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련에서 발행한 <사회주의자>1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
2007년 대선 평가와 노동자 정치의 과제
최영익
2007년 대선은 많은 지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거대한 대중투쟁의 표현, 결실이라는 점에서가 아니다. 진실을 말하자면, 80년대 말 이래 대선들 중에서 이번 대선처럼 대중의 열정과 분리된 “김빠진 대선”은 없었다. 그럼에도 07년 대선은 상당한 지각 변동을 불러오고 있다. 특히 노동자 정치운동의 영역에서 그렇다. 민노당의 내분 사태, 분당파들의 등장, 소위 노동운동 좌파들의 새로운 움직임 등이 그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곤 한다.
물론 에누리하고 접근해야 하지만, 이러한 지각 변동을 관통하는 본질적 측면이 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그 출발을 선언했던 한국 노동운동이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개막해야 한다는 절박한 요청이다. 07년 대선은 이러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누구도 피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 방식으로 던졌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이 질문에 어떤 방식으로―개량주의적 방식으로 또는 혁명적 방식으로―답하든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다!’
사실 07년 대선이 무언가 의외의 결과를 보여준 것은 아니다. 다만 07년 대선은 87년 이래 약 20여 년간 전개되었던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성과와 한계, 특히 그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그 ‘한계’를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그로부터 그 한계를 돌파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전망을 찾아내는 것, 바로 그것이 노동자 정치의 과제다. 이 글은 그것을 위한 ‘도전적 분석과 문제제기’를 뜻한다.
1. 07년 대선, 무엇이 문제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다!
좌파의 몰락 - 거짓말
부르주아 언론들은 입을 모아 외친다. “좌파가 몰락하고 우파가 약진하다!” 이것에 속아넘어가는, 많은 이들이 질문한다. “BBK 동영상 공개로 이명박 당선자가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사기꾼에 지나지 않다는 점이 명명백백하게 폭로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한국 사회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마치 불가사의한 현실을 보는 듯 놀라자빠지는 사람들은 한국사회의 정치적 후진성을 거론하면서 핑계대곤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사회의 정치적 후진성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이번 대선 결과는 한국 사회도 서유럽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우파 정치세력의 약진’은 이른바 민주주의가 안착되어 있다고 하는 소위 정치 선진국 유럽에서도 자주 벌어지는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르주아 우파 정치세력과 부르주아 중도 정치세력, 나아가서 개량주의 노동자당, 개량적 사회민주당이 시계추처럼 번갈아가면서 정치무대의 주인공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시계추 진자운동은 때로는 왼쪽으로, 때로는 오른쪽으로 향한다. 그때마다 부르주아 언론들 혹은 개량주의 언론들은 ‘좌파 압승 우파 몰락, 혹은 우파 압승 좌파 몰락’으로 묘사하면서 대서특필하곤 한다. 한국 부르주아 언론의 호들갑은 유럽 언론들의 호들갑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과 한국 언론들의 대선 결과 평가는 전적으로 부르주아 언론과 개량주의 언론의 편협한 관점을 반영할 뿐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정치적 관점에서 모든 사물을 바라본다. 이들은 부르주아 정치를 벗어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렇기에 이들에게는 이 부르주아 정치 내에서 전개되는 이른바 좌우 대립이 유일한 좌우 대립이고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치세력들 사이에서의 좌우라고 하는 것은 ‘악독한 사장과 덜 악독한 사장’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종이 한 장도 안 되는 것이다. 결국 부르주아 언론의 호들갑은 자본주의를 지지한 채 단지 그 내에서 약간의 정책 차이만을 갖고 있는 좌우파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영향력 하에 노동자 민중을 묶어두는 허구적 장치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번 대선에서 참패한 좌파정부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무현 정부는 자본주의 정부이고, 노동자 민중에게 적대적인 우파정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5년 동안 수행한 정책을 보라. 이것들은 유럽의 부르주아 중도 정당들의 정책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우익적인 자본주의 정책에 불과했다. 이명박 신정부는 노무현 정부 정책의 정치적 ‘계승자’이자, 더 적극적인 집행자일 뿐 ‘대립자’는 결코 아니다.
자본가 정치세력들의 반동화
객관적으로 볼 때, 사회적 위기국면(이것은 세계자본주의 모순의 전면적인 폭발에 의해 만들어진다)이 아직 개시되지 않았는데도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으로의 사회적 양극화는 분명하다. 이것은 정치적 무대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자본가계급의 입장을 노골적이고도 더 전면적으로 대변하는 부르주아 우파 정치세력들이 자본가계급 내에서 주도권을 형성하게 된다.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추세를 고려할 때, 부르주아 정치세력의 우향우 행보는 가속화될 것이며, 계급투쟁의 특정한 국면에서의 일시적 필요가 없다면 자본가계급은 더욱더 우파적인 부르주아 정치세력에 힘을 실을 것이다. 통합신당과 같은 부르주아 중도세력의 입지는 가면 갈수록 좁아질 것이며, 이들은 가면 갈수록 부르주아 우파 세력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반동화될 것이다. 이는 이미 노무현 정부가 적나라하게 증명했던 것이다.
이것은 정치적 수준에서도 쇠퇴기의 자본주의의 망령이 작용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나마 존재했던 부르주아 민주주의마저도 반동화된 자본가 정치세력은 부담스러워 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민주주의 일반에 대한 파괴현상이 강화될 것이다. 결국 경제적 수준에서 생산력의 보호와 발전이 사회주의로의 전진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듯이, 정치적 수준에서도 인류가 발전시켜온 민주주의 성과를 보호하고 확대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통해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노동자 민주주의, 즉 노동자 권력만이 그것을 수호하고 온전하게 실현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적 수준에서나, 정치적 수준에서나 공히 반동성을 드러내고 있고, 이것은 자본주의 정치세력에 맞선 노동대중의 투쟁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80년대와 90년대 초의 환상들
80년대를 관통해 진행되었고, 87년에 정점에 도달했던 민주화운동은 한국 노동운동의 대중적 진출을 위한 ‘정치적 토양’―노동자의 조직과 투쟁, 선전 선동의 자유―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눈여겨봐야 할 지점은 이것이 한국 노동자계급을 상당 부분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환상으로 내몰았다는 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마취 상태는 90년대 이후에도 상당 기간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리들의 쟁취가 노동자들에게 아무리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칠지라도, 만약 그것의 “부르주아적 성격과 그에 따른 결정적 한계들”에 대해 경고하고 “노동자 민주주의(노동자 권력 수립)”를 우선시하지 않는다면,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노동자들을 포섭해버리는 엄청난 문제가 초래되고 만다. 바로 그런 상황이 80년대와 90년대 내내 한국에서 진행되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압도당해 버렸다.
이것은 80년대에 노동자 정치 운동을 주도했던 민중주의 정치세력들의 근원적 한계―약간의 사회주의 양념을 치기는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입장에 갇혀 버렸던 한계―에 비춰 볼 때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전후로 하는 시기에 계급투쟁 고양의 물결 속에서 현장의 선진노동자들이 외쳤던 “노동해방”이란 구호는 장식품이 아니었고, 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 표현도 아니었다. 그것은 혁명적 사회주의의 세례를 충분히 받지는 못했지만, 계급투쟁 속에서 선진노동자들이 본능적으로 취했던 ‘수줍은 사회주의’의 표현이었다. 이것을 간파한 영리한 민중주의 정치세력들은 “급진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사회주의”라는 양념을 급히 가미하면서 선진노동자들의 열망을 흡수해갔다. 민중주의 정치세력들은 선진노동자들의 가세로 빠르게 성장하면서 대중적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기에 “양념”은 걷히기 시작했다. 87년 민주화의 봄 이후, 90년대 초반에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착되기 시작하자, 민중주의 세력들의 대다수는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사회주의 양념을 걷어내면서 급진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로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당들, 심지어는 빠르게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외양을 갖추면서 재정비에 나섰던 구 군사독재 정당들의 일부로 편입되어 나갔다. 대부분의 민중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로 탈바꿈시키고, 급진적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내건 개량주의 정당의 일부로 전화되어갔다. 민주노동당의 대개의 지도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사회주의에 ‘양념’ 이상의 의미를 부여했던 극소수 세력들만이 이에 반발하면서 혁명적 노동자 정치세력의 일부로 자임하고자 했다. 하지만 마지막 부류는 전체로 볼 때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이러한 가운데 90년대 내내 작렬했던 현장의 거대한 계급투쟁의 물결은 90년대 초반 이후 약화되기 시작했다. ‘노동해방’이라는 ‘수줍은 사회주의적 열망’도 일시적으로 약화되게 되었다. ‘노동해방’을 위해 헌신할 결의가 되어 있던 다수 선진노동자들은 ‘민중주의 세력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로의 변신’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투적 조합주의 뒤에 숨거나 대개의 경우 정치적 염세주의에 빠져 정치활동을 포기하고 말았다. 일부 노동자들은 계급투쟁의 침체 속에서 ‘노동해방의 열망’을 포기하고, 민중주의 정치세력을 따라서 ‘급진적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빨려 들어갔다. 특히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이것이 민주노동당 탄생의 토대를 구성했다. “일어나라! 코리아!”의 국민승리21 시절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의 대다수는 “급진적 민주주의자” 이상으로 결코 행동하지 않았다. 여기에 민족주의자들까지 가세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렇게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환상들”을 박살내고,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혁명적 도전”을 개시할 때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성, 그리고 이 독립성에 기초한 혁명적 노동운동의 출발이 가능해질 수 있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완전한 해방으로 전진하는 데서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할 ‘경험의 학교’다. 왜냐하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가장 큰 의미는 광범위한 노동대중으로 하여금 부르주아 정치체제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개선할 수 없다는 점,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혁명적 노동자 민주주의(노동자권력)로, 그리고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경제혁명으로 전진해야만 한다는 점을 가르쳐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없다.
환상에서 깨어나고 있는 대중들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모든 계급들에게 피할 수 없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노동계급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안정된 일자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실업자로, 비정규직으로 신음하고 있다. 대기업 노동자들조차 정리해고와 명예퇴직 등의 해고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물가인상률을 겨우 쫓아가기 바쁜 낮은 임금은 노동자의 생활처지를 지속적으로 악화시키고 있다. 노동강도는 계속 빠르게 증대하고 있으며, 이것은 노동자의 건강과 삶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고된 노동에 지친 노동자들은 충분한 휴식도, 사고와 조직을 위한 여유도 갖지 못한 채 병자로 전락하고 있다. 평균수명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퇴직연령은 강제적으로 낮아지고 있는 상황은 노후에 대한 불안감을 열배 이상 증폭시키고 있다.
이것은 가장 평범한 노동자들에게도 다음의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탈출구는 도대체 어디인가?” 노동조합의 경험도 없고, 사장에 맞서 한 번도 단결해 항의해보지 않은 후진적 노동자들일지라도, 한마디로 노동자 의식이 아직 전혀 없는 가장 후진적인 노동자들일지라도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이런 비참한 상황으로부터 어떻게 탈출할 수 있는가’라는 절박한 질문을 매일처럼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질문은 이곳 한국에서만 던져지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먼저 등장한 나라들에서는 오히려 이런 질문이 훨씬 전에 먼저 던져졌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문제의식과 고민을 더 근본화시키는 객관적 토양이다. 한마디로 노동대중의 좌익화를 만들어내는 객관적 토양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놀음’은 노동대중에게 이제 외면받기 시작하고 있다. 노동대중은 여러 경험 속에서 스스로 묻고 대답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대가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확대를 위해 기꺼이 투쟁했으며 적극 지지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아무 것도 우리에게 선물한 것이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착되었다고 하지만, 경제적으로 우리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불안정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도 우리 노동자들에게는 아무런 실권이 없다. 우리는 단지 투표소에 가서 우리를 지배할 자들을 정기적으로 선출할 뿐이며, 이들은 누가 되건 관계없이 우리의 삶을 악화시키고 우리의 정치적 권리를 실제로는 박탈하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우리를 허수아비 주권자로 만들고 있을 뿐이다.”
이런 경험의 학교는 말 그대로 필수적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의 치떨리는 경험의 학교를 통과하기 전에도 노동자혁명으로 직행할 수 있는 아주 특수한 경우(예컨대 1917년 10월 러시아 노동자혁명)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이 학교를 통과함으로써 노동계급은 노동자혁명의 필수성을 자각하게 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실제 경험은 노동대중의 고민과 의식을 근본화시키면서, 좌익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지금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다.
노쇠한 노동조합 관료층은 급진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정신과 분위기를 뒤따르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2중대와 같은 정치노선을 취함으로써 열린우리당이라는 대표적인 부르주아 민주주의 세력의 자리를 대체하는 성공(?)을 꿈꾸는 자들이 민주노동당 상층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평범한 노동대중일지라도, 이미 그들의 정치의식을 뛰어넘기 시작하고 있다. 평범한 노동대중은 반대로 질문하고 있다: “그 놈이 그 놈이다. 노무현의 열린우리당,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당은 사기꾼 집단이며, 우리의 생존을 파괴하는 놈들이다!” 이것이 열린우리당 잔재 세력들에 대해 07년 대선에서 노동대중이 내린 판결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열린우리당, 노무현 정부의 몰락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마취되어 있던 한국 노동대중이 빠르게 그 마취로부터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노동자 민주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전망을 열 수 있는 계기가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직 타락한 노조관료층만이, 민주노동당의 타락한 출세분자들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정치적 역설
계급투쟁의 기초는 나날이 격화되고 있다. 모순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며 단지 모순덩어리의 크기만을 늘리면서 폭발을 유예하고 있을 뿐인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 그러나 유예하는 그만큼 미래의 빅뱅의 폭발력을 크게 만들고 있을 뿐인 이 체제는 노동자들을 왼쪽으로 내밀고 있다. 가장 평범하고 보수적인 노동자들마저도 불안에 떨고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쌓아가도록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객관적 기초가 정치적으로 번역되어 나타나는 것은 직접적 일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정치역학 프리즘에 의해 모순적으로 굴절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한편으로는 혁명적 대안이 정치적으로 존재하고 있을 때,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거부하면서, 그리고 이 체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모든 정치세력들을 ‘우익’으로 몰아붙이면서 혁명적 노동자 정치운동의 방향으로 분출된다. 그 근본 토대에서의 대중의 좌익화는 ‘정치적’으로도 분명하게 좌익화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만약 혁명적 정치대안이 부재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첫째 정치적 기권주의, 즉 수동적 보이콧이 노동대중 사이에서 발전한다. 이들은 “그 놈이 그 놈이고, 이런 정치세력들 사이의 난장판에 끼어들 이유가 없다”고 느낀다. 이것은 선거불참으로 나타난다. 자본주의가 오래될수록,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경험이 오래되면 될수록 이런 층은 두터워진다. 소위 선진국의 낮은 투표율은 그것을 표현한다.
둘째,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환멸을 느끼지만, 이를 대체할 대안을 찾지 못하는 노동대중의 상당수는 부르주아 정치세력, 그리고 개량주의 정치세력의 영향력을 완전히 뛰어넘지 못한다. 그 결과 노동대중은 때로는 부르주아 중도세력들(한국의 경우 통합신당이나 문국현 세력, 유럽의 경우 중도 자본가 당)이나 개량주의 세력(한국의 경우 민주노동당, 유럽의 경우 개량적 노동당이나 사회민주당)의 영향력 하에 포섭되고, 때로는 부르주아 우익(한국의 경우 한나라당, 유럽의 경우 보수당)의 영향력에 빨려든다. 이것이 시계추 운동과도 같은 자본주의 내의 정권교체 그리고 이른바 우파와 좌파가 번갈아가면서 집권하는 현상을 낳는 원인이다.
두 세력 모두의 성공 비결은 간단하다. 노동대중이 혁명적 대안을 찾지 못한 가운데, 상대방의 실정과 한계를 공격하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를 자기편으로 흡수해내는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의 성공 비결도 바로 그것이다. 노무현 정부, 즉 통합신당의 실정과 한계를 공격하면서 대중을 자기 지지 기반으로 흡수한 것 말고는 이명박의 성공을 설명할 길이 없다. 이런 모습은 만약 혁명적 정치대안이 조직되지 않는다면, 얼마 뒤에는 반대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통합신당과 같은 부르주아 중도세력이 한나라당과 같은 부르주아 우익의 실정과 한계를 공략하면서 대중을 파고들 것이다.
자본주의 내에서의 이런 시계추 운동은 말 그대로 찻잔 속의 폭풍이다. 여기서는 정치적 의미에서 대중의 좌익화나 우익화를 거론할 여지가 없다. 당장 대중이 부르주아 우익을 지지할지라도, 그것은 혁명적 대안의 부재 상황이 강요하는 제한적인 정치적 우경화일 뿐, 근본적인 우경화와는 거리가 멀다.
진정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이 과정에서 노동대중이 근본적 문제의식을 발전시키며,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경험의 학교를 통과하면서 진정한 좌익적 전망―노동자권력 수립과 생산수단의 사회화―을 붙잡을 수 있도록 훈련된다는 점이다. 만약 부르주아 정치세력, 개량주의 정치세력, 그리고 이들의 선전 선동 매체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봐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그것이다. 이번 대선의 결과는 노동대중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경험의 학교’를 이미 졸업하기 시작하고 있으며, 이 경험을 흡수 소화해내서 정치세력화 할 수 있는 ‘혁명적 정치대안’을 시급히 일정에 올려야 할 필요가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오직 더욱더 근본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계급 정치세력을 통해서만 반동적 자본가 정치세력에 맞선 전면적인 투쟁이 가능해진다. 이 투쟁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현 시대의 절박한 역사적 과업의 완수로 연결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만약 노동자계급이 정치적으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계급투쟁의 격화를 야기하는 객관적 토대는 정치적으로 번역될 때는 자본가계급 정치의 반동화와 노동자운동의 위기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사회 전반의 정치적 우경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객관적 토대에서 대중의 좌익화 경향’은 정치적 수준에서는 역설적으로 ‘대중의 정치적 우경화’로 둔갑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다.
20세기 전반부의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 그리고 이것이 불러온 사회적 위기국면은 세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준비가 부족했던 이유에서 파시즘의 광란이라는 야만주의를 불러왔다. 그리고 그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생산력의 전반적 파괴 등 혹독한 대가를 치르면서 일시적으로 극복되었다. 지금 세계는 제2의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 사회적 위기국면을 준비해 나가고 있다. 이런 대격변의 시기가 어떻게 귀결될지는 온전히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준비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사회주의냐 야만주의냐’라는 로자의 질문은 그 시기에 다시 한 번 인류 앞에 던져질 것이다. 다만 더욱 분명하고, 더욱 치명적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등장은 그러한 질문을 예고하는 사전 예행연습의 시기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몰락하고 있는 사람들
이러한 계급투쟁 지형에서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계급을 파산의 길로 인도하면서, 스스로도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정책을 채택하면서 대담하게 전진하는 대신, 오른쪽으로 떠밀리고 있는 부르주아 중도세력의 공백을 메우는 데 급급해왔다.
민주노동당의 정책은 간단하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상생하는 세상을 건설하자. 자본주의의 혁명적 타도 없이 노동자 민중의 생존권을 보호하자. 동시에 자본가들에게도 적절한 이윤이 보장되도록 하자. 낡아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침식당하기 시작하고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사수하고 완성하자.”
과거에 이것은 부르주아 중도세력(자유주의자들)의 슬로건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이들의 정책을 물려받고 있다. 부르주아 중도세력은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중도적인 전망을 현실에서 추방하고 있음을 이미 깨달으면서 노골적인 부르주아 우익세력으로 변신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집권기간은 그러한 변신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은 이런 상황이 부르주아 중도세력이 가졌던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간주한다. 그 방법은 무엇인가? 부르주아 중도세력의 정책을 계승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대자본가들에 의해 밀려나고 있는 중소자본가들에게 외친다. “우리가 당신들을 보호하겠다!” 그러나 중소자본가들은 대답한다. “착취자로서 우리는 더욱더 악랄하게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소. 우리는 더욱 강력한, 더욱 반동성이 철두철미한 자본가 정치세력을 확고히 지지할 것이오.” 민주노동당은 중소상인들에게 외친다. “우리가 당신들을 보호할 수 있소!” 그러나 중소상인들은 대답한다. “당신들의 전망은 아무런 현실성이 없소. 당신들이 절대 넘어서지 않으려 하는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당신들의 전망보다 부르주아 우익의 전망이 천 배 만 배는 더 현실적이오!”
민주노동당은 노동대중에게 외친다. “비정규직을 없애고 해고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여기서는 그들의 정책이 진정 비정규직 철폐인지 아니면 단순한 차별 완화인지, 모든 유형의 해고 철폐인지 아니면 해고 요건을 까다롭게 만드는 소심한 수준의 것인지는 논의할 필요가 없다. 더 중요한 지점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대중은 민주노동당의 약속에 대해 신뢰하지 못한다. 왜인가? 가장 우선적으로는 민주노동당의 힘과 행동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의회주의적 전망이라는 독약을 노동운동에 투입한 나머지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힘, 가령 노동자 총파업과 같은 전망을 약화시켜 버렸다. 그 결과 노동대중은 과연 민주노동당이 대표하는 조직된 노동운동이 약속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들이 느끼는 노동운동의 상태란 제대로 힘을 써보지 못하고 계속 수세로 내몰리는 허약한 것이다. 이런 허약성은 개선될 가능성은커녕 계속 악화되고 있다고 그들은 느낀다.
또한 방대한 노동대중은 조직된 노동운동의 행동을 보면서 이 조직된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민주노동당의 약속에 대한 신뢰 여부를 결정한다. 그런데 노동대중이 느끼는 노동운동의 상태는 어떤 것인가? 현재 조직된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노조운동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대담한 투쟁을 조직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는 권영길과 같은 비정규직 도입을 합의해준 당사자들이 민주노동당의 핵심 간부진을 형성하고 있다. 금속노조는 현대차에서 비정규직 도입을 합의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의 고용안전판으로 대놓고 규정한 정갑득과 같은 인물이 위원장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현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접하는 노동조합 지도자들, 간부들의 대다수는 비정규직 문제에 무관심하다. 이것은 실업자문제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여기서는 상황이 더욱 비극적이다. 노동대중이 보기에 조직된 노동운동은 조합원들에 대한 정리해고마저도 막을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의 약속에 대해 노동대중은 전혀 신뢰할 수 없다. 노동대중은 민주노동당의 약속마저도 부르주아 정치세력들의 껍데기 공약과 똑같은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노동대중의 상당수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기보다는 기권하는 편을 선택한다. 일부는 차라리 그나마 실현가능성을 갖고 있는 부르주아 정치세력을 선택하고 만다.
객관적 상황이 이런데도, 민주노동당은 출발점에서부터 지금까지 의회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정책을 고수하고 오히려 발전시킴으로써 스스로 몰락의 길을 재촉해왔다. 07년 대선에서도 노동자계급 정책을 거부한 채, 문국현과 같은 부르주아 중도세력과도 차별성이 거의 없는 개량주의 정책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이 당은 노동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높여가는 객관적 토대인 노동현장에서의 계급투쟁과의 연결성을 갖고 있지 않다. “현장에 기반한 계급투쟁” 대신 “의회주의적 활동”에 철저히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동운동과 민주노동당 사이의 연결성이란 단지 ‘노동조합 관료집단’과 ‘정치적 개량주의자들’ 사이의 결합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당원을 구성하는 평범한 노동자의 대부분은 정기적으로 표를 던져주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의 객관적 처지란 부르주아지에게도, 중간계급에게도 인기를 끌지 못하지만, 노동대중에게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텅 빈 수레’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대중정당의 외피를 쓰고 있는 ‘노조관료집단과 개량주의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중간계급 지식인들, 전투적 민족주의자들의 연합 써클’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조직된 노동대중의 일부가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표 찍기 정도의 아주 제한적인 지지를 보낼 뿐인데, 이것조차도 지금 시들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들이 얽혀서 07년 대선의 참패와 민주노동당의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스스로가 초래한 위기와 한계 앞에서 민주노동당의 지도자들은 놀라 자빠질 만큼 당황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이 취하고 있는 노선―다름 아니라 노동자계급 노선과 충돌하는 중간계급 노선―은 이런 몰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수단을 결코 제공할 수 없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이라는 몰계급적 노선, “의회주의 노선”, “노동자 권력을 거부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책”, “자본의 몰수와 사회화를 거부하는 소심한 개량주의 분배 정책” 등 민주노동당의 핵심을 구성하는 개량주의 정책들로는 상황을 타개할 수 없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완전한 2중대가 되어 부르주아 정당에 기어들어가든지 아니면 파산을 면할 길이 없다.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2
민주노동당 분당파가 걷고 있는 길도 민주노동당 당권파의 길과 별 다르지 않다. 이들은 거의 모든 지점에서 “당권파의 개량주의 길”을 공유하고 있다. 종북주의 논쟁은 혁명적 투사들이 반동적 북한 정권 및 이 정권을 지지하는 민족주의자들에 대항해 전개하는 전투가 아니라 더 순수한 사민주의의 길을 걷고자 하는 개량주의 우파들이 민주노동당 당권파에 대항해 전개하는 전투에 불과하다.
상황은 더욱 비극적이다. 최근에 탈당한 노회찬 의원은 임종인 무소속 의원, 고진화 한나라당 의원 등과의 이른바 진보 연대를 전망으로 제기하고 있다. 조승수를 중심으로 하는 탈당파들은 녹색시민운동이나 ‘사회적 공화주의’라는 변종 사민주의를 내건 사회당과의 연합에 집중하고 있다. 이것은 그들 대부분이 민주노동당 탈당을 통해, 민주노동당보다 더 오른쪽에 있는 정치세력을 건설하려 하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들이 걷고 있는 길은 민주노동당이 이제껏 걸어왔던 길을 재현하는 길이다. 이들은 민주노동당2 이상이 아니며, 이들의 노선은 노동자계급과 노동자계급정책으로부터 더욱 멀어지는 노선이다.
대다수 분당파의 정책이란 간단하다. “민주노동당이 유럽 사회민주당의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한 결과가 이번 선거 패배의 원인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당권파인 민족주의자들의 정책이나 대다수 분당파의 정책이나 그 개량성과 탈계급성, 현장 노동대중과의 연결성의 부재라는 점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 게다가 그들은 혁명적 계급투쟁 대신 의회주의 캠페인에 철저하게 매몰되어 있다. 그들은 더 철저하게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책에 의존하고 있다. 이들 또한 몰락을 피할 길이 없다.
몰락을 피할 유일한 길
모든 자본주의 나라를 휘감고 있는 동일한 객관적 토대는 자본주의의 쇠퇴다. 거대한 생산량에 비해 그다지 성장하고 있지 않은 구매력은 시장을 갈수록 포화상태로 내몬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과 인도가 아직 어마어마한 규모로 신규시장을 열어주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렇다. 적절한 이윤율을 보장해주는 투자처를 찾지 못한 거대한 과잉자본들이 금융투기자본이 되어 전 세계를 배회하면서, 수시로 국지적 경제위기를 잉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경쟁의 압력을 무한대로 증폭시키고 있다. 무정부성과 경쟁의 압력, 낮은 이윤율이 삼박자를 이루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교란시키고 있다. 이 상황을 극복할 여력이 자본주의 체제에는 더 이상 없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실업률, 도처에서 터져 나오는 전쟁, 널뛰는 주식과 부동산가격 때문에 수시로 발생하는 파산자들, 터질듯 부풀어 오르는 경쟁의 압력에 의해 계속 확대되는 도산, 대량해고, 비정규직화, 노동강도 증대, 임금수준 악화 등이 현재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것들이다.
이런 상황 앞에서 쇠퇴하는 자본주의 호의 키를 쥐고 있는 자본가계급은 상황을 타개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들은 자신의 이윤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호를 어떻게든 살리려 필사적으로 발악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더욱 반동화되면서, 그들은 인류를 쇠퇴와 위기,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노동계급 대중 앞에서 혁명적 탈출구를 제시할 수 있는 노동자운동의 부재 상황,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반드시 자본가계급, 그것도 추진력을 갖춘 자본가 정치세력에 끌릴 수밖에 없는 중간계급의 방황을 자본가계급 정치세력들, 그것도 우파 자본가 정치세력들이 맹렬히 파고들고 있다. 그들의 슬로건은 간단하다. “노동자계급을 희생양으로 삼아 쇠퇴하는 자본주의를 부활시키자. 자본가들에게 이윤추구를 위한 완전한 자유를 제공하자. 노동자운동을 무장해제 시키자. 자본가 정부가 자본가법률을 단호하게 집행하도록 만들자. 여기에 걸림돌이 되는 민주주의는 제거하자. 그래서 100% 자본의 공화국을 건설하자. 그러면 기업이 살고, 국가경쟁력이 회복되어 일자리가 늘고 장사도 잘 될 것이다.”
이에 대해 개량주의자들은 말한다. “자본주의 호를 수선하자. 그러면 노동자 승객과 자본가 승객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니 자본가 정치세력은 키를 우리에게 넘기라!”
그러나 침몰해가는 자본주의 호는 선장을 바꾼다고 해서 침몰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자본주의 호에서 과감히 뛰어내려 사회주의 호로 갈아타지 않은 채 자본주의 호에서 생존을 도모한다면, 운명은 정해져 있다. 침몰하는 자본주의 호와 함께 노동자 민중, 나아가서 인류의 운명이 거대한 위험에 빠지는 것이다. 인류가 발전시켜온 문명과 생산력이 공황과 전쟁 등으로 파괴당하고, 민주주의적 성과는 유실되며 인류 역사가 엄청나게 후퇴하는 그러한 전망은 결코 기우가 아니다. 이미 냄새가 진동하며 썩어 들어가고 있는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사회주의로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야만주의로 추락할 것인가”를 전 세계 노동자 민중에게 정면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혁명적 정치세력의 건설, 즉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 당을 우리 앞에 절박한 과제로 던진다.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압력, 그리고 이 압력을 반영하는 제 계급의 상황은 계급투쟁을 전면화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의 생존의 길은 간단하다.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망령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사회주의의 길로 전진하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이윤이 아닌 노동자 민중의 생존, 무정부적 생산이 아닌 전체 사회구성원의 필요와 생산능력을 고려한 계획적 생산, 경쟁이 아닌 전 세계적 협력의 길을 의미하는 사회주의로의 전진 말고는 노동자계급과 인류의 운명을 지킬 다른 길이 없다.
다음으로 이번 대선은 80년대와 90년대 내내 영향을 미쳤던 부르주아 민주주의로부터 노동대중이 벗어나고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다만 이것은 혁명적 대안의 부재 상황에서 굴절되고 왜곡되어 버렸을 뿐이다. 하지만 개량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2중대의 길을 계속 가려하고 있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형편없음을 치떨리게 경험해온 노동자들은 오히려 부르주아 우익 세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노동대중의 소중한 경험을 헛되이 하지 않으면서, 이것을 노동자 권력을 향한 대중적 운동의 출발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혁명적 노동자 정치세력의 건설은 더욱 사활적으로 중요해지고 있다.
민주노동당과는 전혀 다른 정당, 다름 아닌 혁명적 노동자계급당을 건설해야만 노동해방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 심지어는 이 혁명정당의 건설 없이는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압력을 뚫고 노동자운동의 대중화를 이룩해낼 수도 없는 상황에 우리는 직면해 있다. 개량주의 세력은 일시적으로라도 노동자운동의 전진을 위한 가교를 설치할 수 없다. 이 가교마저도 오롯이 혁명적 노동자 정치세력의 분투를 통해서만 놓일 수 있다. 현장 노동대중의 투쟁력, 의회 바깥의 계급투쟁에 중심을 두는 것,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계급정책, 현장의 노동자소조를 바탕으로 한 조직운영 등 사활적인 원칙을 기반으로 실천하는 혁명적 노동자계급 정당만이 노동대중 앞에 노동자운동의 힘을 보여주고, 그들의 신뢰를 끌어내며 진군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자계급의 힘이 발전하게 될 때만, 중간계급 하층은 비로소 자본가 정치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노동자계급 뒤로 결집할 수 있다. 이것은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야만주의에 맞서 인류와 역사를 대표하여 노동자계급이 전면전을 펼쳐 승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이 사활적인 지점을 분명히 하고, 민주노동당에 대담하게 대당하고 ‘바로 이 세력에 의해서만 미래를 열 수 있다’고 호소하는 혁명적 세력 건설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모든 혁명적 노동자조직들이 이 임무에 복무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 이 혁명적 세력은 당장에는 작지만 혁명적 노동자계급 정책과 노선을 현장의 계급투쟁에 근거해 집행해 나가야 한다. 그리하여 혁명적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의 초석을 놓아야 한다.
2. 역사적 분석과 과제
민주노동당의 몰락과 우향우에 주목하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기 쉬운 오류는 이것을 민주노동당에만 국한해서 접근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원적으로 접근할 때, 특히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적 발걸음과 연결지어 접근할 때, 우리는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더 심도 깊고 본질적인 교훈을 끌어낼 수 있게 된다.
‘부르주아적’ 혹은 ‘개량주의적’이란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민주노동당은 어느 정도 “노동자당”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이 당의 구성이나 이 당을 지지하는 대중들을 고려할 때 그렇다. 실제로 민주노동당의 형성과 이 당의 일정한 성과는 모두 조직된 노동자들의 지지와 지원을 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더 큰 맥락에서 보자면, 민주노동당은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96-97년 노동법 총파업에 이르기까지 전개되었던 계급투쟁을 반영한다. 이 계급투쟁이 노동자들 속에서 배출한 지도자들, 이 계급투쟁에 참가한 노동자들의 희망과 에너지만이 아니라 그 한계까지도 민주노동당은 고스란히 반영한다. 한마디로 민주노동당은 87년에 시작되어 대략 90년대 말까지 진행된 계급투쟁의 한 시대를 반영한다. 이 한 시대를 관통했던 한국 노동자들의 의식과 경험, 결코 바로 떨쳐버릴 수 없었던 치명적인 한계까지도 민주노동당은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러한 접근은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의 배신적 행동을 조금이라도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도자들의 한계와 배신적 행위들의 배후에 놓인 한국 노동운동의 객관적 한계를 점검하고, 이로부터 개량주의 지도자들을 넘어설 수 있는 전망을 모색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 점에서 1848~49년 프랑스에서 전개된 계급투쟁이 일단락된 뒤, 이 계급투쟁의 교훈을 제시하고자 했던 맑스의 언명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1848년에서 1849년까지의 혁명 연대기에서 비교적 중요한 각 편들은 불과 몇몇 장을 제외하고는 다음과 같은 제목을 달고 있다: 혁명의 패배!
이러한 패배들 속에서 쓰러진 것은 혁명이 아니었다. 쓰러진 것은, 그때까지 첨예한 계급 대립으로까지 치닫지 않았던 사회적 관계들의 결과들, 혁명 이전의 전통적 부속물들이었다. ― 쓰러진 것은 2월 혁명 이전까지 혁명당이 벗어나지 못했던 인물들, 환상들, 관념들, 계획들이었으며, 2월의 ‘승리’가 아닌 일련의 ‘패배’들이 이러한 것들로부터 혁명당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혁명은 그 직접적이고 희비극적인 성과물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결속되고 강력한 반혁명을 산출함으로써, 적을 산출함으로써 그 전진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그 적과 맞붙어 싸움으로써 전복당은 비로소 진정한 혁명당으로 성장하였다.1)
맑스의 이 언명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부터 시작되었던 한국 노동운동의 한 시대를 분석하는 데서 물론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동운동의 성장 과정, 특히 노동자계급운동의 혁명적 세력으로의 도약의 합법칙적이고도 변증법적 과정을 이해하는 데서는 대단히 유용하다.
위대한 출발, 그러나 한계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한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을 만큼 폭발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한국에서 자본주의의 등장과 성장 속도가 기록적이었듯이, 이 자본주의가 양성해낸 노동자들이 노동자 투쟁으로 떨쳐 일어나는 과정도 급작스러울 만큼 빨랐고 노동자들은 단번에 거대한 규모로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해방”으로 표상되는 선진적 노동자들의 혁명적 열정, 그리고 “민주노조”로 표상되는 노동대중의 엄청난 자발성과 거대한 조직화 능력, 수많은 파업들에서 전개된 정부와의 물리적 공방전은 87년 대투쟁을 특징짓는 것이었다. 이 거대한 운동은 97년 정리해고제에 맞선 총파업투쟁에 이르기까지 대략 10여 년 동안 쉴 새 없이 자신을 드러냈다.
이 거대한 운동 앞에 혁명적 운동가들이 기뻐했음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운동이 갖고 있었던, 아니 막 출발한 노동운동이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던 치명적인 한계까지도 혁명가들이 보지 못할 만큼 상황을 압도해버렸다. “노동해방”을 향한 선진노동자들의 운동, 그리고 “민주노조건설”을 향한 노동대중의 거대한 열정의 한 시대가 마감되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우리는 냉철한 눈으로 한 시대를 점검해보아야 한다.
당시에 선진노동자들이 보여준 “노동해방을 향한 열정”은 물론 혁명적 사회주의로 향하는 거대한 본능이었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본능적 차원”에서만 그러할 뿐, 확고한 의식으로 무장되지 못한 모호함을 특징으로 했다. “노동해방”을 위해 목숨을 걸 의지를 갖고 있었던 최상의 투사들까지도 “노동해방의 실제 정치적 내용”에서는 전혀 분명하지 못했다. 노동자 농민 학생의 연합된 민중권력이라는, 계급적 관점에서 볼 때 상당히 모호한 관점에서부터 시작해, “노동해방=민주노조의 합법화와 민주주의 사회의 수립”으로 여기는 입장, 소련이나 북한의 스탈린주의 반동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를 노동해방 사회로 확신하는 입장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고 있었다. 민중당 건설부터 시작해 민주노동당에 이르기까지 “노동해방=노동자 대통령 배출, 노동자 정당의 의회 집권”으로 바라보는 경향도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배출한 선진노동자들 속에서 두텁게 자리잡고 있었다.
마음 속 깊은 본능이 취하는 방향이라는 점에서는 이러한 모호한 관점은 물론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약 이 본능을 “명확한 정치의식”으로 이끌 수 있는 혁명적 정치세력이 노동자계급운동 속에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면, 이 본능이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명료한 정치의식으로 연결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담당할 정치적 세력이 당시로서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사실 “노동해방=노동자 대통령 배출, 노동자 정당의 의회 집권”이란 의식은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의식이다. “노동해방=민주노조의 합법화와 민주주의 사회의 수립”이란 의식도 조합주의적 의식이다. 이처럼 87년 노동자대투쟁이 배출한 선진노동자들이 당시에 떨쳐버리지 못했던 “개량적이고 조합주의적인 환상들”은 불행하게도 극복되지 못한 채 고착화되어 버렸다. “노동해방”을 향한 열망에 숨어 있었던 모순적인 두 요소―하나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향하는 본능이고, 다른 하나는 개량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의식이다―중 전자는 살아 성장하지 못한 반면 후자는 널리 퍼져나가면서 고착화되어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더 넓은 대중적 수준에서 민주노조운동에서도 반복되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탄생시킨 민주노조는 노동자 권력 수립으로 향하는 이행적 조직으로 볼 수 있었다. 현장노동자들의 통제력과 잘 발달되어 있었고 실제로 작동하고 있었던 민주적 대표자 체계와 아래로부터의 소환권, 정치투쟁을 불사하는 강력한 전투적 의지 등은 그것을 입증한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노조 속에는 “정치적 계급투쟁과 혁명적 대중운동”으로 전진하기보다는 “자본주의 하에서 고용, 임금,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데 만족하고 전체 노동자들의 공동의 이해 대신 단사별 이해를 우선시하는” 조합주의적 의식들도 널리 자리잡고 있었다. 모순적인 두 요소 사이의 힘겨루기에서 결국 후자의 조합주의적 의식들이 승리해버렸다. 민주노조의 에너지를 노동자 권력 수립으로 이끌 수 있을 만큼 대중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혁명적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계의 본격적 분출
선진노동자운동과 민주노조운동 속에서 “건강하고 혁명적인 지향”이 약화되고,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이며 조합주의적인 경향”이 강화된 데는 민중주의 세력들의 우향우가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민중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우경화됨과 나란히 선진노동자들 속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식”을 불어넣었다. 그들은 “노동자 대통령 배출, 노동자 정당의 의회 집권”과 같은 의회주의적 전망을 노동운동의 정치적 방향으로 제시하면서, 87년 이래 10여 년간 한국 노동운동이 배출한 선진노동자들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늪으로 인도했다.
민중주의 세력들이 정치 영역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과 연결된 민주노조운동의 여러 고리들을 이용해, 특히 노조 상층 지도자들과의 끈을 매개해서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의회 밖의 진정한 정치투쟁의 주인공이 아니라 의회주의 세력을 표로 지지하는 수동적 존재로 전락시켜갔다. 그들은 정치 총파업과 같은 결정적인 실천은 모험주의적이고 불가능한 공상인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나갔다. “우경화되는 민중주의 정치세력과, 마찬가지로 우경화되는 노조관료층 사이의 유착과 역할분담”이 자리잡아갔고, 이것은 정치운동과 노조운동 모두에서 87년의 성과들을 유실시켜 나갔다. 그 가운데 민주노동당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건강한 현장 활동가들과 투쟁하는 노동대중의 상당수에게 민주노동당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막이 오른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다. 이 상징을 통해서 노동대중은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을 담아낼 수 있기를 희망했고, 여기에 힘을 실었다. 현장 활동가들의 상당수가, 특히 투쟁하는 노동대중의 대다수는 민주노동당을 통해 ‘노동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 이 환상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노동자들이 떨쳐버리지 못했던 바로 그 치명적인 환상을 반영했다. 노동자들은 민주노동당과 같은 의회주의 정당을 통해서 국회의원들을 배출하고 선거에 적극 개입함으로써 많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노동자들은 민주노동당의 개량적 정책들을 실현함으로써 해고와 비정규직이 없는 평등 세상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경험한 것은 정반대의 현실이었다. 의회주의적 노선은 노동계급의 투쟁으로부터 이 당을 분리시켰고, 자본주의에 맞선 노동자의 힘이 결정적으로 자라나오는 의회 바깥의 생산현장의 노동자 투쟁을 질식시켜 나갔다. 의회주의 개량정당이 탄생시킨 국회의원들이나 구청장 등은 노동계급을 대표하기는커녕 부르주아 질서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고 동화되어 나갔다.
민주노조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 권력을 향한 대중적 기구로 발돋움하는 대신 조합주의적 한계에 갇혀 버린 민주노조는 불가피하게 여러 약점을 드러내면서 어용노조의 수준으로 점차 하강해갔다. 중층화된 관료적 장치의 등장, 교섭중심적인 투쟁회피주의 경향의 확대, 87년 대투쟁으로 획득된 노동자 민주주의 전통들을 껍데기로 만들기 등의 쇠퇴가 잇따랐다. 이것은 미조직 노동자들에게서 민주노조건설을 향한 뜨거운 열망을 상당 부분 앗아갔다. 민주노조에 속한 조합원들 속에서도 이미 과거와 같은 민주노조에 대한 애정과 헌신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한 시대의 종말
민주노동당의 위기로 최종 정식화될 수 있는, 87년이 탄생시킨 1세대 한국 노동운동의 한 시대는 패배로 종말을 고하고 있다. 이 1세대 노동운동은 막 운동을 개시한 신생 노동자계급이 단번에 떨쳐버릴 수 없었던 치명적인 한계들 때문에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 1세대 노동자계급이 벗어나지 못했고 오히려 더 확대시켜 왔던 개량주의적 환상들, 헛된 기대들, 부르주아적 의식들은 결국 최근에 이르러 민주노조운동과 민주노동당의 위기와 파산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 이런 환상들, 헛된 기대들, 왜곡된 의식들이 노동자대중 속에서 추방되었다면, 민주노조운동이든 민주노동당이든 전혀 다른 성격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패배 속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이 쓰러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노동자들은 지금 자신의 환상과 헛된 기대, 부르주아적 의식들로부터 벗어나는 데 필수적인 경험의 학교를 통과하고 있다. 그들이 비판하는 민주노동당은, 그들이 의심에 찬 눈초리를 보내는 노동조합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과거에 가졌던 약점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의회주의 개량정당에 대한 경험과 비판을 통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분노를 통해서, 조합주의적 노동조합에 대한 뼈저린 경험을 통해서, 노동자들은 과거의 자기 약점에 대해 혹독하게 보복당하고 있다. 그리하여 혁명적 노동운동을 건설해야만 한다는 자각에 본능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약점, 그리고 이 약점이 초래한 거대한 패배와 대면하면서 노동자들은 비로소 혁명적 노동운동을 향해 다가설 수 있다. 진정한 혁명계급으로 노동자들이 조직되는 과정 또한 바로 그런 것이다.
87년 이후 첫 번째 계급투쟁 물결이 남겨준 교훈
현재 혁명가들과 선진적 노동자 투사들에게 요구되는 일차적 과제는 87년에 점화되어 타올랐던 첫 번째 계급투쟁의 물결이 남겨준 교훈을 습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교훈을 바탕으로 다음의 두 번째 계급투쟁의 시대를 인도할 좌표와 전망, 계획을 건설하는 과업에 치밀하게 착수하는 것이다.
첫 번째 계급투쟁 물결의 핵심 교훈은 다음과 같다. 놀랄 만큼 거대한 잠재력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물결은 이제 막 운동에 나선 한국 노동자계급이 당장에는 완전히 떨쳐버릴 수 없었던 개량주의적이고 조합주의적이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환상들, 그리고 신뢰해서는 안 되는 민중주의 지도자들로부터 받았던 영향력 때문에 승리로 나아가지 못한 채 중단되고 말았다.
이 물결은 한국노동자계급 최초의 정치적 진출과 정치적 각성을 반영한 노동자 당을 정점에 밀어 올렸다. 그러나 이 물결이 정점에 밀어올린 이 당은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노선 대신 중간계급의 입장에 갇혀 버린 1세대 한국노동자계급의 한계까지도 반영했다. 그것은 이 당에 “부르주아적 노동자 당”이란 모순적 성격을 부여했다. 이 첫 번째 물결은 그 정점에서 급속하게 하강하면서, ‘민주노동당의 위기와 파산’이란 참담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노동조합운동 영역에서도 동일하게 관철되었다. 이 물결이 정점에 밀어올린 역동적인 민주노조는 노동자 권력으로 향하는 한국 노동대중의 거대한 잠재력과 열망을 반영했다. 그러나 한국 노동대중이 막 발걸음을 내딛었던 초기 단계에서 떨쳐버리지 못한 조합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약점들은 이어지는 하강 시기에 모습을 드러냈다. 민주노조는 노동자 권력을 향한 대중적 전진과 동떨어진, 통상적인 수동적 노동조합으로 전락했다. 결국 대중적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관료들에게 장악되어 버렸다. 또한 극복되지 못한 채 오히려 확대되어 나간 조합주의적 약점은 운동의 장기적 이해보다 당장의 이익에만 급급한 ‘실리주의’ 독소를 퍼뜨리면서 노동대중의 의식을 자본주의에 결박해나갔다. 전체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공동의 계급적 이해 추구 대신 자신이 속한 사업장과 정규직만의 부분적 이해를 우선시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원자화되어 나갔다. 계급적 단결에 기초한 정치투쟁을 회피하고,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노동자의 이데올로기 전투를 경시함으로써, 노동조합은 고립되어 나갔고 정부의 탄압에 무기력한 처지로 내몰렸다. 이 모든 것들은 민주노조의 강점과 활력, 자신감, 전투 에너지, 노동자 권력을 향한 의지를 급속히 고갈시켜 나갔다. 이른바 ‘민주노조운동의 위기’가 덮쳤다.
결국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로부터 점화되어 ‘민주노동당의 위기와 파산’으로 폭발해버린 노동운동의 현 상황은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87년을 전후로 한국에서 탄생한 첫 번째 계급투쟁 물결의 하강, 즉 계급투쟁의 한 시대의 종결을 뜻한다. 우리는 이 쓰디쓴 결론으로부터 도망쳐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하나의 물결의 밑바닥은 곧 다음의 물결의 시작을 뜻한다. 현 국면은 첫 번째 계급투쟁의 물결은 끝난 반면 두 번째 계급투쟁의 물결은 예고되고 있을 뿐, 아직 본격적으로 개시되지 않은 “두 물결 사이의 막간극”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 국면이 혁명운동에서 역사적으로 점하는 지위는 ‘그 이전의 계급투쟁의 물결이 남겨준 역사적 교훈을 추출해서, 이로부터 첫 번째 계급투쟁의 패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만 비로소 다음번 계급투쟁의 승리를 준비할 수 있는 “좌표와 지도 세력, 그리고 혁명적 대중”이 떠오를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두 번째 계급투쟁의 물결을 더 높이 끌어올리고 그 정점에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 나아가서 노동자 권력 수립을 통한 노동자계급 해방의 완수라는 금자탑을 우뚝 세워낼 수 있는 체계적인 준비 작업에 착수하는 것이다.
새로운 그러나 위대한 결단
두 번째 계급투쟁의 물결을 예비할 좌표의 윤곽은 첫 번째 계급투쟁의 경험 그 자체로부터 이미 나와 있다. 이 좌표의 핵심부에는 “첫 번째 계급투쟁의 물결을 패배로 이끌었던 한국 노동자계급의 내적 취약성을 극복할 수 있는 튼튼한 대비책”이 자리 잡아야 한다. 민주노동당으로 집약되었던 민중주의 운동―이 운동은 비노동자계급적 노선,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 불철저한 타협적 지도자들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을 완전히 뛰어넘어 노동자계급의 노선과 노동자 권력 사상, 단호한 혁명적 지도자들로 구성된 혁명적 노동자계급당을 기필코 건설해야 한다. 최소한 혁명적 노동자계급당을 두 번째 계급투쟁이 본격화되는 국면에서 우뚝 세워낼 수 있는 의미 있는 혁명조직을 선진노동자 투사들 속에 뿌리내려야만 한다.
다음으로 이미 쇠락해버리고 있는 기존의 노동조합운동을 뛰어넘어, 노동자 권력을 향한 대중적 운동의 성격을 가미한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을 현장에서 조직해나가야 한다. 노동자 민주주의 기구들을 아래로부터 체계적으로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장의 노동자 투쟁을 정력적으로 조직하며 이 현장투쟁들을 연대망을 통해 계급투쟁으로 상승시켜나가는 역동적인 현장대중운동을 건설해나가야 한다. 이 운동은 형식적으로는 기존의 공식 노동조합 체계와 부분적으로 연결될 수 있지만, 그 실질적 내용에서는 노동조합 관료체계로부터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조합주의적, 부문주의적 전통과도 단절한 “평조합원운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사회주의 투사들과 전투적 선진노동자 투사들은 이 평조합원운동의 단호한 중핵이되, 혁명적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건 독자성을 고수함으로써 노동조합운동에 개입해야만 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을 구비하기 위한 객관적 토대는 첫 번째 계급투쟁의 물결이 남겨준 부정적 유산들이 자체 붕괴하거나 결정적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점차 열리고 있다. 민주노동당에 직접 가입했든 가입하지 않았든, 대부분의 선진노동자 투사들에게 사실상 “현재의 노동자 정당”으로 간주되었던 민주노동당은 붕괴하고 있다. 이제껏 민주노동당에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던 선진노동자들까지도 대부분 민주노동당에 노동자 정치활동을 무의식적으로 맡겨두고 비정치적 영역으로 후퇴해버리거나 ‘비판적 지지’ 수준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던 것이 객관적 현실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분당 사태와 대중의 눈에까지 이미 숨길 수 없을 만큼 명백히 드러나 버린 민주노동당의 거대한 위기는 대다수 선진노동자들에게 “민주노동당이 아니라면, 노동자계급을 정치적으로 이끌 다음의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이 정치적 대안으로 솟구칠 수 있는 1차적 토대이다.
물론 민주노동당과 같은 기존의 대안이 붕괴해가는 것만으로는 선진노동자들의 대다수를 혁명적 사회주의 편으로 전취할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져야 하는 것은 혁명적 사회주의로 향하는 선진노동자들의 계급적 본능과 직관, 경험을 대량으로 창출해내는 새로운 계급투쟁의 파고다. 후자는 예고되고 있을 뿐 아직 본격화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는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의 빠른 전진은 아직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다음은 가능하다. 가장 선진적이고 활력 있는 소수의 노동자 전위들을 혁명적 사회주의가 중핵으로 조직할 가능성은 열리고 있다. 또한 이후 두 번째 계급투쟁의 파고가 일렁거리기 시작할 때, 대다수 선진노동자들 속으로 혁명적 사회주의를 향한 거대한 운동을 불어넣을 수 있는 “사전 준비 작업”을 본격화할 가능성도 열리고 있다.
다음으로 기존의 민주노조운동의 붕괴는 “전투적 조합주의”의 환상, 그리고 “노동조합 관료제”의 기만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대중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계급투쟁 노선에 입각한 평조합원운동’ 말고는 노동자대중기구들을 새롭게 조직하고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노동대중의 생존권을 지켜낼 다른 길이 없음은 전투적이고 자주적인 투쟁에 나서고 있는 가장 평범한 노동대중에게도 이미 명확해지고 있다. 터져 나오는 비정규직 투쟁이 배출하고 있는 새로운 대중들은 이미 기존 민주노총의 관료제와 조합주의에 진절머리를 내고 강력한 비판의식을 키우면서 ‘계급투쟁의 길’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게다가 기존 조직된 민주노조운동, 특히 대기업 민주노조들에서도 동일한 운동이 다른 형식으로 길을 찾아가고 있다. 다만 그 흐름이 더 더딜 뿐이다. 80년대 말의 민주노조운동의 전성기에 탄생한 대기업 민주노조의 조합원들은 대부분 당시의 지도자들―그러나 지금은 투쟁을 회피하고 개량주의에 물들어버린 관료적 지도자들―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이 환상은 깰 수 없을 만큼 대단히 두터웠다. 대기업 노조의 조합원 대중들은 80년대 말과 90년대 초중반의 전투의 시기에 자신들의 생존권을 지켜내고 전투적 투쟁을 선두에서 지휘했던 이 지도자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을 결코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2000년 초반 이후 상황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중후반에 이르자 그 변화 양상은 본격화되고 있다.
대중들은 최근 10여년의 실제 경험 속에서 질문하기 시작하고 있다: “과거의 지도자들은 지금 변절했다. 그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그토록 증오했던 관료층의 습성을 흉내 내면서 조합원들 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들은 생존권이 달린 결정적인 문제들 앞에서 투쟁회피와 배신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 그들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 2000년대 초중반에 점차 퍼져가기 시작했던 기존 지도자들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는 2000년대 후반 지금 ‘분노와 비판’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이를 반영해서, 새로운 전투적 젊은 지도자들이 현장에서 대중적 기반을 형성해 나가고 있다. 이들은 기존 조합주의 지도자들의 한계를 목격하면서 노동운동에 입문한 세대이며, 따라서 노쇠한 기존 지도자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심’을 거의 갖고 있지 않다. 또한 조합주의에 대한 환상 대신 문제의식과 반발심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 아직 충분한 수로 탄생하지 못했고, 충분한 자신감을 갖고 있지도 못하지만, 이들 새로운 젊은 전투적 지도자들이 약간이라도 존재하는 곳에서는 대중은 이들을 선택하기 시작하고 있다. 대기업 현장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점차 그러나 확실하게 성장할 것이며, 그리하여 기존 조직된 노동운동의 거점 부위에서도 새로운 대중적 물결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새로운 가능성들을 ‘계급투쟁 노선에 입각한 평조합원운동’의 틀로 종합하고 상승시키면서, 대중적 계급투쟁을 위한 거점을 끈기 있게 조직해나가야 한다. 또한 작더라도 의미 있는 계급투쟁, 그리고 패배하더라도 계급투쟁의 정신이 미래를 열어나가는 전투적이고 의식적인 노동자 투쟁, 마지막으로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우선시하고 바로 그 관점에서 자신의 투쟁을 진단하고 책임져나가는 계급투쟁을 조직해나가면서 ‘노동대중을 이끌고 그 거대한 힘을 종합할 수 있는 진정한 세력이 바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임을 입증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예비 작업의 성과들은 이후 두 번째 계급투쟁의 물결이 본격화될 때, 이 계급투쟁의 물결을 혁명적 투사들이 이끌면서 노동자 권력을 향한 대중적 출격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결정적 무기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조건을 창출하기 위한 사활적인 실천에 돌입하고 있다. 이 실천의 성공적 완수는 두 번째 계급투쟁이 노동자 혁명정당에 의해 지도되고, 노동자 권력을 통한 완전한 해방에 이르는 빛나는 승리로 기록될 수 있는 튼튼한 토대이자 보증물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 노동자계급이 87년 이래 근 20년간 밀어왔던 첫 번째 계급투쟁의 물결이 결코 패배가 아니라 승리를 여는 값진 경험이자 예행연습이었음이 증명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첫 번째 시기를 넘어서야 하며, 그 첫 물결이 만들어낸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조운동을 비판적으로 극복해야 한다. 명확한 결단 그러나 미래를 열어나가는 위대한 결단이 필요한 때이다! 그래야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전진의 시대를 여는 사활적 과업에 대담하게 착수할 수 있다! ■
1) 칼 맑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