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참세상
하반기 비정규직 투쟁전선,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2008년 9월 22일]
투쟁사업장들의 상황 변화
뉴코아 합의 이후 승리이건 패배이건 휴지기를 갖게 되건, 투쟁사업장 문제가 '정리되어' 가는 국면이 시작되고 있다. 다행히 성신여대는 거의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알리안츠는 성과급 문제는 해결보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KTX·새마을호 투쟁은 결국 추석 전 타결이라는 꼭지점을 찍지 못하고 13일 밤에 고공농성과 쇠사슬농성 모두를 해제하게 되었다.
이랜드 투쟁도 공정위에서 홈에버에 대한 홈플러스의 기업결합 승인이 된 이상 홈플러스와의 교섭 진척이 예상되며, 불법파견 고용의제에 대한 대법원 판결도 나온 마당에 코스콤 역시 신임 사장이 들어오게 되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난 3월에 결성되어 5개월여 공동투쟁을 벌여왔던 ‘비정규·투쟁사업장 공동투쟁단’(공투단) 역시, 향후 투쟁사업장들이 만들어갈 새로운 공동투쟁을 위해 역사적 역할을 마감(해소)할 것을 결정하고 평가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하반기 비정규직 투쟁전선 설치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
이러한 상황에서 기륭공대위의 제안으로 ‘만인선언 만인공동행동’이 시작되었고, 지난 9일 서울역 촛불문화제에 이어 오는 23일 2차 공동행동으로 집회와 문화제가 진행된다. 공투단이 사실상의 힘을 잃은 후 투쟁사업장의 공동행동이 주춤했으나, 만인선언 운동은 다시 한번 하반기 비정규직 투쟁을 위한 공동행동의 깃발을 세우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하반기 투쟁전선 설치를 위한 다른 노력들도 존재한다. 전국비정규노조연대회의(전비연)는 10.26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 개최를 결정하고 9~10월 다양한 기획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철폐연대) 또한 비정규직 권리선언운동을 제안한 상태이다.
이러한 제안들은 새로운 문제의식들을 공통점으로 갖고 있는데, 그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걸고 단위사업장을 뛰어넘는 사회정치적 투쟁을 만들어가자”는 것과, “조직된 투쟁사업장만이 아니라 미조직 노동자들에게로까지 저항의 주체를 확장하자”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것들은 기존 투쟁전선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촛불투쟁의 경험 속에서 나온, 진일보된 문제의식임에 틀림없다.
진전된 문제의식에 따라 나온 제안들이라는 점은 분명 긍정적이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약점도 갖고 있다. 기륭공대위와 철폐연대의 제안은 모두 '선언운동'이라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현 시점에서 '선언'이란 것이 어떤 방식으로 운동의 발전을 매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다. 전비연의 제안도 ‘비정규노동자 5대 요구’를 선포하고 구체화하는 기획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
비정규악법·파견법 철폐, 투쟁사업장 문제 해결, 원청사용자책임과 특수고용 노동3권, 기간제 사용사유 제한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선언'하는 수준이라면, 이미 몇 해 전부터 운동의 과제로 제기되어 꾸준히 이뤄져왔던 것이다. 이제는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과 비정규투쟁의 ‘확산’ 문제를 중심에 두고 다뤄가야 할 시점이 아닐까?
아울러 기륭공대위의 제안은 상급단체인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도 이뤄졌는데, ‘아래로부터’ 공동행동을 묶어가려는 주체적 관점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아래로부터’를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히 원칙을 강조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현 시점에서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노총과 산별연맹 상층의 관료주의화는 시스템 자체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 이들이 대의원대회 · 중집회의에서 하는 결의조차 제대로 집행되지 않으며, 하다못해 이들이 내리는 공문조차 현장에서 무시되고 있다.
세계 경제위기라는 긴박한 정세를 내용으로 녹여내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권리선언/만인선언의 내용은 이미 수년 전부터 비정규운동 단위에서는 충분히 공유하고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나 이제 세계 경제위기와 대공황에 직면하여 "위기의 대가를 어떤 계급이 지불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노동과 자본의 대회전을 앞두고 있는 긴박한 정세이다.
이런 정세적 요인들 속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알기 쉽게 대중화할 수 있는 내용을 만들어 접근해야 한다. 그저 '사회양극화' '비정규악법' 문제만 갖고 접근해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부르주아 신문들조차 1929년 대공황 이후 최대의 위기라고 비명을 질러대는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위기를 핑계로 비정규악법조차 무시하고 비정규노동자들을 짓밟으려 할 것이다.
세계 경제위기를 매개로 내용을 채워가려는 것은 “저항의 주체를 미조직 노동자들에게로 확장하자”는 문제의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자세이다. 현재 대대적인 경제위기가 몰려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라면, 이상하리만치 조직노동자들보다 미조직노동자들이 훨씬 더 피부로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가폭등 못 살겠다”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에서 터져 나오고 있고, ‘월급고개’라는 말이 인터넷에서 회자된다.
저항의 주체를 미조직 노동자들로 확장하기 위해
앞서 말한 것처럼 추석을 전후하여 기존 비정규·장기투쟁사업장들의 상황은 많이 변화하고 있다. 정리되는 사업장들이 늘고 있고 투쟁동력은 점차 떨어지고 있으며, 하반기 투쟁전선 설치를 위한 여러 제안에 대해 참여하는 밀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따라서 투쟁사업장들을 중심에 놓고 하반기 투쟁을 만드는 것은, 자칫 ‘주체 없는 전선’이 되어버릴 공산이 크다.
저항의 주체를 미조직 노동자들로 확장하는 운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규모와 양이 필요한데, 투쟁사업장들이 그 짐까지 짊어질 수는 없는 형편이다. 그렇다면 답은 간단하다. 투쟁사업장이 아닌 다른 사업장들의 노동자들을 운동의 주체로 끌어올리는 길이다. 지금까지 투쟁사업장들이 외롭게 짊어져왔던 투쟁전선 유지의 책임을 나누자는 것이다.
그 수단은 다시 한번 ‘아래로부터’ 노동자들의 공동행동을 다양한 기획과 방식으로 만들어가는 길 뿐이다. 강남성모병원 파견노동자들의 투쟁처럼 새롭게 투쟁사업장으로 올라오는 사업장에 연대를 조직하는 것도 그런 수단들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투쟁사업장이 아닌 다른 사업장들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나서는 것은 미조직 노동자 조직화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미조직 노동자들은 몰라서 나서지 않는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과 투쟁이라는 저항수단을 몰라서가 아니라, 저항에 나설 경우 치러야 할 대가가 무엇인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투쟁사업장들을 바라보는 이들의 시선은 “불쌍하다. 돕고 싶다”는 수준이며 “내가 나서야겠다”는 의식으로까지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 경제위기는 미조직 노동자들이 올라올 수밖에 없도록 하는 강한 추동력이 되어줄 것이다. 투쟁사업장이 아닌 다수 비정규사업장 평조합원들은, 미조직 노동자들이 보기에 자신과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노동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을 운동의 주체로 끌어올리는 것은 하반기 투쟁과 내년 투쟁을 위해 돌파해야 할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
다윗이 기발한 방식을 개발하여 골리앗을 꺾은 것이 아니다. 다윗은 용기를 내어 투쟁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다른 다윗들과 연대할 수 있었고, 그 힘으로 마침내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 평범한 진리를 미조직 노동자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이들의 대대적인 진출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도도한 흐름이 될 것이다.
"운명은, 하고자 하는 이는 인도하지만, 마지못해 하는 이는 끌고 간다" - 자, 운동을 밀어 올리는 주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운명에 끌려갈 것인가! 선택은 명확하지 않은가!
오민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