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가폭등으로 라면 사재기에 나선 서민들의 모습]
사람 잡는 물가폭등 - 이게 "민생정치"냐!
이명박 정부는 라면, 달걀, 소주 등 52개 생필품 가격을 집중 관리하기로 했다. 전혀 ‘시장주의자’답지 않은 행동이다. 그만큼 이 나라의 물가폭등(인플레이션) 사태가 심각하다. 한국의 물가상승률은 OECD 30개국 중 11번째로 높다.
민생파탄
특히 서민생활과 직결된 품목의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 라면은 작년보다 21% 올랐다. 사람들은 라면 사재기를 하느라 뛰어다녔다. 3,000원 하던 자장면은 3,500원으로, 1,000원하던 김밥은 1,500원으로 올랐다. 한 끼 식사를 하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학원비와 보육시설 이용료 역시 작년보다 6% 이상 올랐다. 밀가루 가격은 1년 사이에 64%나 폭등했다.
대학 등록금도 심각한 수준이다. 수십 개 대학의 이공계열 등록금이 1,000만 원에 이른다. 상당수 학생들이 등록금을 못 내 공부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휴학을 하고,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한다. 돈을 구하지 못해 학생이나 부모가 비관 자살하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수천만 원 들여 졸업하면 ‘88만원 인생’이 기다리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틈만 나면 민생정치를 운운하며 자신이 서민을 구할 것이라고 악을 썼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은 ‘서민지옥도’다. 민생파탄이다. 게다가 이 위기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불난 데 기름 붓기’다. 이명박 정부는 총선이 끝나자마자 경기를 진작시키기 위한 방안을 조속히 취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금리인하가 대표적이다. 그렇게 하면 시중에 돈이 더 많이 풀려서 투자가 촉진되고 경기가 살아날 것이라는 계산이다. 그러나 이는 사태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불난 데 기름 붓기
인플레이션이란 다름 아니라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려(과잉유동성) 화폐가치가 추락하는 현상이다. 자본가들의 배를 채워줄 투자처를 찾지 못한 유동자금이 이미 흘러넘치고 있다. 그것이 결국은 부동산투기로 이어지고, 서민은 빚더미에 오르지 않는 이상 집 한 채 구할 수 없는 거품경제가 조성됐다. 그런데도 이명박 정부는 오히려 거품을 더 키우고 인플레이션을 부추기는 정책을 밀어붙인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경기부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노동자를 살리는 경기부양이 아니다. 자본가들을 위해 세금을 깎아주고, 자본가들을 위해 금리를 인하한다.
그러면 이명박 정부가 원하는 대로 시중에 더 많은 돈이 흘러나와, 자본가들의 투자여력이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돈이 풀린 만큼 돈의 가치 역시 더 떨어진다. 물가는 자동으로 급상승하고, 자본가들은 노동자의 주머니를 후려 자기 금고를 채운다. 안 그래도 빈부격차로 고통을 겪고 있는 노동자들은 물가폭등이라는 폭탄을 맞고 빈곤의 수렁에 더 깊게 빠져든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자본가체제는 오직 노동자대중의 처절한 희생을 통해서만 자신의 생존과 번영을 꾀한다.
노동자의 생존을 위하여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끌어내야 하는가? 자본주의 지옥에서 노동자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노동자계급 앞에 갈림길이 놓여 있다. 생존을 포기하고 자본가를 위한 제단에 스스로 몸을 바칠 것인가? 아니면 자본주의 지옥을 분쇄하고 노동자세상을 만들기 위해 과감하게 도전할 것인가!
* * *
물가폭등을 넘어설 대담한 임금인상투쟁을 펼쳐야 한다!
자본가들은 이미 충분히 단호하다. 경총은 올해 ‘적정 임금인상률’로 2.6%를 제시했고, 대기업들에서는 임금을 동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가상승이 고율 임금인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단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자본가집단이 원하는 것은 명백하다. 물가상승이 이루어질 때마다 노동자들은 임금투쟁을 통해 생존권을 지켜왔다. 그것은 삶의 수준을 개선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상유지에 가까웠다. 자본가들은 이제 그 현상유지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이명박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바탕으로, 노동자의 생존권적 요구인 임금인상과 임금투쟁을 봉쇄하려고 한다. 이미 그들의 머릿속에는 노동자에 대한 어떠한 양보도, 타협도, 화해도 없다.
현실이 가리키는 방향
<2008년 민주노총 임금요구안(이하 임금요구안)>에 따르면, 자본가들의 수익성은 최근 40년간 가장 양호한 반면, 노동자의 임금인상률은 2001년 6.6%, 2002년 4.9%, 2003년 7.0%, 2004년 4.2%, 2005년 3.9%, 2006년 2.9%로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지난 수년간 민주노총 임금투쟁을 지배해왔던 양보교섭 논리는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켜내지 못했다. 현상유지조차 실패한 것이다.
지금 민주노총 조합원의 평균임금은 표준생계비에도 못 미친다. 표준생계비 평균이 4백3십6만4천 원인데, 임금총액 평균은 3백2십8만2천 원이다. 결국 민주노총이 산정한 생계비의 75%밖에 못 받고 있는 것이다. 아주 큰 폭의 임금인상이 이루어져야만 그나마 표준생계비를 획득할 수 있는 상황이다. 더욱이 민생파탄 수준인 최근의 물가폭등 때문에, 임금인상 요구는 아주 절박한 생존의 문제가 됐다. 특히 최저생계비 수준을 간신히 넘나드는 임금을 받을 뿐인 저임금 노동자들,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물가폭등은 직격탄이나 다를 바 없다.
따라서 현재 노동자들의 대중적 단결투쟁기구인 노동조합은 임금투쟁에서 한층 더 단호해져야만 한다. 물가폭등에 맞서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양보 없는 임금투쟁, 특히 저임금·미조직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최저임금을 생활임금의 8~90% 수준으로 올릴 것’, ‘완전한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의 요구를 내걸고 노동자계급 단결투쟁을 주도하는 역할을 적극 담당해야 한다. 그러나 노동조합 지도부들은, 불행하게도, 자본가들만큼의 단호함조차 보이지 못하고 있다.
물러서려는 노동조합 지도부
민주노총의 올해 임금투쟁 계획 자체가 패배감으로 뒤덮여 있다. <임금요구안>은 ‘연대임금 쟁취’라는 항목에서 이렇게 말한다. “부족한 생계비 전체를 요구하려면 큰 폭으로 임금을 인상해야 하나 민주노총은 비정규, 영세 노동자의 임금상승을 통한 임금차별의 해소에 보다 큰 목표를 두어 전체 노동자의 2008년 임금인상 수준을 현실화하기로 했음. 이에 따라 민주노총은 현재 표준생계비의 81.2%를 달성하기 위해 8.0%를 요구함(비정규직에 대해서는 20.2% 인상 요구).”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하향평준화’를 통해 임금격차를 줄이자는 주장에는 아무도 공감하지 않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민주노총 임금요구안은 ‘연대임금’이라는 좋은 구호 아래 임금인상투쟁에 제한선을 그어놓았다. 표준생계비의 81.2%? 왜 우리의 목표가 ‘표준 이하’여야 하는가!
현실화? - 어떤 현실화가 필요한가
임금이란 노동자가 계속 노동할 수 있도록 생계를 유지하는 비용이다. 따라서 표준생계비는 임금의 ‘최소치’다. 게다가 최근의 물가폭등을 감안한다면 이 ‘최소치’는 한층 더 높아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민주노총에서는 표준생계비의 81.2% 달성을 위한 8% 임금인상 요구를 제시하면서, 그것이 ‘2008년 임금인상 수준을 현실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현실감각’은 아주 기이한 것이다. 최소한 표준생계비 100% 쟁취를 내걸지 않은 채, 어떻게 ‘현실화’라는 명찰을 붙일 수 있단 말인가! 8% 임금요구안이 확정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연연해할 이유가 없다. 적어도 표준 이하의 삶을 강요당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양보교섭에 ‘연대임금’이라는 좋은 이름을 붙인다고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적과 싸울 수는 없다. 우리가 먼저 양보하면, 자본가들은 간과 쓸개까지 빼가려 할 것이다. 패배를 자초하지 않으려면 일체의 양보논리를 배제해야 한다. ‘노동자 살리기’를 위해 공세적으로 자본가들을 밀어붙이는 것, 그것만이 노동자의 삶을 지키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임금투쟁 계획이다.
오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