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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교양도서 2권_세계노동운동사(1) 자본주의 탄생부터 러시아 혁명까지
 사노련  | 2009·11·11 23:08 | HIT : 3,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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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련에서 발행한 <일하며 배우는 노동자 교양도서> 2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에 실린 글입니다.)

    세계노동운동사1 - 자본주의 탄생부터 러시아 혁명까지

    최지명

    우리 노동자들에게 세계 역사에 대한 기억으로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게 무엇일까? 나폴레옹, 징기스칸, 히틀러……이런 인물 이름과 프랑스 혁명, 1, 2차 세계대전 같은 중요한 사건 몇 가지일 것이다.

    지배자들은 노동자들이 역사의 진실을 깨닫는 게 두려워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해 왔다. 지배자들이 노동자들에게 주입해온 역사는 지배자들 자신의 역사일 뿐이다.

    역사 왜곡의 흔한 예로 ‘주몽’ 같은 TV 사극을 들 수 있다. 찬란한 조명을 받는 주역은 지배자들이다. 위대한 생산자인 노동자 민중은 다만 주역의 연기를 빛내 주는 엑스트라일 뿐이다. 더구나 노동자 민중의 투쟁은 정상적인 질서를 파괴하는 ‘반역’으로 매도돼 묻혀 버린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국사, 세계사)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역사 왜곡은 현대에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심해지고, 노동자계급이 등장하고부터는 더욱 적나라해졌다. 왜냐하면 현대의 역사는 바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피 튀기는 계급투쟁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자본가계급이 쓴 역사책에는 노동자계급이 그저 ‘장시간, 저임금으로 고통받았던 불쌍한 사람들’ 정도로만 나온다. 노동자계급이 착취와 억압을 박살내고, 새로운 노동해방 사회를 건설할 주역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감추려 하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들이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을 끝없이 가로막아 왔다. 저들은 역사를 과거의 골동품으로 만들고자 한다. ‘태종태세 문단세…’로 시작하는 조선시대 왕들 이름이나, 몇 년도에 무슨 사건이 있었다는 따위의 한낱 지식 나부랭이들로 역사를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역사는 현재와 아무 관련 없는 ‘짜증나는 암기 과목’ 정도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나 역사는 현재와 절대 뗄 수 없다. 역사 속에서 벌어진 수많은 대결, 그리고 한 쪽의 패배와 다른 쪽의 승리가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역사를 통해 자본가들의 악랄함과 교활함, 노동자들의 엄청난 힘을 정확히 알면 노동자들은 필승불패다. 하지만 그걸 모르면 패배를 거듭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계급투쟁의 역사에 관심과 흥미를 갖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발악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노동운동에서도 세계 역사에 대해 관심을 별로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투쟁과 해방의 진실로 가득 찬 창고로부터, 같은 형제들이 험난한 가시밭길 속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노동해방의 길은 아득할 뿐이다. 노동자들은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를 배움으로써 빛나는 승리로부터는 무한한 영감과 희망을, 쓰라린 패배로부터 값진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법도 익힐 수 있다. 이런 역사의식과 국제주의야말로 노동자계급 의식의 최고봉이 아니겠는가!

    자본가들, 권력을 잡다

    중세 봉건제에서는 국왕, 영주, 교황 같은 한줌의 지주 귀족이 토지와 모든 자연 자원을 독차지했다. 이 토지 위에서 노예보다는 조금 자유로워진 농노(농업노예)들이 지배자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농사를 지었다. 이 사회는 매우 정체된 농업사회였고, 마을 간의 교역도 보잘것없는 폐쇄사회였다.

    엄격한 신분제 때문에 농노들은 신분 상승은 꿈조차 꾸기 어려웠다. ‘영주의 말이 곧 법’인 시대였다. 영주가 농노의 결혼을 승인하는 조건으로 결혼 첫날 밤 신부를 강간하는 것도 ‘합법’이었다. 현실의 고통에 불만을 나타내면 하늘을 거역한다며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퍼부어댔다. 사회 기생충인 귀족들의 사치향락이 한 쪽에서 무르익어갈 때, 다른 쪽에서는 농노들의 가난과 고통이 더해 갔다. 뿐만 아니라 봉건 귀족들이 서로 토지를 빼앗기 위해 벌인 전쟁 때문에 수많은 민중이 떼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구가 증가하고 생산력과 상업이 점차 발전해, 꿈쩍도 하지 않을 듯하던 봉건 사회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도시 수공업 생산물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도시가 활성화되고, 외국과의 교역이 늘어나면서 상업도 촉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도시의 주인이 되었다. 그들은 여러 곳에서 거래하고, 값비싼 물건을 많이 생산해 차차 부를 쌓아갔다. 이렇게 해서 신흥 자본가들(이들을 부르주아지라고 부른다)이 탄생했다.

    이후 증기와 기계가 공업 생산에 혁명을 일으켰다(산업혁명). 산업혁명은 생산의 기초를 손에서 기계로 옮겼다. 작은 작업장을 거대한 공장으로 바꾸었다. 동력의 기초를 바람과 물에서 증기로 바꾸어 놓았다. 또한 육지를 철도와 운하와 도로의 그물망으로 뒤덮고 바다를 대규모 배들로 뒤덮어 운수 혁명도 일으켰다. 그 결과 상업은 초기의 지방적 규모에서 세계적 규모로 발전했다. 그만큼 자본가들의 경제력도 엄청나게 커졌다.

    이런 산업혁명은 1760년 경 영국에서부터 시작돼 19세기에는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미국 등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경제를 장악한 자본가들은 정치권력도 차지하겠다고 나섰다. 봉건 지배세력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혁명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 혁명들은 때로는 종교분쟁의 성격을 띠기도 했고(1644년 영국 청교도 혁명), 지역 분쟁의 성격을 띠기도 했다(1776년 미국의 독립전쟁). 하지만 본질적으로 봉건제를 철폐하고,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정치 혁명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혁명이 바로 1789년 프랑스대혁명이다.

    노동자, 그 축복받지 못한 탄생

    노동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 이 지구상에 처음 나타났다. 노동자는 1900년대에 이르러 전 세계 대다수 사람들의 이름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는 탄생하는 그날부터 가난과 궁핍에 찌들고 무수한 저항과 패배의 고통을 겪었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땅을 빼앗긴 농민, 또는 그들의 자식이었다.

    당시 영국 등 유럽의 일부 나라에서는 섬유 공업, 특히 양털을 가공해 옷을 짜는 모직 공업이 크게 발달했다. 양털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지자 양털 값이 폭등했다. 양을 키워 양털을 팔면 하루 아침에 부자가 될 수 있었다.

    지주와 각국 정부는 양을 키울 땅을 확보하기 위해 농민들이 대대로 농사짓던 땅에 울타리를 치고 농민들을 내쫓았다.

    수많은 농민들이 일할 곳을 찾아 도시로 도시로 나왔다. 각지에 세 살 박이 아이로부터 50살 어른에 이르기까지 굶주리고 지친 떠돌이 무리들이 넘쳐흘렀다. 그러나 이들은 쉽사리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우선 그들 모두에게 일을 시킬 만한 충분한 일거리가 도시에는 없었다. 그리고 일자리를 구했다 하더라도 쉽게 새로운 일자리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오랫동안 흙과 더불어 살았기 때문에 도시의 공기는 낯설고 삭막하게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각국 정부는 거지와 떠돌이가 넘쳐나서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을 막고 또 이들을 공장, 광산, 부두의 노동일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어야 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법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최초의 노동악법이었다.

    허가증을 갖지 않은 14세 이상의 거지에게는 그를 사용하려는 사람이 2년 안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 채찍질을 하고 귓바퀴에 낙인을 찍는다. 18세 이상의 재범은 다시 그를 사용하려는 사람이 2년 안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 죽인다. 3회 누범일 경우는 나이를 막론하고 국가에 대한 반역자로 간주해 가차 없이 죽인다. 또 주인은 이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이것이 1572년 영국 정부가 만든 법이었다. 피의 입법이 노동자의 탄생을 알렸다.

    기계가 발명돼 생산량이 늘어나자 기계를 사용하는 공장들이 많아졌다. 대신 기계를 살 만한 돈이 없던 수공업자들은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농촌에서 도시로 ‘대이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기계제 대공장을 가진 한줌의 자본가들 밑에서 일할 대규모 노동자부대가 만들어져 갔다.

    자본가들은 무한한 탐욕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죽도록 일을 시켰다. 그들의 노동과 생활 상태는 노예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루 노동시간은 15~20시간이나 됐다. 5, 6세의 아이들도 평균 18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임금은 겨우 굶어죽지 않을 정도였다.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은 30세였고, 40세를 넘기는 사람은 드물었다.

    자본가들은 아직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마음대로 독재를 행사했다. 1833년의 영국의 의회보고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영국노동자의 궁핍에 비하면 미국의 노예제도, 영국의 지독한 인도통치 따위가 오히려 무색할 지경이다.” 프랑스와 서부 독일의 새로운 공장은 비참한 노예우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자본주의는 온 몸에 피와 오물을 뒤집어쓰고 태어났다.”

    노동자들이 투쟁을 시작하다

    이런 악조건은 노동자들을 투쟁의 길로 내몰았다. 초기 노동자들은 임금 인하와 노동조건 악화에 분노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분노는 자본가들이 아니라 기계와 공장에 쏟아졌다. 곳곳에서 기계가 파괴되고 공장이 불에 탔다.

    당시 자본가들은 오랫동안 한 도시에서 대다수 노동자들과 친분이 있었다. 이런 친분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제대로 분노를 쏟아 붓지 못했다. 그리고 당시 숙련기술을 가지고 있던 노동자들은 기계와 공장이 값싼 생산물을 쏟아내자, 자기들을 고용불안과 궁핍으로 몰아넣는 원흉이 자본가들이 아니라 기계와 공장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계 파괴, 공장 방화는 효과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자본가들과 정부가 혹독하게 노동자들을 탄압할 빌미만을 줬다.

    기계 자체는 노동자들의 힘든 일을 대신해줄 수 있었다. 따라서 기계나 공장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가들이 기계나 공장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게 진짜 문제였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아직 이 점을 정확히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노동자들은 여러 나라에서 봉기를 일으키기도 했다. 예를 들면 1819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1831~34년 프랑스의 리옹에서, 1844년 독일의 슐레지엔에서 봉기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봉건제를 철폐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에 적극 동참해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하려 했다. 자본가들이 멈추려 할 때에도 혁명을 더 밀고 나가려 했다.

    또 노동자들은 공제조합을 만들고 협동조합을 세워 서로를 도우려 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무엇보다도 노동조합 운동으로 나아갔다. 노동자들은 수많은 투쟁을 하면서 기계 파괴 대신 노조로 뭉쳐 임금 인상, 노동조건 개선 같은 요구를 내걸고 투쟁하는 보다 효과적인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생산자로서 단결하면 언제든지 착취자들의 돈벌이를 중단시킬 힘이 있다는 것을, 즉 파업이라는 더없이 귀중한 무기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국에서 노동자들은 1812년 한 비밀 노조가 조직한 글래스고 섬유노동자들의 총파업을 포함해, 1818년 스코틀랜드 광산노동자들의 총파업, 1822년 총파업 등으로 나아갔다. 1824년에 마침내 단결금지법이 폐지되자 노조가 전국적으로 물결쳤다. 1833~34년에는 50만 조합원을 가진 전국노동조합대연합까지 결성했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대중정당 - 차티스트 운동

    영국 노동자들은 1938년부터 노동자한테도 선거권을 줄 것 등을 ‘인민헌장(Chart)’으로 요구하며 투쟁했다. 당시 영국의 성년남자 600만 명 중 투표권을 가졌던 사람은 불과 85만 명밖에 안 됐다. 이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자들의 폭넓은 정치운동으로서, 여러 노조의 지지를 받았다. 차티스트들은 전국 곳곳에서 대대적인 선동을 벌였다. 일부 집회에는 35만 명이나 모이기도 했다. 총인구 1,900만 명 중 500만 명의 서명을 담아 의회에 대중청원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반동적인 의회가 이 청원을 냉정히 거부하자, 운동가들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총파업과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

    1842년에 총파업을 시도했지만 준비부족으로 실패했다. 1848년에는 서유럽의 혁명적 정세에 영향을 받아 운동이 다시 살아났으나, 이미 그 힘은 쇠퇴해 있었다. 의회가 또다시 대중청원을 거부했을 때 봉기를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그 이유는 이 운동 속의 소자산가들이 주저했기 때문이고, 또 정부가 25만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서 위협한 데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결정적으로는 노동자계급이 아직 정치적, 조직적 독자성을 분명히 견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확고한 지도부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티스트 운동은 노동자계급이 폭넓은 전국 노동자 당을 만들고자 했던 최초의 시도였다. 노동자들은 이 운동 속에서 자신들의 거대한 정치적 힘을 느꼈다. 이 운동은 세계노동운동의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광스런 운동 중 하나였다.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다

    영국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지독한 착취를 조금씩 완화하고자 했을 뿐 아니라, 곧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맑스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에 유명한 차티스트 지도자 오브라이언은 1832년에 이미 이렇게 말했다. “곳곳에서 (노동하는)사람을 학대하는 자, 그들은 부당이득자들이다. 정부란 부당이득자들이 만든 것이다. 그 목적은 그들의 이윤과 지대를 보호해 주는 것이다.” 오브라이언은 기계파괴와 싸우며, 기계를 부수지 말고 그것을 인민이 소유해 인민 자신을 위해 사용하자고 설득했다.

    당시에 일부 지식인들도 노동자들의 끔찍한 삶과 자본가들의 무한탐욕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사회의 불평등과 모순을 격렬하게 고발하면서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를 가졌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취향에 따라 일을 고를 수 있는 사회, 하루종일 나사만 돌리는 게 아니라 재단도 해보고, 톱질도 해볼 수 있는 사회, 착취와 지배가 없는 사회…” 이것은 노동자가 꿈에 그리던 이상과도 같았다. 그래서 이 사상은 노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런 사상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로는 오웬, 생시몽, 푸리에 등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전체 인구 중에서 노동자의 숫자가 아직 적었고, 노동자들의 투쟁능력이 충분히 발달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들을 단순히 고통받는 사람들로만 보았을 뿐, 착취와 억압을 뿌리뽑을 위대한 역사적 주인공으로 보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주로 착한 자본가의 지원을 받거나 자본가들을 설득해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려 했다. 노동자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착취자인 자본가들한테 의존하라고 한 것이다. 한 마디로 도둑놈한테 도둑을 붙잡으라고 간곡히 충고하는 격이었다.

    이들을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하는데, 그들은 모두 착취의 결과(현상)에 분노했을 뿐 그 원인(본질)인 자본가의 노동자착취를 면밀히 분석하지 않았다. 또한 이상 사회를 뛰어난 상상력으로 머리 속에서 그려냈을 뿐, 현실(자본주의 사회의 생산력 발전과 노동자계급의 확대) 속에서 그 싹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본주의에서 노동해방 사회로 나아가는 것을 노동자계급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없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실패했다. 노동자들이 노조로 뭉쳐 파업을 벌이는 것조차 반대했던 그들은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노동자계급이 전진하는 것에 비례해 퇴보해갔다. 맑스는 공상적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본주의의 발전법칙과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정확하게 밝혔다.

    노동자의 과학적 사상이 등장하다

    1848년 2월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슬로건 아래 노동자, 소자산가, 자본가들의 연합으로 벌어졌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6월 파리에서 노동자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자본가들은 그 어떤 봉건반동 세력보다도 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를 100배나 더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로써 ‘자유’, ‘평등’, ‘박애’란 추상적 구호는 오직 자본가들만을 위한 것임이 확실해졌다. 그런 만큼 노동자들은 그런 추상적 구호 대신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같은 계급적 요구나 ‘자본주의 철폐, 노동해방 쟁취’와 같은 혁명적 사상을 움켜쥘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 운동은 ‘민중’, ‘정의’, ‘인권’과 같은 추상적 표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 만큼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여러 계급의 위상과 역할을 밝혀내며, 노동운동의 궁극 목표와 투쟁방법, 조직형태를 제출하는 데에서 완전히 무지와 혼란을 겪고 있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이전 사회주의의 무지와 혼란을 일거에 박살내고, 사회주의 운동을 과학적 기초 위에 우뚝 세워냈다. 이렇게 등장한 맑스주의가 새로 발견한 것은 무엇인가?

    맑스주의의 3요소

    먼저, 역사적 유물론을 들 수 있다(노동자의 철학). 이에 대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윈이 자연의 진화법칙을 발견했듯이 맑스는 인간 역사의 발전법칙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정치, 과학, 예술, 종교 등등을 추구할 수 있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먹고 마시고 거주하고 입어야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이런 진실을 소박하게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경제가 사회의 기본토대를 이루고, 그 위에 정치, 법, 이데올로기가 세워진다는 것이 역사유물론의 핵심내용이다.

    이 사상은 오늘날 더욱더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사회양극화의 심화, 석유를 약탈하기 위한 이라크 전쟁, 끊임없이 벌어지는 노동자투쟁 등은 역사유물론의 올바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잉여가치를 발견한 것이다(노동자의 경제학).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자들은 빈부 격차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를 생생하게 폭로했지만,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법칙을 과학적으로 밝혀내지는 못했다. 맑스는 ‘잉여가치’(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지불하지 않고 강탈해가는 공짜노동의 가치)를 밝혀냈다. 이로써 자본주의 부의 참된 원천을 폭로하고 노동해방의 필요성을 경제적으로 입증했다.

    마지막으로는 계급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얘기할 수 있다(노동자의 정치학).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함으로써 미로처럼 보이는 복잡한 사회 역사를 올바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노동자계급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라고 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세계사적 사명을 명쾌하게 밝혔다.

    뿐만 아니라 당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단호한 부분이라는 점을 정식화했다. 그리고 당은 ‘현재의 운동 속에서 미래를 대표’한다고 함으로써 당면 운동과 궁극 목표의 유기적 연관도 밝혔다. 또한 근대의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집행위원회일 뿐이라고 했고,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면서 국제주의 사상을 정확히 제시했다.

    오늘날 자본주의 폐해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그에 맞선 저항의 파고가 높으면 높을수록 반자본주의 기운 또한 강해진다. 자본주의의 이러저러한 측면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이 커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과학적 사상을 배우지 못했거나, 배운 적이 있더라도 많이 까먹었기 때문에 ‘세계화 반대’, ‘신자유주의 반대’, ‘해외매각 반대’ 등 문제 있는 구호를 별 생각 없이 따라 외치는 경우도 많다.

    기계를 파괴하는 것이 잘못이었듯, 세계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반대하고 노동자 국제연대, 노동해방의 세계화를 추구해야 한다.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임금삭감, 노동강도 강화 등은 최근 20~30년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갑자기 생긴 게 아니다. 자본주의가 항상 안고 다녔던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반대’를 외치면서 복지 자본주의를 꿈꿀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를 분명하게 반대해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맑스주의를 버리고 모호한 ‘반자본주의’에 머무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후퇴다. 따라서 불완전한 ‘반자본주의’에서 노동해방 사상으로, 그것도 맑스주의라는 과학적 노동해방 사상으로 정확히 나아가야 한다. 어떤 측면에서 역사는 되풀이된다. 역사로부터 배워, 초기 노동자들의 잘못과 한계를 되풀이하지 말고, 역사의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도록 하자.

    세계 노동자조직의 탄생 - 제1인터내셔널

    19세기 초의 노동자들은 이미 국제 연대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탐욕스런 자본가들이 노동자계급에 맞서기 위해 강력한 국제협력을 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파업파괴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지배자들의 전쟁에 노동자 국제연대로 맞서야 했다. 노동자들은 투쟁할수록, 그리고 노동해방 사상에 다가갈수록 국제주의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디어 1864년 9월 28일, 전세계 노동자대중과 그 지도자들이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을 만들었다. 가난과 궁핍, 멸시와 모욕의 대명사였던 노동자들이 이제 자신들과 전세계 민중을 얽어맨 착취와 억압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는 정치적 성격의 조직이긴 했으나 모든 노동자 조직, 즉 당과 노동조합, 협동조합 등이 참여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노동자의 독자적 사상 정립과 정치투쟁뿐만 아니라 모든 노조활동을 노동자의 계급적 이익에 기초해 전개하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따라서 각국 노조 활동에 대해 세밀하게 관찰하고 지원했다. 가령 8시간 노동제 실시를 제시해, 전세계 노동자계급의 공동요구로 만들어냈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창립은 대체로 자생적인 것이었다. 노동자가 정치권력을 장악해 생산수단을 사회화한다는 분명한 노동해방 사상이 아니라 주로 파업파괴를 막겠다는 노조 운동 차원의 목표에 따라 국제연대를 추구한 것이다. 그래서 인터내셔널 안에는 영국의 단순한 노동조합주의에서부터 프랑스의 프루동주의, 블랑키주의, 독일의 라쌀레주의, 바쿠닌주의 등 잡다한 경향이 뒤섞여 있었다.

    영국의 노조들은 자본가들이 식민지를 수탈해서 번 돈으로 개량의 떡고물을 던지자, 여기에 취해 과거의 혁명적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영국의 식민지인 아일랜드의 민족해방 투쟁도 지지하지 않았고, 아일랜드 노동자들에 대해 잘못된 편견을 뿌리깊이 갖고 있었다.

    프루동주의는 “생산자와 소비자로 이루어진 협동조합 체계를 만들자. 이것을 끊임없이 확대하면 마침내 자본주의를 대신할 것이다”고 주장했다. 라쌀레주의도 프루동주의와 마찬가지로 노동조합과 파업에 반대하며, 정부의 보조를 받는 협동조합망을 차츰 확대해 자본주의를 대체하자고 했다. 하지만 맑스가 비판했듯이 자본가권력을 노동자권력으로 바꾸는 정치혁명 없이는 사회 전체의 생산을 재조직할 수 없다.

    블랑키주의는 소수의 음모집단이 봉기로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맑스는 단호한 정치투쟁은 필요하지만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행동이 아니고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비판했다.

    바쿠닌주의는 프루동의 제자인데, 프루동과 약간 다르게 협동조합 대신 노동조합이 사회주의 생산을 떠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폭동으로 국가를 파괴해야 하며, 노조도 폭동을 궁극 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무정부주의를 비판하면서 맑스는 자본가국가를 노동자권력으로 대체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노조를 넘어서는 노동자정당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맑스는 처음부터 끈기와 인내심을 갖고 이런 잡다한 기회주의 조류들과 싸워나갔다. 맑스가 “훌륭한 이론가이자 실천적 지도자”로서 국제노동자협회를 이끌었기 때문에 1976년 제1인터내셔널이 해산될 즈음에는 맑스주의가 국제 노동자운동 속으로 깊숙이 퍼져나갔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권력 - 파리코뮌

    1870년 7월, 국경선을 넓히려는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 지배세력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의 조카)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을 폐기하고 황제로 군림해 오던 상황이었다. 프랑스가 잇달아 대패배를 당해 6주 만이 전쟁이 끝났다. 그러자 파리의 노동자민중은 9월 4일 보나파르트 정권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그런데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하자, 당시의 자본가 정부는 1871년 2월 26일 항복하고, 파리를 적의 손에 넘겨주려 했다. 이에 반발해 프랑스 노동자, 병사들은 3월 18일 자본가정부의 군대를 격파하고 파리를 장악해 ‘파리코뮌’을 선포했다.

    “노동자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해 자신들의 운명을 자신들의 힘으로 개척하는 것이 자신들의 장엄한 의무이며, 자신들의 절대적인 권리임을 이해했다.” 코뮌은 이렇게 당당하게 선언했다.

    코뮌은 자본가권력을 타도하고 등장한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국가였다. 코뮌 의회는 지금의 국회처럼 말로만 떠들어대고 통치는 정부가 하는 그런 ‘잡담가게’가 아니었다. 법을 만들고 동시에 집행하는 기구였다. 재판관을 포함해 모든 공무원을 코뮌이 임명했으며, 언제든지 소환하고, 파면할 수 있었다. 공무원의 임금은 숙련노동자의 평균임금을 넘지 않았다. 코뮌은 상비군 제도와 경찰 제도를 폐지하고, 무장한 노동자민중(국민 방위군)들로 대체했다.

    그러나 파리 코뮌은 베르사이유에 있던 반동정부를 쓸어버리기 위해 과감히 투쟁하지 않았다. 내부 배신자들을 단호하게 다스리지 못했다. 프랑스 각지의 농민들을 동맹세력으로 조직하기 위한 노력도 충분히 벌이지 않았다. 또한 1789년 대혁명 이래의 비밀공문서를 공표하는 데 게을렀으며, 프랑스은행을 과감하게 몰수하지 못했다. 그 결과 파리는 고립됐다. 5월 말 8일 간의 혈투를 벌인 끝에 코뮌은 결국 72일 만에 무너졌다. 그리고 악마와 같은 대학살이 뒤따랐다. 3만 명 이상이 총살당했고, 4만 5천명 이상이 체포됐다.

    파리코뮌의 패배는 무엇보다도 명료한 노동자계급 강령과 철의 규율을 지닌 강력한 당이 필요함을 가르쳐 주었다. 그런 당이 없었기에 권력이 노동자의 손에 쥐어졌지만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코뮌은 비록 패배했지만 노동자계급이 나아갈 길을 실례를 통해 환하게 보여주었다. 노동자해방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동자권력은 더 이상 책이나 유인물, 노동자의 머리 속에 있는 공상의 세계가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현실로 존재했던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이후 파리코뮌은 러시아 노동자혁명의 훌륭한 토대가 되었다.

    제국주의가 들어서고, 노동운동이 성장하다

    제1인터내셔널이 1876년 해체되고 나서 1889년에 제2인터내셔널이 창립되기까지 13년간 자본주의는 급속하게 성장하고 확대됐다. 이 시기에 자본주의는 자유경쟁의 단계로부터 제국주의의 초기 국면으로 발전해갔다. 각국의 은행과 공장들이 통폐합되고, 대기업이 굉장한 속도로 성장했다. 상대적으로 발전이 더딘 나라들에 대한 약탈도 심화됐다. 자본가가 전세계를 공공연하게 착취한 것이다.

    이 시기에 국제관계는 상대적인 안정을 누렸다.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끝으로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는 (1905년 러일전쟁 등 몇몇 예외가 있었지만)커다란 전쟁이 없는 대체로 평화적인 시기가 계속됐다. 1871년 파리코뮌을 끝으로, 대규모의 혁명도 (1905년 러시아혁명을 제외하면)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1876~1889년 시기는 이렇게 35년 이상 지속된 평화로운 일상 시기의 초입부였지만 노동운동의 전진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노동자파업으로는 미국에서 1877년 철도노동자들이 격렬하게 벌인 총파업과 1886년에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한 역사적인 총파업이 있었다. 이밖에도 프랑스, 독일, 벨기에, 영국 등 유럽 전역에서 파업이 줄기차게 터져나왔다.

    이 시기에는 노조 운동이 자본주의 전세계에 걸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1889년까지 영국 노조운동은 대략 150만이라는 유례없는 조합원을 확보하는 등 모든 공업국에서 노조 운동이 광범위하게 발전했다. 각국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만들어진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독일에서 1869년에 처음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네덜란드 1870년, 미국 1876년, 프랑스 1879년, 중국 1911년 등의 순으로 수십 개 나라에서 사회주의 정당이 결성됐다.

    새로운 당은 대부분의 노조와 마찬가지로 지배자들로부터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대표적으로는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만들었던 ‘사회주의자 반대법’이 있다. 이것은 노동자당을 불법으로 만들고, 수많은 간부들을 구속, 추방하며, 신문, 잡지 발행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독일 사회주의자들은 다른 나라에서 회의를 하고, 출판물을 제작해 몰래 국내로 들여와 배포했다. 그리고 노조와 같은 대중조직에 더욱 밀착해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그 결과 ‘사회주의자 반대법’은 애초의 목적과 정반대로 독일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더욱 대중화하고 권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엥겔스는 “만약 우리가 돈을 주고 비스마르크를 고용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 이상의 일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까지 이야기했다.

    제2인터내셔널을 결성하다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프랑스대혁명 100주년 기념일인 1889년 7월 14일, 파리에서 열렸다. 20개국으로부터 391명의 대의원이 참가했다. 세계 노동운동사에 전례가 없는 국제적 대집회였다. 자본주의와 강력하게 투쟁할 수 있는 세계 노동운동의 정치적, 조직적 구심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각국 노동자들은 거대한 관심을 보내면서 환호하고 열광했다.

    대회에서 각 참가국 대표들은 열띠게 보고했다. 이런 보고는 대체로 발전하고 있으며 젊고 활기에 찬, 낙관적인 세계 노동운동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다. 노조운동이 뻗어나가고, 노동해방 정당들이 줄줄이 만들어져 노동운동과 결합해가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대회 참가자들은 자신감과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대회에서는 오늘날까지 전 세계 노동자의 축제, 투쟁의 날로 이어져 내려오는 ‘메이데이’를 미국 노동자투쟁을 기념해 제정했다. 이 메이데이의 정신은 1886년 5월 1일 ‘8시간 노동제 쟁취’를 외치며 피흘려 싸웠던 미국 노동자 투사들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전세계 노동자계급이 하나가 되어 강력하게 투쟁하자는 것이었다.

    제1인터내셔널과 달리 제2인터내셔널은 처음부터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근본적 사회혁명’을 분명히 하면서 출범했다. 맑스주의는 이제 세계 노동자계급 운동의 정치 분야에서 확고하게 우위를 차지했다. 맑스와 엥겔스의 지도를 받았던 독일사회민주당이 이 대회를 개최했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제1인터내셔널에서는 광범하게 존재했던 프루동주의는 거의 잊혀졌다. 블랑키주의, 바쿠닌주의 등은 한줌밖에 안 되는 극소규모 분파로 찌그러들어 있었다.

    하지만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거대한 도약, 맑스주의 세력의 주도권 확보라는 위대한 성과 이면에는 대재앙을 초래할 수 있는 약점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실리만을 추구하는 속물근성이 강했던 영국의 노동조합주의, 국가와 협력해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하려 했던 독일의 라쌀레주의 등의 경향은 제2인터내셔널을 늪으로 끌고 들어가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펼쳤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본다면 제2인터내셔널은 창건 이후 12년 동안이나 세계사령탑도, 국제 기관지도, 정규 규약도, 명확한 정치 강령도, 규율잡힌 집행도, 게다가 공식명칭조차 갖지 않았을 정도로 조직적으로 어느 정도 무정형했다.

    제2인터내셔널을 좀먹은 우익 기회주의

    말기에 제1 인터내셔널을 좀먹었던 것은 바쿠닌파, 블랑키파 등 성급한 사이비 혁명적 분파들이었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목숨을 건 무모한 투쟁에 노동자를 강제로 몰아넣으려는 극좌 모험주의자들이었다. 하지만 제2인터내셔널의 재앙은 주로 우익 기회주의로부터 나왔다. 이들은 노동자들의 전투성과 자발성을 떨어뜨리고, 노동운동을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시키려 했다.

    우익 기회주의는 두 가지 뿌리를 갖고 있었다. 첫 번째는 상층의 숙련 노동자와 노조 관료들이었다. 자본가들은 식민지에서 수탈한 초과 이윤을 가지고 상층의 숙련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많이 주면서 그들이 노동자의 대다수를 배반해 파업을 파괴하고, 계급적 단결 투쟁과 정치투쟁에 나서지 못하게 유혹했다.

    두 번째는 기회주의적 지식인들이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서 노동자대표의 지위를 갖게 된 점이었다. 이들은 끊임없이 노동운동의 정책을 온건한 개량주의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숙련노동자 상층에서 등장한 기회주의 세력은 주로 노조 안에서 활동했고, 지식인 기회주의 세력은 대체로 당 쪽에서 활동했다. 두 기회주의 세력은 서로 긴밀히 협력했다.

    이런 우익 기회주의를 잘 보여주는 데가 바로 영국이었다. 어느 역사가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1880~90년대는 영국노동자의 계급적 자각이 밑바닥을 헤매던 시기다. 행동이라는 것은 모두 포기되고, 노동자후보로 선거에 나가는 것도 사라졌다. 개별 노동자들은 자유당 또는 토리당[보수당]에 투표했다. ‘혁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 노골적으로 욕설을 듣지는 않았다고 해도,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 냉소를 받았다.” 엥겔스도 이렇게 이야기했다. “현재의 영국에서는 [유럽] 대륙에서 말하는 의미의 진정한 노동자계급 운동은 없다.”

    우익 기회주의는 노동조합주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노동운동 지도자가 자본가정부에 장관으로 입각한 밀레랑주의, 부르주아 민족주의, 수정주의, 우익 기회주의와 근본적 좌익 사이에서 표류하는 중도주의 등 여러 형태로 등장했다.

    프랑스 육군의 유태인 장교 드레퓌스가 군부 반동파에 의해 반역죄로 처벌받아 악마섬으로 유배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러자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밀레랑은 ‘프랑스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고 선언하면서 1899년에 자본가정부의 장관이 됐다. 하지만 그 내각에는 파리코뮌 노동자들을 학살했던 주범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정부는 밀레랑이 장관이 된 다음, 곧바로 파업노동자들을 쏴 죽였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도, 제2인터내셔널에서 우익 기회주의 세력은 “자본가정당과 손 잡은 일은 아주 잘 한 일이다”고 주장했고, 중도주의 세력은 “그 문제는 원칙 문제가 아닌 전술문제이므로 (인터내셔널) 대회가 입장을 결정할 필요가 없다”며 회피해 버렸다.

    한국에서도 자본가정부, 자본가정당에 들어가 노동자 죽이기에 앞장선 노동운동가 출신들이 꽤 있다. 권용목, 배일도, 김영대…… 아니 지금도 수많은 노조 관료들, 기회주의 활동가들이 배신극을 벌일 기회를 시시때때로 엿보고 있다. 우리는 이에 대해 각별히 경계해야 한다.

    제2인터내셔널 안에서는 부르주아 민족주의가 암세포처럼 자라고 있었다. 그것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준 것은 미국사회당이 보여준 백인우월주의였다. 흑인대중은 1861~65년의 남북전쟁을 통해 노예제에서 해방됐지만 수십 년 동안이나 계속 야만적 박해에 시달렸다. 교육권, 노동권, 투표권, 군복무권 등 수많은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거의 매주 흑인을 채찍으로 때려죽이거나 사살하거나 목매달거나 태워 죽이는 등의 야만적인 폭행이 발생하여 세계에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사회당은 이런 놀랄 만한 상태를 태연히 묵살하고, 폭행 중단과 흑인차별제도 폐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뒤늦게 만들어진 제2인터내셔널 사무국도 이에 대해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제2인터내셔널의 국제주의가 내부로 들어가면 얼마나 허약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론적 영역에서 가장 위험했던 것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였다. 베른슈타인은 제국주의 초기의 몇몇 새로운 특징을 언급하며 ‘맑스주의는 완전히 오류’라고 결론지었다. 그가 강조한 특징은 자본주의 체제가 급속히 발전하고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는 것, 노동자 특히 숙련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어느 정도 커지고 있다는 것, 노동자의 경제적, 정치적 조직이 대폭 확대되고 있다는 것 등이었다. 그는 이런 몇몇 특징을 기초로 자본주의는 부패해 반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 사회주의로 진화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중심에 서서 이에 맞선 이론 투쟁을 격렬하게 벌였다. 로자는 <개량이냐 혁명이냐?>와 같은 글을 통해 “베른슈타인의 이론은 사회혁명을 포기하고, 반대로 계급투쟁의 수단인 사회개량을 그 목표로 삼는 것”이라고 비판하는 등 수정주의 이론의 오류를 낱낱이 파헤쳤다.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맞선 투쟁은 순식간에 인터내셔널 전체로 확산됐다. 국제적 사상투쟁을 통해 혁명 좌파, 중도주의, 우익 기회주의 사이의 분화가 더욱 촉진됐고, 이후 제3인터내셔널을 건설할 맹아가 성장해갔다.

    1차 세계대전의 총성과 함께 제2인터내셔널이 무너지다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킨 결정적인 계기는 1차 세계대전이었다. 제2인터내셔널은 제국주의 전쟁이 터지기 전에는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며, 전쟁이 낳을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혁명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누누이 결의했다.

    1891년 벨기에 브뤼셀 대회는 노동자가 전쟁의 위협에 격렬히 반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1893년 스위스 쮜리히 대회는 전쟁공채에 반대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1896년 런던대회는 상비군 폐지, 인민의 무장 등을 결의했다. 1907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대회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전쟁을 신속히 끝장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함께 전쟁이 불러일으킨 정치, 경제적 위기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레닌과 로자의 수정안을 채택했다. 1912년 스위스 바젤 대회도 ‘전쟁에 맞선 전쟁’을 벌이자고, 즉 제국주의 전쟁에 맞서 전세계 노동자가 단결해 노동해방 투쟁을 벌이자고 선언했다. 이런 결의만 보면 참으로 훌륭해 보인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1914년 7월 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1주일쯤 뒤인 8월 3일 제2인터내셔널은 무시무시한 굉음을 울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날 독일사회민주당 간부들은 국회의원단 회의에서 78 대 14로 전쟁 지지를 결정했다. 이에 앞서 노조 관료들은 8월 2일 자본가들과 사회평화, 파업 포기 협정을 맺어 미리 당의 방향을 결정지어 버렸다. 당의 결정은 다음날 국회로 넘겨져 당 의원 110명이 전원일치로 전쟁공채에 찬성 투표했다. 러시아와 세르비아 당을 제외하고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벨기에, 그 밖의 모든 유럽 전쟁 참가국의 사회주의당이 독일의 ‘선례’를 따라 줄줄이 배신했다.

    무엇이 제2인터내셔널을 붕괴시켰는가?

    형식적 측면에서 본다면 국제지도부가 없었다는 것이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이 된다. 제2인터내셔널은 1889년 창립 이래 10년 넘게 세계중앙기구를 만들지 않았다. 1990년에 만든 사무국도 주로 통신 연락과 통계 역할만 했다. 사무국은 대회 결정을 집행하는 기관도 아니었고, 이것을 해석하는 기관도 아니었다. 그런 일은 각국 당의 자발적인 행동에 전적으로 맡겨져 있었다.

    하지만 제2인터내셔널이 무너진 원인을 단순히 ‘국제지도부가 없었다’는 형식에서 찾는 것은 대단히 협소한 관점이다. 원인을 보다 깊은 곳에서 찾아야 한다. 근본 원인은 독일사민당을 선두로 대부분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노동자계급을 배신하고 자국 자본가계급과 손을 잡았다는 정치적 내용에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더 깊은 뿌리가 있다. 제2인터내셔널은 자신이 주로 활동했던 일상적 시기의 소소한 활동에 안주해버렸다. 자본주의 체제를 문제 삼지 않고, 단지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에만 머무르는 노조 활동, 노동법 개정투쟁 등을 노동해방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격상시키고 절대화했다. 그 결과 제2인터내셔널은 점차 개량주의, 합법주의로 길들여져 갔다.

    또한 여기에는 물질적 토대가 있다.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수탈한 초과이윤을 노조 관료와 중간계급한테 개량의 떡고물로 던져주었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의 ‘선택받은 국민’이라는 특권에 길들여진 이들은 ‘노동해방’, ‘국제주의’, ‘혁명’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 말로는 그런 것을 인정할지라도 실천으로 옮길 정도의 결의는 절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모든 요인들이 상호작용해서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는 ‘조국방위주의’라는 극단적 기회주의로 치달았다. 조국방위주의란 ‘다른 나라의 공격으로부터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독일사민당은 ‘러시아의 공격으로부터 독일을 막자’고 외쳤고, 영국 노동당, 프랑스 사회당은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조국을 지키자’고 호소했다. 그것은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부, 부자언론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반복하는 것이었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노동자계급의 원칙은 쓰레기통에 내던져졌다. 각국 노동자들은 자국 자본가정부의 들러리가 되어 서로를 향해 총을 갈겨대도록 요구받았다.

    기회주의는 레닌이 말했듯이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한 부문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라고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한 나라에서 자기 사업장, 자기 산업 노동자들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 경향이 세계 차원에서는 자기 나라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로 빠지는 것은 거의 필연이다.

    개인 이기주의, 부서 이기주의, 정규직 부문주의, 단사주의의 늪에 빠져 있는 현재의 한국노조운동이 월드컵에 열광하고, ‘해외공장 물량 환수, 해외공장 우선 폐쇄’를 요구하며, ‘국부를 유출하는 해외매각 반대’를 외치면서 민족주의의 포로가 되는 것은 필연이다. 이윤을 위한 침략 전쟁에 한국군을 파병해서 다른 나라 노동자민중을 쏴 죽여도 무관심하거나 공공연하게 반대하지 못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는 어느 날 갑자기 땅이 꺼지듯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싹이 트고 자라나서, 전쟁을 계기로 무섭게 폭발한 기회주의의 최종 결과물일 뿐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는 일상 투쟁을 노동해방의 정신으로 전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절하게 가르쳐준다. 모든 현장활동, 노조활동, 파업투쟁, 연대투쟁을 노동자를 계급적 단결과 단호한 투쟁, 노동해방의 정신으로 무장시키고, 굳세게 조직하기 위한 수단으로 철저히 활용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 종교 등 모든 사회문제에 대해 노동자계급이 날카로운 눈으로 바로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2인터내셔널의 사민주의 정당과는 질적으로 다른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이런 당의 모습을 뒤에 나오는 초기 제3인터내셔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러시아 노동자계급, 세계 최초로 권력을 세우다!

    1917년 10월, 노동자계급은 드디어 그 억센 손에 권력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 노동자권력은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진 게 절대 아니다. 그리고 일부 몰상식하고 악의적인 자본가들이 떠들어대듯이 몇몇 혁명가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하루아침에 만들어낸 게 아니다.

    10월 혁명으로 노동자권력이 등장하기 위해서는 일련의 역사적 전제조건들이 필요했다. 귀족, 왕정, 관료집단 등 구 지배세력이 썩을대로 썩었다. 봉건제에 맞서 싸우며 상당한 활력을 보여주었던 영국, 프랑스 자본가들과 달리, 러시아 자본가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취약했다. 인구의 80%가 넘는 농민들은 지주들의 수탈 때문에 찢어지게 가난했고, 여러 소수 민족은 짜르 정부의 억압 때문에 극도로 고통스러웠다. 이 때문에 가난한 농민들과 피억압 민족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동맹세력이 될 수 있었다.

    이에 덧붙여 우리는 “어떻게 후진국 러시아의 노동자계급이 다른 선진국 노동자계급보다 먼저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 역사적 후진성이란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후진국은 선진국과 결합해 세계 최상의 기술과 사상을 흡수한다. 러시아는 자동차 도로가 없는 상태에서 곧바로 철도를 건설했다. 그리고 유럽의 수공업, 매뉴팩쳐(공장제 수공업) 단계를 건너뛰어 기계제 대공업 단계로 직행했다. 천명 이상을 고용한 대기업이 미국은 공업노동자 전체의 18% 미만이었지만, 러시아는 41%일 정도로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선진적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그 잠재력은 1895~96년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대투쟁에서부터 유감없이 드러났다.

    게다가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은 혁명이란 역사 기관차의 가속페달을 밟았다. 노동자민중은 전쟁터에 나가서 죽었다. 굶주림과 질병이 널리 퍼졌다. 전시라는 이유로 자유가 압살당했다. 이것은 지배자들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반감을 극도로 증폭시켰다. 그래서 전쟁은 혁명을 촉진시켰다.

    이렇게 러시아사회가 자신의 뱃속에 10월 혁명을 잉태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 어떤 혁명세력도 혁명을 탄생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혁명세력은 오직 산부인과 의사의 역할만을 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가장 뛰어난 노동자 혁명정당 - 볼셰비키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10월 혁명으로 노동자권력을 세우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객관적 조건만으로는 부족했다. 주어진 혁명의 가능성을 현실로 바꿀 주체적 조건이 필요했다. 그것은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해방 정당’이었던 볼셰비키 당이었다.

    이 정당은 짜르 체제에 맞선 혁명적 투쟁전통을 올곧게 계승하고, 한층 더 발전시켜 나갔다. 엄혹한 지하활동의 조건 속에서 혁명적 자기희생을 습관화했으며, 초인적 인내력과 용광로 같은 열정을 키워나갔다. 이 당은 1905년 혁명의 격동 속에서 강철같이 단련되었고, 1905년부터 1917년까지 12년 동안이나 일어난 사건들과 투쟁들을 통해 사회를 계급적 관계 속에서 인식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래서 이후 결정적 시기에 각 계급들이 바리케이드 어느 편에 서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과학적으로 예견할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제2인터내셔널의 혁명적 좌파로서 온갖 기회주의에 맞선 전투에서 선봉에 섰다. 그리고 이런 볼셰비키의 투쟁에서는 레닌이라는, 명석한 두뇌와 강철의 의지를 지닌 지도자가 선두에 서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혁명적 사상의 통일, 조직적 투쟁의 전통, 단련된 지도부에 대한 신뢰에 기초해 능동적이면서도 규율 잡힌 활동을 펼치는 굳건한 그룹이었다.

    하지만 볼셰비키가 신처럼 완전무결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볼셰비키 또한 거센 혁명의 폭풍우 속에서 자본가계급, 소자산가들의 압력을 받아 흔들리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스탈린 등 우유부단한 지도자들이 1917년 2월 혁명 직후 자본가 임시정부와 협력하려 했던 사건이 있다. 이런 기회주의 요소는 레닌과 혁명적 노동자당원들이 격렬하게 맞서 싸움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일찍부터 노동자계급의 다수로부터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상황의 진면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을 때, 이 당은 극소수파였을 뿐이다. 그래서 자본가언론은 볼셰비키를 맘껏 비웃었다. 하지만 볼셰비키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노동자들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인내심을 갖고 대중을 설득하라”가 1917년 2월 혁명부터 수개월간 볼셰비키의 핵심 슬로건이었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밀집한 공장과 연대 단위의 병사들을 확실히 장악해갔다. 더욱 많은 농민대중이 이들에게로 돌아섰다. 그래서 볼셰비키당은 1917년 10월 혁명 전야에는 러시아의 진정한 대중정당이 되었다.

    예리한 통찰력과 무쇠 같은 단호함, 불굴의 용기를 갖춘 노동해방 정당은 노동해방 혁명의 필수조건이다. 이 원칙은 10월 혁명을 통해 긍정적인 방식으로 입증됐다. 그리고 이어지는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중국 등 여러 나라 혁명의 뼈아픈 패배를 통해 부정적인 방식으로 입증됐다.

    2월 혁명

    1917년 1월, 전국에서 25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을 벌였다. 2월에는 파업 노동자의 숫자가 40만 명을 넘어섰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정세는 특히 긴박했다. 페드로그라드 최대의 공장이며, 이미 1905년 혁명 당시 1월 봉기에 불을 붙였던 푸틸로프 공장이 2월 17일에 파업에 들어갔다. 푸틸로프 공장의 이 2월 파업은 이번에도 또한 2월 혁명의 발화점이 되었다.

    23일, 노동자들은 국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푸틸로프 공장의 노동자들이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수도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갔다. 행진 도중 다른 공장의 많은 노동자들이 합류했으며, 식료품을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서 있던 부인들까지 시위에 가세했다. “빵을 달라!”, “형제와 남편을 돌려 달라!”, “전쟁을 중지하라”, “짜르를 타도하자!”고 쓰인 깃발과 플래카드가 시위 대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날의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만도 12만 명에 달했다.

    그 다음날에는 시위가 더 발전해 20만 명의 노동자가 참가했다. 25일에는 총파업으로 발전했다. 경찰이 노동자를 대거 구속했다.

    그러나 2월 26일 노동자들은 경찰을 무장해제시키고, 스스로 무장했다. 노동자의 시위가 혁명으로 발전한 것이다. 경찰이 시위대에 총을 쏴 40여 명의 노동자를 죽였다. 그러자 수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의 병사들이 동요했다. 병사들은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총구를 경찰한테 돌렸다.

    다음 날인 27일, 봉기가 전도시를 휩쓸었다. 봉기한 노동자들은 무기고를 점령해 스스로 무장했다. 병사들이 혁명 진영으로 옮겨 오기 시작해 저녁 때까지는 병사 6만 명 이상이 노동자봉기에 가담했다. 수도는 봉기한 노동자와 병사들이 장악했다. “혁명 만세!”, “해방 페트로그라드 만세!”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 1917년 2월 27일 타우리드 궁전 앞에서 열린 시위. 여기서 첫 번째 노동자 대표 평의회가 만들어졌다.

    결국 27일 짜르 권력은 타도됐다.

    혁명이 첫 승리를 거둔 2월 27일 저녁, 멀리는 파리 코뮌을 계승하고, 가깝게는 1905년 혁명에서 경험했던 소비에트(노동자, 병사평의회)가 다시 등장했다. 수도에서 만들어진 소비에트는 들불처럼 번지는 혁명의 기운을 타고 모든 도시에서 생겨났다. 농촌도 점차 깨어나 혁명의 대열에 합류해갔다. 이런 소비에트는 무장한 노동자민중의 혁명투쟁 기구이자 노동자권력의 맹아였다.

    이런 소비에트의 확산에 두려움을 느낀, 자본가 정치세력은 재빨리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이로써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와 자본가 임시정부라는 이중권력이 형성됐다. 이중권력은 오래 갈 수 없었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무너뜨리고, 하나의 권력이 들어서야 했다.

    4월 3일, 레닌은 귀국하자마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내걸었다. 이 구호는 스탈린 등 구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강력한 저항을 꺾고서야 겨우 볼셰비키 당의 방침으로 채택될 수 있었다. 하지만 소비에트 안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가 가진 권력을 자본가 임시정부에 조금씩 넘겨주고 있었다. 이것은 노동자들과 병사들이 아직 충분히 정치적으로 각성하지 못하고, 조직되지 못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노동자 다수의 지지를 받을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노동자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노동자들과 함께 싸워야 했다.

    7월 시위와 당의 지도력

    ▲ 1917년 6월 18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시위. 앞줄 현수막에는 “10명의 자본가 장관들을 타도하라! 모든 권력을 노동자·병사·농민 대표 소비에트로! 그리고 사회주의 장관들에게로!”라고 쓰였다.

    1917년 7월에 거대한 시위가 벌어졌다. 노동자, 병사 등 50만 명 이상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노동자와 인민대중은 2월 혁명 이후 들어선 자본가 임시정부가 자신들에게 빵도, 평화도, 자유도 가져다주지 않았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자본가 임시정부는 영국, 프랑스 제국주의자들과 손잡고 짜르가 벌이던 제국주의 전쟁을 지속했다.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 등이 혁명을 통해 쟁취한 성과들을 고스란히 되빼앗으려 했다. 또한 경제를 파탄시켜 인민들을 굶주리게 했다.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왔던 대중들은 거센 기세로 시위를 전개했으며, 한번 투쟁을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위대는 임시정부를 타도할 의지를 갖고 있었으며, 자본가계급이 저항할 경우 무기를 들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승리할 수 있는 시점을 정확히 포착해서, 여기에 힘을 집중할 줄 아는 것이었다. 당이 이 역할을 담당해야 했다.

    7월 시위를 전면전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예견된 실패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무장한 병사들의 도움을 받아 전면전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권력 장악과 권력 유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자본가계급은 노동자혁명이라는 일격을 맞고 나면 저항력을 100배나 더 강화한다. 따라서 노동자권력은 스스로를 굳건히 유지할 수 있을 만큼 탄탄한 대중적 기반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노동자권력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며, 목숨을 걸고 이 권력을 지키겠다는 의지가 충만해야 했다. 그런데 이는 적절한 시간과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7월에는 그런 조건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다.

    ▲ 1917년 7월 4일 임시정부 군대가 시위대에 발포

    7월에는 가장 선진적인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조차도 그 이후에 닥칠 끝없는 투쟁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다수의 노동자들은 단지 말로 떠들고 시위만 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겁을 주면 그들이 노동자계급과 인민을 위한 정책을 펼 수 있으리라는 환상도 품고 있었다. 이들의 머리 속에는 ‘스스로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 충분히 자리잡지 못했다.

    노동자들도 이런 상황이었는데, 전선의 병사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페테르부르크와 전선의 군대 사이에 있던 지방의 경우, 준비는 더 많이 부족했다. 모스크바에서조차 혁명의 맥박은 페테르부르크에 비해 훨씬 약했다.

    따라서 볼셰비키는 1917년 7월에 모험을 벌이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병사와 노동자들이 거리로 뛰쳐나가자 방관자처럼 팔짱끼고 있는 대신 대중들과 함께 하면서 운동이 섣불리 전면전으로 나아가 결정적 패배를 당하지 않도록 이끌었다. 볼셰비키들은 ‘당장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대중의 환상을 전혀 공유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최소한의 손실을 보면서 대중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도록 도왔다.

    10월 혁명으로!

    7월 시위 이후 부르주아 임시정부의 공세가 거세졌다. 레닌은 ‘독일첩자’로 낙인찍혀 도망쳐야 했다. 트로츠키는 감옥에 갇혔다. 볼셰비키 신문사는 폐간됐다.

    하지만 8월에 극우 장군 코르닐로프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정세를 완전히 역전시켰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코르닐로프 반란에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볼셰비키가 투쟁을 지도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코르닐로프 반란이 무엇보다 자신들의 자주적 권력을 파괴하기 위한 책동이라고 파악하면서 투쟁했다. 이런 투쟁 과정에서 볼셰비키 당만이 대중을 대변하고 이끌었기 때문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부터 볼셰비키의 영향력은 지속적으로 커지고, 확고해졌다. 그래서 10월경에는 전체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주도권을 쥘 수 있는 상태로까지 나아갔다.

    이렇게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지자 레닌과 트로츠키는 전면전을 제기했다. 하지만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 고참 볼셰비키 중 일부는 기회주의적으로 동요했으며, 내부 비밀을 외부에 누설하면서 전진을 가로막으려 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그것은 혁명이란 급격한 전환을 의미하는데, 이런 전환기마다 과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뒤처지는 부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노동자파업의 경우에도 준비기에는 ‘투쟁 없이 쟁취 없다’고 강하게 발언하는 지도자들이 정작 파업을 눈앞에 두고는 탄압을 두려워하고, 대중을 불신하면서 동요하고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혁명이란 수많은 대중파업을 응축하고, 100배 이상 더 강화한 최고 투쟁형태다. 이런 상황에서 결단력과 용기, 헌신성은 대단히 높아야만 한다. 당연히 이 시험대에서 좌절하는 혁명가들이 나타날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훤하다.

    ▲ 1917년 10월 25일 임시정부를 타도하려고 겨울궁전으로 진격하는 노동자 군대

    만약 이런 혁명가들이 다수이고, 지도부 또한 그렇다면 수년 또는 수십 년 동안 준비해온 결정적인 순간에 당은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당은 위기를 맞아 파괴되고, 혁명운동은 뚜렷한 방향과 응집력 없이 좌충우돌하다가 패배로 줄달음치게 된다. 1917년 10월의 러시아혁명을 제외한 수많은 혁명 경험이 이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러시아 볼셰비키들은 즉흥적인 감정에 따라 봉기를 일으키는 초좌익 모험주의자도 아니었지만, 혁명이 요구하는 결단과 용기, 희생정신이 부족한 나약한 운동가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기회를 이용해 10월 혁명을 성공시켰다. 10월 25일 아침, 자본가권력의 붕괴와 노동자혁명의 승리를 알리는 전단이 널리 배포됐다.

    “임시 정부는 폐쇄되었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대표 소비에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인민이 투쟁으로 쟁취하고자 했던 것, 즉 [전쟁을 중단하기 위한] 민주주의적 강화의 즉시 제안, 지주가 소유한 토지 몰수, 노동자의 생산 관리,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이 보장되었다. 노동자, 병사, 농민의 혁명 만세!”

    "일용노동자가 시장이 되고, 자물쇠 제조공이 공장주가 되다"

    허약한 자본가계급을 뒤로 제치면서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10월에 권력을 장악했다. 세계자본주의는 연관사슬의 가장 약한 고리에서 끊어졌다. 하지만 10월 혁명은 단지 한 고리만 끊은 것이 아니라 사슬 전체에 결정적인 파열구를 냈다.

    10월 혁명은 수많은 위대한 성과들을 낳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을 세상의 주인으로 우뚝 일으켜 세웠다는 것”이다. 짜르 전제에 대한 2월 혁명, 귀족에 맞선 투쟁,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투쟁, 평화와 토지와 민족적 평등을 위한 투쟁, 10월 혁명, 자본가계급의 분쇄, 5천 마일 전선에서 벌어진 3년간의 내전, 수년 동안의 국경 봉쇄와 기아와 고통과 유행병, 절박한 경제 재건과 새로운 난관들과 과거 청산으로 이루어진 수년, 이런 것들은 힘들지만 훌륭한 학교가 되었다. 무거운 망치는 유리를 박살내지만 동시에 강철을 벼려낸다. 혁명의 망치는 노동자계급과 인민을 강철처럼 단련시켰다.

    10월 혁명 직후에 분노에 찬 어느 반동 장군이 이렇게 적었다. “일용노동자가 시장이 된다. 자물쇠 제조공이 공장주가 된다. 짐꾼이나 경비원이 갑자기 재판장이 된다. 병원의 조수가 병원장이 된다. 이발사가 관리가 된다. 병사가 총사령관이 된다. 누가 이 사실을 믿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전에 일용노동자였던 시장이 구 관료들의 저항을 분쇄했다. 마차에 기름칠하던 일꾼이 수송체계를 정상화시켰다. 자물쇠 제조공이 공장을 가동시켰다. 병사가 장군을 패배시켰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자계급과 피억압 인민이 이처럼 세상의 주인이 되면 어떤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무정부적 시장 경제를 합리적인 계획 경제로 바꿀 수 있다.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쥐어짜고, 차디찬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치도록 이용됐던 기계와 공장 같은 생산력이 이제는 인류의 필요에 충실하게 기여하게 할 수 있다. 선택받은 극소수 엘리트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해 ‘모두 빛나는 주인공들이 되는 새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러시아 10월 혁명은 이 위대한 노동해방 세상으로 나아가는 첫출발이었다.

    자본가계급은 지금 “10월 혁명은 낡아빠진 것”이라고 때로는 은근히, 때로는 맹렬히 공격한다. 하지만 영원히 무덤 속에 파묻혀 버릴 듯한 10월 혁명의 기억을 계속 되살려내고 있는 것이 바로 자본가들이다. 만성적인 불황과 유령처럼 출몰하는 세계대공황의 위협, 자본가들의 배를 채우기 위해 무고한 노동자민중을 무참히 살육하는 야만적인 전쟁, 노동자들의 실업과 해고, 빈곤과 삶의 불안정성, 대재앙으로 나아갈 수 있는 끔찍한 환경파괴, 온갖 차별과 억압의 지속이야말로 10월 혁명의 부활을 간절히 부르고 있다.

    10월 혁명은 자본주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날 비상구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비상구는 노동자계급 앞에 저절로 열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이 노동해방을 강렬하게 갈망하며 러시아 10월의 교훈을 온전히 흡수할 때만 열릴 수 있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라는 새로운 조건에서 어떻게 ‘새로운 10월’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치열하게 모색할 때만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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