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동의해준 바 없다!”- 복수노조·전임자임금 법 개악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
또다시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권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쳐지게 되었다. 지난 12월 4일, 한국노총의 관료들은 정부·경총과 함께 복수노조 및 전임자임금 문제와 관련하여 배신적 합의를 한 것이다. 이 배신적 합의에 따라 조만간 국회에서 논의될 노동관계법 개악이 실행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첫째, 사업장단위 복수노조 시행이 2년 6개월 유예되어, 20여년간 복수노조 금지조항에 묶여 어용노조·무노조의 설움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의 노조설립 자유가 박탈된다.
둘째, 2년 6개월 뒤에 복수노조가 허용되더라도 여기에는 ‘창구 단일화’라는 무서운 잠금장치가 달리게 된다. 즉, 사업장에서 기업별노조이건 산별노조의 지부·지회이건, 노동자들의 과반수를 조직하지 않으면 자본가들은 일체의 교섭의무를 지지 않는다.
셋째, 노조전임자 임금지급이 내년 7월 1일부터 사실상 금지되며, 교섭·협의·고충처리·산업안전 등 극히 제한된 활동과 시간 안에서만 전임자의 활동이 보장된다.
온갖 독소조항으로 가득 찬 배신적 합의
이번 배신적 합의는, 만일 노동자들이 제대로 저항하여 맞서지 않는다면, 지난 십수년간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권과 자본가들이 꿈에도 그리던 ‘자본가 이윤천국 = 주식회사 대한민국’ 창출의 지렛대가 될 것들이다.
당장 자본가들은 민주노조들이 제기하는 일체의 교섭에 응하지 않을 것이며, 소수노조라고 판단하는 순간 모든 단체협약을 해지하려 할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교섭의무가 없으므로 교섭불응에 따른 모든 쟁의행위는 ‘불법’이 된다. 저항에 나서면 불법으로 몰아 고소고발·손배가압류·가처분 등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주 쉬워진다.
그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저항하는 경우라면, 비용이 좀 들더라도 사측의 어용노조를 설립하여 다수노조를 만든 뒤, ‘창구 단일화’ 조항을 활용하여 민주노조 무력화에 나설 것이다. 물론 대기업노조에서 당장 자본의 2중대 노조를 만드는 것은, 현존하는 노조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한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쉽지는 않겠지만, “만일 양보하지 않으면 제2노조를 띄우겠다”고 상층 관료들을 협박하여 지속적인 양보교섭을 종용하게 될 것이다.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또한 명목상 전임자의 활동만 막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활동의 폭까지 제한하고 있으므로 자본가들은 교육과 조합원 총회 등의 시간을 모조리 무급화 내지 금지시킬 명분을 얻게 되었다.
“단결하면 큰 힘이 나온다”는 상식을 노동계급의 머리에서 완전히 지워라!
2003년까지의 노동법 개악이 주로 근로기준법 등 개별 노동자들의 노동조건과 연관이 있었다면, 2003년 이후의 노동법 개악은 이른바 집단적 노사관계, 즉 ‘노동자들의 자주적 단결권’을 직접 공격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복수노조·전임자임금과 관련한 노동법 개악은 그 한 부분이다.
정권과 자본이 2003년 이후 노동조합의 권리를 비롯해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뭉쳐서 싸울 수 있는 권리’를 공격하는 핵심 목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자본가들의 공격에 저항할 수 있다는 어떤 희망도 노동자들이 갖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해봐야 어차피 질 싸움이야” “우리가 단결해도 어찌해볼 수 없을 거야”라는 패배의식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것이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그 이후 펼쳐진 민주노조운동이 87년 이전 역사와 분명히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낸 것이 있다면, 바로 “노동자들이 뭉치면 큰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당시 젊은 노동자층의 상식으로 만든 것이었다. 87년 이전까지 이 명제는 상식이 아니었지만, 노동자 대투쟁 이후 평범한 노동자들도 민주노조를 결성하고 자본과 맞상대하면서 ‘경험을 통해’ 이것을 지극히 당연한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비정규악법은 억압받고 차별받는 비정규노동자들로 하여금 “2년이라는 바늘 구멍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어라”는 패배의식을, 노사관계 로드맵은 “부당해고를 해도 자본가들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숙명을, 그리고 이제 복수노조 문제에서는 “다수를 조직할 실력이 없으면 노동조합 엄두도 내지 말라. 안그러면 신세 조진다”는 협박을 전체 노동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점점 거세지는 정권과 자본의 공격, 그러나 그들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이번 배신적 합의가 낳을 재앙같은 미래에 대한 폭로와 규탄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큰일났다”는 위기의식으로 요동치지는 않고 있다. 물론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비롯해 민주노조운동과 사회주의운동진영이 기본적인 교육과 선전·선동조차 게을리 한 점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노동계급을 점차 옥죄어오는 정권과 자본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그들도 실수를 하는 존재이며, 그 실수라는 구멍을 통해 노동계급의 역동적 자발성이 뚫고 올라온다면, 저들의 탄압은 반대로 민주노조운동·사회주의운동에 기회를 부여한다. 그렇다면 이번에 저들이 한 실수는 무엇인가? 현장은 이번 야합이 벌어진 것을 두고 ‘패배주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정권과 자본은 이 야합의 무대에 노동계급의 아주 작은 관료적 부분, 즉 한국노총의 최상층 관료들만을 조연으로 캐스팅한 것이다.
다시 말해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광범위한 부분인 평범한 조합원들은 물론이고 양 노총의 하급 관료층조차 이번 사안에 대한 토론이나 자본가들과 맞상대할 기회를 겪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한국노총의 몇몇 산별들조차 위원장 사퇴와 임시대의원대회 소집을 요구하고 있겠는가. “뭣하러 총파업 찬반투표를 했느냐”는 얘기가 게시판에 도배되고 있다.
결국 지금까지의 상황만 가지고 보자면, 정권과 자본가 단체들은 한국노총의 최상층 관료 몇 명은 제압했을지 모르나 평범한 노동자들까지 패배주의에 전염되도록 만들지는 못한 것이다. 그런데 세계 노동계급의 투쟁과 운동의 역사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동의하지 않은 법·제도의 일방통행에 맞서 결사적인 저항으로 나선 수많은 경험들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동의해준 바가 없다!
이번 배신적 합의의 자리에 초청조차 받지 못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번 합의를 ‘야합’으로 규정하고 지난 8일 국회앞 농성을 시작으로 “총파업 불사”를 천명했다. 그러나 꼭 3년 전에도 민주노총은 복수노조·전임자임금 문제에 대한 ‘양노총 공조’를 진행하다가 한국노총의 야합으로 똑같은 꼴을 당한 바 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이번 한국노총의 배신적 합의 가능성을 전혀 몰랐다면 그것은 이명박도 웃을 코미디가 될 것이다.
6개월 뒤면 전임자임금지급이 금지된다. 당장은 전임자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에 맞설 투쟁의 용기를 갖지 못한 지도부는 조합비 인상을 검토하거나 다른 사업비 삭감에 나설 것이다. 그제서야 노동자들은 이 제도가 무엇을 노리는 것이었는지 피부로 느끼게 된다. 각종 투쟁사업비는 물론이고 복리후생조차 삭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교섭거부는 기본이고 각종 교육과 조합원 총회조차 사사건건 자본가와 맞붙어야 하는 상황이 코앞에 다가왔다. 결코 노동자의 권리를 그냥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현장노동자들이 외칠 것이다. “우리가 동의해준 적이 없는데, 누가 우리의 권리를 빼앗는단 말인가!”
복수노조 시행 유예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미 수차례 유예되어온 것에 대응하여, 민주노조운동은 사업장에 어용노조가 있으면 산별노조의 지부·지회를 설립하는 ‘편법’을 동원해 맞선 바 있다. 그러나 이제 ‘창구단일화’의 시행은 이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이제 수많은 민주노조의 노동자들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스스로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정공법으로 맞설 것인가?
바로 여기에 투쟁의 가능성이 놓여 있다. 지금까지 민주노조운동·사회주의운동이 기본적 임무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면, 지금부터라도 이 마지막 가능성에서 답을 찾아가야 한다. 내년 7월 1일로 악법의 시행이 다가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지금부터 “평범한 노동자 전체가 동의해주지 않은 악법 강행에 맞서 투쟁을 조직할” 6개월이 남은 것으로 간주하고 총력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시민단체 및 야4당과 함께 야합안을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복수노조 유예와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창구단일화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모태로 한 민주당 자신이 과거에 밀어붙였던 사안들이다. 그런데 과연 민주당을 핵심 축으로 한 야4당 공조를 믿어야 하는가?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렇지 않다! 하루, 한달, 1년을 단위로 먹고 사는 문제, 가족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믿을 것은 바로 옆의 동료들, 똑같은 위기에 처한 전체 노동계급 뿐이다. “노동자가 단결하면 큰 힘을 낸다”는 것을 지극히 평범한 상식으로 다시 되돌리는 것, 앞으로 6개월간 이것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를 놓고 우리는 사활을 걸어야 한다. 노동자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운명은, 마지못해 하는 이는 끌고 가지만, 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길잡이가 되는 법이니까.
오민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