨아들인 노동자 투쟁의 경험을 보편화시켜 모든 현장분회로 되돌려주며, 노동계급의 작은 한 부분에서만 활동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편협한 감각을 전체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재조명하면서 더 명확한 계급적 관점을 취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지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직 활동은 의회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습성과 사회주의 조직이 명확히 단절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장분회 사상은 <우리의 입장>에 다음으로 정식화되어 있다.


    8. “연합”은 노동자계급의 당파적 이해를 수호한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한 부분이되 가장 선진적인 한 부분이라는 정체성을 굳건히 하고 있는 혁명적 노동자계급 정당을 창건하기 위해서 분투할 것이다. 연합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는 모든 태도에 결연하게 반대하며, 노동자 운동과 자신을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것, 그리고 노동자계급이 연합의 중추를 구성하도록 만드는 것을 사활적인 임무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연합이 조직의 기초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그리고 노동대중이 벌이는 모든 투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현장의 노동자 소조에 두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이 지식인 출신의 혁명적 투사들을 배척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문제는 그들은 출신에 있어서만 지식인일 뿐 노동자계급의 정신에 동화되어 있는 노동자계급적 분자여야만 하며, 이는 노동자운동과 긴밀히 연결된 실천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검증되어야만 한다는 점에 있다.

    9. 다음으로 연합이 건설하고자 하는 조직은 모든 기관들을 통해 노동자 투쟁을 고무하고, 작업장과 연결되어 활동하는 투사들의 주도력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다. 그와 같은 조직적 원리에 입각해야만 사회주의자 조직은 생산하고 투쟁하며 건설하는 노동대중들로부터 힘을 공급받고 통제되면서 확고히 전진할 수 있다. 이것은 그 출발점에서 불가피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여러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연합이 건설해야만 하는 조직의 설계도면이며, 가능한 모든 수준에서 처음부터 최대한 확보하고자 분투하고자 하는 것이다.

    연합의 구성원들의 다수는 노동조합이나 작업장 등을 매개로 노동대중 속에서 활동하는 능동적인 분자로 구성된다. 연합은 선진노동자들이나 노동대중들이 모여 있는 모든 조직 속으로 파고듦으로써, 또한 그 조직 안에서 그리고 그 조직을 통해 계급투쟁의 요구에 부합하는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노동자계급과 결합한다. 이처럼 조직적 기초를 생산 현장에 놓기 위해 정열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연합은 노동자계급의 정당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조직이라는 점을 조직적 측면에서 분명히 한다.


    노동자 권력 사상 - 의회주의와의 단절


    이른바 혁명적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는 정치조직이라면 노동자 권력 사상에 대한 찬성 입장을 분명히 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 권력 사상에 대한 승인은 추상적 수준에서 구체적 수준으로 상승해야만 비로소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가장 결정적인 “리트머스 시험지”는 “자본가 국가기구”에 대한 태도, 그리고 “노동자 혁명의 경로”와 관련된 문제다. 여기서는 김세균 교수의 “변혁적 진보 정당의 필요성과 기본상”을 비판적 대상으로 삼아 <우리의 입장>의 노선을 예각화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김세균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노동자-민중 권력 창출의 길은 주어진 현실적 조건과 조성된 정세와 계급적 역관계 등에 따라 다양할 수 있겠지만, 어떤 길을 통하든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전면적인 개조와 노동자계급의 전 사회적인 헤게모니 확보 및 인민주권기구에서 변혁정당의 민주적 지도력 확보 등이 요구된다.1)


    ‘부르주아 국가장치의 전면적인 개조’는 사실 유로코뮤니즘의 낯익은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유로코뮤니즘은 이 ‘개조 사상’ 뒤에 숨어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이러저러하게 수선하고 민주화시키거나 이른바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수행하는 기구로 탈바꿈시키는 개량주의 전망에 매달렸다. 이것은 선거를 통해 집권함으로써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노동자적 국가기구’ 즉 사회주의적 기구로 전화시킬 수 있다는 달콤한 의회주의적 환상으로까지 연결되었다.

    그러나 혁명적 사회주의의 입장, 그리고 노동자 권력의 유일한 현실태였던 러시아 노동자 권력의 경험은 그것을 거부한다. 또한 유로코뮤니즘이 몇 십 년에 걸쳐 실제로 보여주었던 현실 또한 혁명적 사회주의 입장을 ‘반면교사’의 방식으로 뒷받침한다.

    1917년에 노동자 혁명을 통해 러시아에서 잠시 창출되었던 노동자 권력은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개조’하는 대신 ‘분쇄’했고, 아래로부터 형성된 노동대중의 혁명적 대중투쟁기관―소비에트―으로 그것을 ‘대체’했다. ‘개조’에 대한 작은 환상조차도 이 위대한 혁명을 불가능하게 했을 것인데, 실제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은 부르주아 임시정부에 대한 개조에 매달림으로써 혁명을 가로막았다. 유로코뮤니즘의 집권 경험 또한 그것을 보여준다. 그들은 희망과는 달리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개조’가 아니라 노동자의 거대한 투쟁의지를 질식시키면서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보호하는 완충장치의 역할을 떠맡았다.

    물론 김세균 교수의 ‘전면적인 개조 주장’은 유로코뮤니즘의 주장과는 다른 맥락에서 제기되었을 수도 있다. 또한 그 표현법에서의 차이를 내가 과도하게 붙들고 늘어지면서 쓸모없는 논의를 유발할 위험성도 있다. 그러나 발제문의 이어지는 주장들은 이러한 비판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점, 오히려 더 예각화시켜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민주주의가 진척된 조건 속에서도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국가에 대항하는 정치’이다. 그러나 정치적 민주주의가 진척될수록 ‘국가 속에서의 투쟁’ 역시 중요해지며, ‘선거를 통한 집권’ 역시 노동자-민중권력의 창출과 사회변혁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매개 고리가 된다. 그러므로 당이 대중에 뿌리내리면 선거 참여와 의회 진출 역시 적극 모색해야 한다. 그러나 의회 진출에 성공할 경우에도 대중정치의 활성화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는 비제도적-사회운동적 투쟁정당의 성격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정치로부터의 의회정치의 자립화와 대중정치의 의회정치에의 종속을 막을 수 있는 확고한 당적 견제장치가 마련되어야 하며, 의회활동에 대한 철저한 당적 통제가 이뤄져야 한다.2)


    ‘국가 속에서의 투쟁’은 사실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개조 사상’을 다른 표현으로 제기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진척’(즉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진척)을 근거로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통해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입장이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유로코뮤니즘적인 환상”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관통하고 있는 생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진척이 부르주아 국가기구 속에서의 개조 활동을 통해서 노동자 권력 창출을 위한 계기를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환상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은 그 입장과는 명백히 대립되는 입장을 대표한다. 부르주아 국가기구 속에서,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통해서 노동자 권력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권력은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어떤 식으로든 매개하는 방식으로는 창출될 수 없다. 노동자 권력은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분쇄함으로써만 창출된다.

    이러한 상이한 입장은 ‘변혁의 경로’를 둘러싸고 확대된다. 김세균 교수는 “‘선거를 통한 집권’ 역시 노동자-민중권력의 창출과 사회변혁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매개 고리가 된다”고 주장한다. “선거를 통한 집권”은 의회주의적 전망일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대한 환상을 반영한다. 백번 양보해서, 선거를 통해 이른바 집권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집권”이 될 수 없다. 부르주아 국가기구가 그대로 온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즉 권력이 자본가계급의 수중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을 ‘집권’이라 부르는 것은 치명적인 환상이다. 이것은 ‘무늬만 집권’이며, 만약 이 집권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개조하고, 그리고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개조를 매개함으로써 사회주의 변혁을 이루고 노동자 권력의 기초를 다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정확히 유로코뮤니즘의 개량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칠레 아옌데 정권의 경험에서 드러났듯이, 온갖 관료적 장치와 무장된 힘을 갖고 있는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정말이지 아주 사소한 개량 조치 앞에서도 ‘군사 쿠데타와 사보타지’로 응수할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이 노동자계급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자본가계급 수중에 있음을 확인시켜 줄 것이다.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선거를 통한 집권과 같은 환상에 빠지지 않고, 계급투쟁 속에서 노동대중이 아래로부터 창출하는 혁명적 대중투쟁기구에 의한 부르주아 국가기구 분쇄라는 혁명적 전망에 철저히 의지하는 것이다. ‘선거를 통한 집권’이란 환상을 부추기는 대신 소비에트, 레테, 공장평의회 같은 의회 바깥의 노동자의 혁명적 투쟁기구에 의해서만 노동자 권력이 수립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응당 이러한 노선은 의회주의, 선거주의를 거부하면서 의회 바깥의 계급투쟁에 기반한 정치노선을 전면에 부각시킨다.

    이러한 혁명적 정치노선을 분명히 하지 않고, ‘선거를 통한 집권’이란 유로코뮤니즘의 정식을 반복하면서 수줍게도 ‘의회정치의 자립화와 의회정치에의 종속을 막을 수 있는 견제 장치의 필요성’, ‘의회활동에 대한 철저한 당적 통제의 필요성’을 덧붙이는 것은 사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 중 하나다. ‘투쟁정당의 성격을 유지하고 의회정치에의 종속을 막고자 한다면’ 선거를 통한 집권 전략을 폐기해야 한다. 반대로 ‘선거를 통한 집권 전략’에 문호를 열어둔다면, ‘투쟁정당의 성격 유지와 의회정치에의 종속 차단의 필요성’을 포기해야 한다.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김세균 교수가 전자의 길을 분명히 하기를 희망한다.

    개량주의와 혁명주의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재주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데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고자 하는 시도는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이하 민주노동연구소)의 “사회주의 이행 12대 강령 시안”에서 시도되고 있다.


    물론 국가의 소멸에는 장구한 시간이 걸릴 것이며, 그 과정에서 새롭게 창설되어 날로 강화되고 아래로부터 통합을 이루어 나가는 민중권력과 기존의 국가는 병존할 것이다. 민중권력의 강화와 더불어 일시적으로 국가의 수중에 남아 있는 기구들은 노동자 민중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혁명적으로 개조되어야 한다.3)


    민주노동연구소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국가 소멸의 장구한 과정에서 존재할 이행의 체제”는 “민중권력과 기존의 국가―부르주아 국가―가 병존하는 체제”로 규정한다. 이것은 사회주의로의 이행 강령이 아니라 유로코뮤니즘적인 개량 강령이다. 노동자 권력과 부르주아 국가권력은 병존할 수 없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두 권력 사이에서 죽고 사는 전투가 펼쳐지는 이중권력 상태만을 우리는 가정할 수 있을 뿐이다. ‘사회주의(또는 공산주의)로의 이행’에 해당하는 권력은 오로지 노동자 권력일 뿐이다. 노동자 권력을 제외하고는 모든 계급 제도를 폐지하고, 그럼으로써 계급 지배의 도구인 국가 자체까지도 소멸시킬 수 있는 “이행의 권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노동연구소가 상상하는 “민중권력과 기존의 국가―부르주아 국가―가 병존하는 이행의 체제”란 사실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가장하며 부르주아 권력에 영합하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완성과 사수에 집착하며 부르주아 권력의 한 자리―국회의원직, 노동부 장관직, 수상직―를 차지하는 데 몰두해 온 유로코뮤니즘식의 개량주의적 실천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개량주의 전망은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대한 정면 도전을 희석화시키고,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맞선 혁명 투쟁의 과정에서만 형성되고 강화되며 존재할 수 있는 노동자 권력의 진정한 맹아들―소비에트, 노동자 평의회―을 부르주아 체제 내의 일종의 자치 기구들로 대체해서 사실상 봉쇄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이 모든 유로코뮤니즘적 전망과는 다르게 <우리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노동자 권력을 향한 혁명적 노선을 분명히 한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경찰과 상비군을 폐지하여 이것을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의 민병대로 대체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부르주아 행정, 의회, 사법기구를 폐지하고 이것을 언제든지 소환될 수 있으며 숙련 노동자의 평균임금을 받는 관리들과 재판관들을 선출하고 모든 법과 정책을 결정함으로써 입법, 행정, 사법 전체를 총괄적으로 관할하는,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의 직접 민주주의 기관으로 대체하기 위해 투쟁한다. (중략) 연합이 추구하는 국가는 “노동자계급의 권력”이다. (중략) 이 혁명은 압도적 다수의 생산자로서 노동자계급이 전면적이고도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이들의 주도권과 능동성에 전적으로 기반하는 국가에 의해서만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 (중략)

    진정한 노동자 권력 수립은 소비에트 유형의 국가처럼 생산자들이 노동하는 단위인 작업장 단위로 노동자 국가가 건설되는 것을 통해서만 보장된다. 작업장 단위의 생산자 조직을 기초로 민주적으로 세워지고 운영되는 이 국가는 최초로 생산자들(노동자들)이 정치의 주인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보장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적 생산력을 창조할 수 있도록 생산자들을 통합하고 이끈다. 노동자 국가는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인민의 자주적 기관이 구성하게 되는데, 이 국가는 노동자․인민의 권력으로서 모든 관리를 아래로부터 선출, 소환, 통제하며, 입법․사법․행정을 자신의 수중에서 단일하게 결합시킨다. 이 노동자 국가는 노동대중의 주도성과 통제력 하에 작동한다는 점에서 더 이상 통상적인 유형의 국가가 아니라 이미 ‘공동체 사회’의 성격을 띤다. 이 노동자 국가는 계급제도 철폐가 완수되고 노동대중의 사회 운영 능력이 완성됨에 따라 국가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소멸시키면서 자유로운 생산공동체에 자리를 내어준다.



    ※ <우리의 입장> 해설 2부는 《사회주의자》 2권에 연재된다. 2부에서는 △소련․북한 등의 스탈린주의 국가 체제에 대한 단호한 반대 △국제주의 사상과 통일에 대한 관점 △조합주의와 구별되는 평의회 사상을 중심으로 논쟁적 해설을 이어갈 것이다.



    1) 김세균, <변혁적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기본상>


    2) 김세균, <변혁적 진보정당의 필요성과 기본상>


    3)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사회주의 이행 12대 강령 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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