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랜드 510일간의 파업, 결과와 교훈
“무쟁의 선언, 임금교섭 위임, 노사화합 선언 등 노조 활동의 최소 기반을 포기한 것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우리 스스로 제일 앞장서 같이 싸운 동지들의 사직서를 회사에 갖다 바쳤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고요.” (서형태 이랜드노조 조합원)
[편집자] 지난 11월 13일, 오랜 기간 전개된 이랜드일반노조 파업이 510일차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험난한 투쟁의 나날을 거치면서도 끝까지 파업대열을 지킨 동지들의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차곡차곡 쌓인 날짜만큼이나, 이번 파업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제한된 지면에 많은 내용을 담기란 어렵겠지만, 이번 파업의 결과와 교훈에 대해 짧더라도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겨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에 응해주신 이랜드일반노조 조합원 서형태 동지에게도 감사드린다.
▶비정규직 철폐를 내걸고 시작한 파업이 500일 넘게 장기간 지속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파업이 이토록 장기화되었을까요?
초기의 공세적 투쟁의 힘을 지속적으로 추동해내지 못한 것이 장기화의 주된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으로 우리의 투쟁이 주춤한 사이 자본가들은 틈을 놓치지 않고 공격을 밀어붙였던 것이고, 이 흐름을 반전시키지 못한 것이 결국 수세적인 기조 속에서 타결을 압박하지 않았나 봅니다. 초기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시켜 승리하는 투쟁으로 귀결시킬 것인가라는 문제가 대두됐습니다. 이는 지도부 몇몇의 주도로 되는 것이 아니라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투쟁의 주체로서 모든 문제에 개입함으로써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파업 타결의 결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결과임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투쟁을 통한 쟁취라기보다는 타결만을 위한 교섭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 결과라 생각합니다. 밀리더라도 끝까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했는데, 막판에 투쟁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홈플러스 현장을 조직하려는 시도 등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조차 제대로 못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물론 힘이 부족하면 후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무쟁의 선언, 임금교섭 위임, 노사화합 선언 등 노조 활동의 최소 기반을 포기한 것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제일 안타까운 것은 우리 스스로 제일 앞장서 같이 싸운 동지들의 사직서를 회사에 갖다 바쳤다는 사실이 아닐까 싶고요. 이를 아름다운 희생으로 표현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로서는 자기 가족을 적들에게 갖다 바치면서 차마 그렇게 표현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결말이 앞으로 있을 수많은 투쟁사업장에 적들의 유용한 수단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우려될 뿐입니다.
▶파업이 장기화되며 투쟁력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지난해 여름 가을처럼 파업조합원들이 상당히 위력적인 투쟁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합원들이 강한 투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당시에는 우리의 피해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본에 타격을 줄 수 있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기 때문에 그런 위력적인 투쟁력을 발휘하지 않았나 싶고요, 이후 자본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노력이 더 절실했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가급적 조합원 안 다치게 하자는 기조 중심으로 되면서 강력한 투쟁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지지 않았나 싶네요.
▶이번 투쟁을 거치면서 분명한 성과로 가져가야 할 것도 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성과가 있다면?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현장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은 물론이거니와, 노조로 조직된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비조합원들에게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지금까지의 통상적인 노조운동 관점 즉 교섭으로 문제를 잘 풀어보자 식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노동자의 처지를 바꿀 수 없다는 객관적 현실을 이해하게 됐다는 점이 될 수 있겠죠. 무엇보다도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자본과의 힘 대결에서 밀리면 무엇이든 달라는 대로 주어야 하니까요. 실력이라 함은 현장에 있는 모든 노동자를 조직하고 행동하게 하는 것이겠지요.
▶틀에 박힌 교섭 중심의 활동 대신 새로운 전망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들리는데, 어떤 점들을 예측해볼 수 있을까요?
예전에는 파업하고 교섭하고 타결되면 현장복귀해서 안정기를 갖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해 보입니다. 경제는 끝없이 추락하고 시장은 포화상태에 있는데, 이런 할인점 시장의 객관적 상황이 노동자의 처지를 여지없이 뒤흔들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타결해서 현장복귀해도, 소위 경영 정상화 안 돼서 회사가 어려워지면 또 다시 매각국면에 놓이고 고용불안에 직면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죠. 무기계약직 전환 시점을 18개월에서 16개월로 줄였어도, 그 전에 계약해지 되면 그만이라는 사실과 끝까지 저들이 비정규직 해고자(계약해지자) 복직을 거부한 것은 저들이 이미 예측하고 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결국 자본가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쥐어주는 것은 썩은 지푸라기밖에 없습니다. 썩은 지푸라기가 아니라 굵은 밧줄을 움켜쥐려면 지금까지보다 몇 배 더 큰 투쟁을 벌여야만 합니다.
▶이제 조합원들은 현장에 복귀하게 됐습니다. 이번 파업에 이어 핵심적으로 추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요?
장기파업이 낳은 내부 갈등의 치유와 피로감을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경제위기라는 객관적 현실이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 봅니다. 모든 자본가들이 하는 것처럼 경제위기를 이용한 노동자 착취의 공격과 내부 분열의 공작이 동시에 다가올 것입니다. 이에 대비하고 최대한 빠르게 대열을 재정비해야 하며, 나아가 현장의 모든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노력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가 아닐까 싶네요. 따라서 아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정신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인터뷰 및 정리 : 오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