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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노해연-39호] 야코프 스베르들로프(上)
 정책위  | 2008·05·13 20:37 | HIT : 2,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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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야코프 스베르들로프(上)



    이 글은 1925년 3월 13일자로 발표된 레온 트로츠키의 짧은 기록이다. 여기에서 트로츠키는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라는 한 인물을 다루고 있다. 러시아혁명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임에도, 우리에게 스베르들로프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짧은 기록을 통해서 우리는 볼셰비키 전통이 얼마나 위대하고 투철한 노동해방 투사들을 보유하고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살펴볼 수 있다. - 편집자 주.





    영역본 해설


    러시아 혁명 29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비할 바 없이 위대한 볼셰비키 조직가 스베르들로프에 관한 트로츠키의 간략한 기록을 재발간한다. 이 글을 통해 우리의 독자들은 저 영웅적 인물에 대해 잘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는 1917년 혁명과 뒤이은 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혁명가의 유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는 1885년 6월 3일 니즈니-노브고로드 시에서 태어났다. 조판공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짜르 치하 러시아의 노동자계급 가족들이 할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그의 자녀들을 교육시킬 수 있었다. 열 살이 된 어린 소년 야코프는 김나지움(고등학교와 같은 등급의 교육기관)에 등록했고, 거기에서 5년 동안 공부했다.

    열다섯 살이 되자 그는 잡화점에서 일하기 위해 학교를 떠났다. 다음 해인 1901년, 니즈니-노브고르드에서 최초로 혁명적인 비합법조직이 만들어졌다. 같은 해에 스베르들로프는 16세의 나이로 혁명운동에 가담했다.

    대단히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는 빠르게 최선두로 나아갔다. 비합법활동의 시기에 그는 사실상 러시아 전역에서 지도적 인물로서 투쟁에 복무했다.

    1903년 러시아 노동운동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이 일어났다. 그 무렵 스베르들로프는 볼셰비키 파에 합류했고, 죽는 날까지 볼셰비키 대열에 남아 있었다.

    1905년 혁명기에 그는 우랄 지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노동자대표소비에트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그 시절 비합법활동을 했던 모든 노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오랜 기간에 걸쳐 감옥과 유형생활을 했다. 그가 처음으로 체포된 것은 1903년이었다. 1905년 혁명 패배 이후인 1906년부터 그는 18개월 동안 투옥되었고, 2년간의 감화원 생활을 하게 되었다. 되풀이되는 체포, 감금, 유형, 탈출이 이어졌다.

    1913년 가을 포로닌에서 볼셰비키 협의회가 열렸다. 당시 그는 유형 중이었기 때문에 협의회에 참가할 수 없었음에도, 당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자, 시베리아 극지방에서 유형 중이던 그는 당장 페트로그라드로 갔다. 1917년 4월 협의회에서 그는 중앙위원회에 또다시 선출되었다.

    두 번째 소비에트 총회에서 그는 전국소비에트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소비에트공화국 의장으로서의 업무와, 볼셰비키 당 ‘조직책임자’로서의 번거로운 책무들을 조화롭게 결합시켜 나갔다. 서른네 살의 나이에 때 이른 죽음을 맞을 때까지 그렇게 활동했다.

    볼셰비키 운동이 보유한 이 최상의 조직가에 관해서 지금은 아주 조금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 겹겹이 싸인 스탈린주의적 왜곡과 날조가 그의 명성을 뒤덮어버렸다. 소련 당국의 공식 신화는 10월 혁명과 내전 시기에 스베르들로프가 수행했던 역할의 대부분을 스탈린의 업적인 것처럼 치장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스베르들로프를 묘사할 때조차도 스탈린의 이미지와 유사한 것으로 변조하려 애썼다. 그러나 조직가로서 스베르들로프는 스탈린과는 정반대의 유형에 속했다. 1927년 트로츠키는 ‘조직가의 유형’이라는 측면에서 스베르들로프와 스탈린의 차이를 다음과 같이 대조해서 보여주었다.

    1919년 봄까지 당의 최고 조직가는 스베르들로프였다. 그는 [스탈린과는 달리] 서기장이라는 직함을 갖지 않았다. 그런 명칭은 당시에 아직 발명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는 그런 역할을 해냈다. 1919년 3월, 이른바 스페인 열병에 걸린 스베르들로프는 3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내전과 전염병이 확산되면서 도처에서 사람들이 쓰러져갔고, 당은 이러한 손실의 무게를 고통스럽게 실감했다. 레닌은 스베르들로프를 치하하는 두 번의 장례연설을 했다. 그 연설은 이후 스탈린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도 우회적이지만 매우 선명한 빛을 던져주는 것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혁명과 승리의 과정에서, 노동자혁명의 정수를 보다 완전하고 보다 포괄적으로 표현한 인물은 다른 누구보다도 스베르들로프였다.” 스베르들로프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조직가였다.” “이론가도 문필가도 아니며 비합법활동을 하던 한 겸손한 노동자가 단숨에 비할 바 없는 권위를 획득한 조직가로 성장했다. 그는 러시아 전체 소비에트 권력의 조직가였다. 또한 그는 놀랄 만큼 뛰어난 실력으로 당 활동을 체계화했다.” 레닌은 기념일에서든 장례식에서든 과장법을 쓰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스베르들로프에 대한 그의 찬사는 동시에 조직가의 임무에 대한 성격 규정이기도 했다. “전시 상황에서조차 우리는 거론할 만한 단 한 건의 갈등도 없이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스베르들로프와 같은 조직가가 있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그 시절 레닌과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가 성공할 수 있는 주요 조건들 중 하나에 관하여 적어도 한 차례 이상, 그것도 늘 새롭게 만족감을 느끼면서 서로 이야기한바 있다. 그것은 곧 지도그룹 내의 통일성과 연대였다. 여러 사건들과 장애물들이 가공할만한 압력을 가했고, 경험해보지 못한 문제들이 등장했으며, 날카로운 실천적 불일치가 때때로 발생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작업은 대단히 순조롭고, 우호적이며, 중단 없이 진척되었다.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우리는 지난 혁명의 단면들을 회상할 수 있다. “지도그룹의 통일과 연대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다.” “오직 그것만이 우리의 승리를 보증한다.”

    중앙기구의 결속은 볼셰비즘의 역사 전체에 걸쳐 준비되어 왔으며, 그 지도자들 특히 레닌의 의심할 수 없는 권위에 의해 유지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례 없는 일치단결에서 가장 주요한 전문가는 스베르들로프였다. 그의 기예가 갖는 비밀은 간단했다 : 대의라고 하는 단 하나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것. 이렇게 함으로써, 당에 속한 노동자들 중 어느 누구도 당 간부층으로부터 음모가 자행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전혀 갖지 않게 되었다. 스베르들로프가 가진 이러한 권위의 토대는 그의 성심(誠心)이었다.

    마음속으로 모든 당 지도자들을 비교해보면서, 레닌은 그의 장례연설에서 실천적 결론을 끌어냈다. “그러한 자질을 겸비하고 있는 누군가를 찾아야만 한다고 가정해볼 때, 스베르들로프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그가 혼자 해냈던 작업은, 이제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하고 그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집단 전체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말들은 결코 과장된 미사여구가 아니라, 엄밀하게 실천적인 제안이었다. 그 제안은 실행에 옮겨졌다. 한 사람의 서기 대신에 세 명으로 이루어진 협의회가 구성되었다.

    볼셰비키 당의 역사를 잘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레닌의 언급으로부터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스베르들로프의 생애 전체에 걸쳐 스탈린은 당 조직 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10월 혁명의 시기든, 소비에트 국가의 토대와 성곽을 구축하는 시기든 이 점은 동일했다. 스탈린은 또한 스베르들로프를 대신해서 만들어진 첫 번째 서기국에도 포함되지 못했다.

    스베르들로프에 관한 다음의 추모 기사는 1925년 레온 트로츠키가 쓴 것이다. 이 글은 1926년 당사 연보를 통해 소련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존 라이트(John G. Wright)가 러시아어 원본으로부터 번역했다.

    * * *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1917년 제1차 소비에트 총회 중 열린 볼셰비키 당 회합에서 나는 처음으로 스베르들로프를 알게 되었다. 스베르들로프가 회합을 주재하고 있었다. 당시 당 내에서는 이 비범한 인물의 진정한 재능을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불과 몇 개월 만에 그는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펼쳐보이게 된다.

    혁명 이후 초기를 거치는 동안 망명가들, 즉 해외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과 ‘국내의’, ‘본국의’ 볼셰비키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망명가들은 상당한 강점을 가졌다. 그것은 그들의 유럽에서의 경험, 그 경험과 연결된 넓은 시야, 그리고 과거 분파투쟁의 경험을 이론적으로 일반화하고 있었다는 데 기인한다. 당연하게도, 망명가와 비망명가 사이의 이러한 분할은 순전히 일시적인 것이었고, 모든 구별들은 오래지 않아 제거되었다. 그러나 1917년과 1918년에 이러한 구별들은 많은 경우 상당히 두드러져 보였다.

    그렇지만 그런 시절에조차 스베르들로프에게서는 아무런 ‘지역감정’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달 한 달이 지날 때마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조직적으로, 겉보기에는 별다른 노력도 없이, 수많은 사건들 및 레닌과의 긴밀한 접촉과 협력 속에서 성장했고, 강고해졌다. 피상적으로만 본다면 스베르들로프가 처음부터 최상급의 완성된 혁명적 ‘정치가’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혁명이 제기한 모든 문제들에 대해 그는 위로부터, 즉 일반적인 이론적 검토라는 견지에서 접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당 조직들을 통해 전달된 삶의 직접적인 맥박을 느끼며 아래로부터 문제에 접근했다. 새로운 정치문제가 논의되고 있을 때, 가끔 스베르들로프가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특히 그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때) 갈팡질팡하고 있거나 또는 아직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토론을 진행하면서 의견의 평행선을 따라 문제를 풀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다. ‘누가 그 일에 적합할까?’ ‘그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우리의 다른 임무들과 조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공동의 정치적 결론에 도달하자마자 곧바로 그 문제의 조직적 측면과 역량 배치의 문제로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거의 언제나 스베르들로프는 광범위한 실천적 제안들을 일찌감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백과사전과도 같은 기억력과, 사람들에 대해 면밀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그 토대가 되었다.

    초기 형성단계에서 소비에트의 모든 부서들과 기구들은 역량 배치에 관한 한 그에게 의존했다. 최초로 그리고 대략적으로 당 간부들을 배치하는 이러한 작업은 유례없이 비상한 수완과 창의성을 필요로 했다. 기존의 기구, 서류, 기록 등에 의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모든 것이 대단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직업혁명가 아무개 씨가 특정한 소비에트 기구(구성되었지만 여전히 단지 이름만 붙여졌을 뿐인 기구)를 이끄는 데 어느 정도로나 적격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직접적인 수단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심리적 직관이 요구되었다. 때로는 아무개 씨의 경력에서 두세 가지의 문제점들을 발견해내고, 그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결론을 끌어내곤 했다. 게다가 이러한 교체작업은 인민대표위원, 이즈베스챠[과거 소련의 정부 기관지] 인쇄공장 관리인, 소비에트 중앙위원회 성원, 정부 지도자, 기타 등등을 찾아내기 위해 모든 다양한 영역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이러한 조직적 문제들은 당연하게도 아무런 논리적 맥락 없이 발생했다. 즉 최상층으로부터 기층으로라거나 또는 그 반대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형태로, 우연적이고 혼란스럽게 발생했다.

    스베르들로프는 조사를 하고, 인물에 관한 세부 자료를 모으거나 기억을 되새기고, 전화연락을 하며, 사람을 추천하고, 업무를 할당하고, 약속을 잡아나갔다. 이 모든 일들을 그가 어떻게 해낼 수 있었는지, 즉 그의 능력이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지금에 와서 정확히 말하기란 힘들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이러한 작업의 상당 부분은 그 자신의 고유한 역할로 남겨져야 했다. 물론 레닌의 도움이 컸다. 누구도 그런 역할을 시도해보지 못했으며, 당시 상황은 늘 그렇게 긴박하게 돌아갔다.

    다양한 직책과 특별한 역할을 위해 집행위원회 성원들을 유용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스베르들로프는 전국소비에트집행위원회 의장으로서 조직적 작업의 상당 부분을 완수했다. 특별한 문제를 들고 찾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레닌은 이렇게 조언하곤 했다. “스베르들로프와 의논해 보십시오.”

    새로 부임한 ‘고위 간부’들은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스베르들로프와 상담해보는 게 필요하겠어.” ‘스베르들로프와 의논하는 것’은 비중 있는 실천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로서 불문율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물론 스베르들로프 자신은 이처럼 상당히 개인적인 방법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반대로, 당과 소비에트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서 그의 활동 전체는 보다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한 해결의 조건을 준비하는 데 바쳐졌다.

    따를 만한 선례도 없고, 아무런 법령이나 규칙도 없었던 그 시절에는 모든 영역에서 ‘개척자들’이 요구되었다. 그들은 거대한 혼돈의 한복판에서 자기 두 발로 일을 해나갈 수 있어야 했다. 스베르들로프는 있을 수 있는 모든 긴박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그러한 개척자들을 끊임없이 찾고 있었다.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그는 인물들에 대한 세부 사항들, 가령 어떤 사람이 이런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했었는지를 떠올리고, 이로부터 몇몇 후보자들이 과연 적합하겠는지 아닌지를 판단하곤 했다.

    거기에는 물론 많은 실책이 뒤따랐다. 그러나 놀랄 만한 일은, 그러한 실책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놀랄 만한 일은, 뒤죽박죽이 된 과제들, 엉켜있는 난관, 최소치의 인적 자원이라는 상황에 직면해서도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방법을 스베르들로프가 어떻게 찾아나갔는가 하는 점이다. [실천적이고 주체적으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조직적 관점 대신에 추상적 원리나 정치적 편의의 관점에서 각각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물론 훨씬 더 간단하고 쉬운 일이다. 이러한 양상은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시기의 본질 그 자체에 의해 바로 지금 우리들 내에서 늘 발견되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는 ‘명백한 목표’와 ‘물질적 인적 자원의 결여’라는 불일치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격심하게 느껴졌다. 문제의 실천적 해결이라는 핵심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들 중의 다수는 당혹감에 휩싸인 채 머리를 휘젓곤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스베르들로프 씨, 당신 생각은 어떻소?”

    그러고 나면 스베르들로프는 자신의 해법을 내놓곤 했다. 그의 견해는 이랬다. “이 시도는 충분히 실현 가능합니다.” 주의 깊게 선발된 볼셰비키 그룹이 파견되고, 이들은 정확한 요점을 보고받는다. 적절하게 연결이 이루어지고, 충분한 배려를 받으며, 필수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나면,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러한 길을 따라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어떠한 임무라도 해낼 수 있고 어떠한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고취되어야 했다.

    일을 하는 데에서 지치지 않는 낙관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스베르들로프의 작업에 든든한 토양을 제공해주었다. 당연하게도 이 말은 각각의 문제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100퍼센트 해결되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단지 10퍼센트만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만족할만한 일이었다. 당시로서는 10퍼센트의 해결만으로도 구제수단이 되었다. 그것을 통해 미래를 보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바로 이것이 저 전례 없이 고난에 찬 세월 동안 해야 했던 모든 작업의 관건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수송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전염병에 대항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혁명의 미래는 보장되어야만 했다.(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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