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연구]
강령·전술 문제를 둘러싼 기회주의·중도주의와의 투쟁 - 볼셰비키와 독일 좌익급진파의 경우
양효식
들어가며
혁명정당은 강령·전술·조직 문제를 둘러싼 단호한 투쟁을 통해 형성되고 단련된다. 볼셰비즘의 역사가 바로 이 점을 잘 보여준다. 볼셰비키당 역사의 주요 계기들은 모두 이러한 강령·전술·조직 문제를 놓고 기회주의·중도주의에 맞선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강령·전술 문제에서 혁명주의와 기회주의 간의 화해할 수 없는 차이는 조직의 분립으로까지 이어져야 했다. 강령·전술 상의 투쟁과 조직 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상호 연결되었고, 혁명주의 진영과 기회주의 진영 각각의 특징을 더욱 명료하게 했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투쟁을 통해서 혁명정당을 벼려냈다. 볼셰비키에게 혁명정당의 정체성은 일차적으로 이러한 강령·전술·조직론에서의 혁명적 통일에 있었지, 다른 무엇, 예를 들어 조직 규모나 대중적 기반이 혁명정당의 일차적인 기준일 수 없었다. 볼셰비키에게 당원 수나 현장기반은 그러한 강령·전술·조직을 위한 투쟁의 단지 결과물일 수만 있을 뿐이었다. 만약 볼셰비키가 강령·전술·조직을 둘러싼 투쟁을 그 같은 당원 수나 대중기반 문제에 종속시켰다면 멘셰비키와의 분립을 단호히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에서 기회주의 진영과의 동거가 무한정 계속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강령·전술·조직 문제를 둘러싼 투쟁 자체가 불철저하게 되거나 자제된 채 정치적 미분화 상태로 남아 있음으로써 혁명정당 건설이 유실되는 상황을 맞았을 것이다.
다 알다시피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같은 시기 독일사회민주당 내 좌파의 경우 이러한 투쟁의 불철저함으로 인해 제 때 혁명정당 건설을 이루지 못했고 그로 인해 혁명의 패배를 맞기까지 해야 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 등, 나중에 독일공산당의 창건자가 될 이들 ‘좌익급진파’는 1914년 8월 독일사민당의 ‘역사적 배신’이 있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 당과 감히 분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 공인된 맑스주의 정당이 경악스럽게도 1914년 제국주의 전쟁에서 독일 제국주의를 공식 지지하는 것을 직접 겪고 나서야만이 비로소 이 당에서 분립할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좌익급진파는 이 배신에 모두 경악했지만, 배신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누적되고 준비되어 온 것이다. 이미 이 최종 배신이 있기 10여 년 전부터 개량주의자들과 노조관료들이 사실상 당의 주류가 되어 있었고, 당 강령 상의 맑스주의적 원칙들은 악세서리에 불과할 뿐 의회주의와 조합주의가 당의 일상 실천과 전술을 지배하고 있었다. 로자를 비롯한 좌파는 이에 맞서 당내 투쟁을 전개했지만, 이 투쟁은 강령·전술을 둘러싼 단호한 투쟁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했고 계속 제동이 걸렸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투쟁의 조직적 결론, 즉 분립을 불사하고서라도 혁명적 강령·전술을 위한 투쟁을 일관되게 비타협적으로 가져가지 못해서였다. 당시 거대한 당원 수와 현장기반을 가지고 있던 사민당에서 분립한다는 것은 곧 아무런 영향력도 현장기반도 없는 고립된 소수가 되는 것을 뜻할 뿐,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이 기본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 좌파가 볼셰비키처럼 혁명적 강령·전술을 위한 투쟁을 어떤 다른 고려사항보다도 우선했다면, 나중에 사태에 뒤쳐진 상태에서 결성된 스파르타쿠스동맹/독일공산당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단련되고 대안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준비된 당을 일찌감치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좌익급진파와 볼셰비즘은 개량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에 맞서 혁명적 강령을 재정립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한 제2 인터내셔널 내 좌파진영을 함께 이루었다. 좌익급진파와 볼셰비즘은 각각 자국에서 개량주의자들 및 기회주의자들과의 조직적·전술적 차이를 둘러싼 투쟁에 기원을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볼셰비키와 좌익급진파의 이러한 투쟁은 항상 동일한 결론에 이르지는 않았다. 혁명적 강령의 재정립을 통한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 과정에서 전술적 불일치와 대립이 생겨났다. 특히 중도주의에 대한 태도와 관련하여 둘 간의 전술적 간극은 크게 벌어지기도 했다. 전쟁이 터진 후 1914~16년의 시기에 좌익급진파가 중도주의와의 단절을 주저하고, 심지어는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단결’이라는 논리에 사로잡혀 동요하고 혼란을 빚었기 때문이다. 중도주의까지 포함한 ‘반전 사회주의자들’의 단결인가, 공산주의적 좌파(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의 단결인가? 이 시기에 혁명적 강령·전술의 재정립을 위한 레닌의 투쟁은 곧 이러한 대동단결에 맞서 공산주의적 좌파의 단결을 위한 기초를 확립하는 투쟁이기도 했다.
우리는 독일 좌파의 강령·전술을 둘러싼 불철저한 투쟁을 반면교사로 삼아 당 건설투쟁의 중요한 교훈들을 끌어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독일 좌파가 카우츠키로 대표되는 중도주의 세력과의 대동단결이라는 덫을 끊어내지 못함으로 인해 어떠한 전술 상의 왜곡과 후퇴를 가져오게 되었는지 잘 봐야 한다. 제국주의 전쟁을 맞아 제2 인터내셔널이 붕괴하던 1914년에서 1916년까지의 그 중요한 시기에 이러한 전술 상의 왜곡과 후퇴는 혁명적 강령에 입각한 새로운 당과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데 치명적인 한계로 작용하였다. (여기에는 멘셰비키 국제주의자들과의 ‘단결’을 위해 화해주의자로 기능했던 트로츠키도 포함된다.) 이와는 달리 볼셰비키는 이 시기에 국제 사민주의 내 중도주의자들의 전술과 슬로건에 대한 가차 없는 투쟁을 통해 당시 대동단결의 덫에 빠져 동요하던 인자들을 중도주의적 입장으로부터 떼어내 혁명적 강령·전술 쪽으로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 좌파와 대비하여 볼셰비키의 이러한 투쟁이 갖는 의미들 또한 당연히 우리의 당 건설투쟁에서 새겨야 할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다.
독일사민당 : 에어푸르트 강령과 개량주의적 실천
당의 타락은 전술이 강령적 원칙으로부터 분리될 때 일어난다. 전술은 점점 더 기회주의적으로 되어가면서 최소저항선을 좇고, 강령적 원칙은 화석화되어 액자 속에 가두어진다. 흔히 강령 상의 통일만 되어 있다면 전술 문제에서의 차이는 부차적인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나 계속되는 당 내 전술 상의 차이는 이미 강령 상의 통일이 깨져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술 문제에서 당의 기회주의적 오류가 극복되지 않고 지속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 당이 강령 상에서 타락했음을 뜻한다. 따라서 전술 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강령 상의 통일을 위한 투쟁과 분리될 수 없으며, 결코 부차적인 문제일 수 없다. 전술적 오류에 대한 일관된 투쟁만이 강령 상의 통일을 단지 추상적 일반론적 수준에서의 통일이 아닌 굳건한 실천적 통일로까지 상승시켜 준다.
제2 인터내셔널의 최대 정당이자 지도적인 정당인 독일사민당은 에어푸르트 강령에 입각하여 창건되었다. 이 강령은 엥겔스가 몇 가지 유보를 달고서 추인한 ‘맑스주의’ 강령이었다. 이 에어푸르트 강령은 운동의 궁극 목표를 규정한 최대강령과 자본주의 하에서 실현 가능한 요구들을 담은 최소강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렇게 최대-최소강령으로 구분되어 있었지만 현실 운동에서 양자가 분리되어선 안 되며 당의 실천을 매개로 연결되어야만 사회주의 강령으로서의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강령이었다.
그런데 만일 최대강령을 막연한 먼 훗날의 과제로 돌리고 추상적 선전의 주제로만 삼는 한편 일상적인 투쟁 조직은 최소강령으로 제한한다면 이 강령은 애초 의도와는 달리 개량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이용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당면 투쟁과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 권력쟁취 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양자 간에 연결고리를 끊는 그러한 개량주의적 실천을 은폐하는 허울 좋은 위장막으로 기능할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이 위험성이 독일사민당에서 곧 현실화되었다. 1890년대 말을 지나 1900년경으로 오면 개량주의가 은연중에 당의 실천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이 시기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는 이러한 개량주의적 실천을 솔직하게 이론으로까지 옮겨놓은 것일 따름이었다. 그러한 개량주의적 실천에 걸맞게 강령도 개량주의적으로 수정하자는 주장이었다. 본의 아니게 베른슈타인은 당의 강령과 실천의 불일치를 폭로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카우츠키주의 중앙이 나서서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논박하고 에어푸르트 강령을 옹호했지만, 실제로 중앙이 한 일은 당의 실천적 타락이 폭로되는 것을 서둘러 틀어막는 일이었다. 수정주의 논쟁이 요란하게 벌어지고 공식적으로 당 대회에서 우익 수정주의는 거부되었지만 당의 우익 개량주의적 실천은 아무 탈 없이 그대로 지속되었다. 카우츠키주의 중앙의 ‘정통 맑스주의’는 이러한 우익 개량주의적 실천을 가려주고 덮어주는 좌익적 외피로서 기능했다. 당 내 우익과 중앙이 무언의 동맹을 이뤄 독일사민당을 기회주의적 조류가 확고히 지배하는 정당으로 고착시켜 나갔다.
1914년 ‘대 배신’의 뿌리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 내에는 배신의 뿌리인 이러한 기회주의적 흐름만이 아니라 이에 맞서 투쟁하는 혁명적 흐름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좌익급진파라고 불린 로자 룩셈부르크, 클라라 체트킨,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츠 메링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칼 라덱과 안톤 파네쿡 등도 나중에 가세했다. 혁명적 강령을 재정립하는 데서 이들이 기여한 부분들은 그 동안 많이 왜곡 전달되어 왔다. 레닌에게서 그의 혁명적 특질을 지워버리려고 애쓴 스탈린주의자들이 이들 좌익급진파의 혁명적 특질에 대해서도 동일한 능욕을 가했기 때문이다.
좌익급진파는 올바로 재평가되어야 하지만, 그 평가의 기준은 최종적으로는 강령·전술 문제를 둘러싼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 및 그 결과물로서의 혁명정당 건설과 관련된 것일 수밖에 없다. 당시 독일 운동에서 오직 그들만이 혁명정당 건설의 잠재적 주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전쟁 시기와 그 직후인 1918~19년의 혁명적 격변 시기에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볼셰비키 같은 단련된 혁명정당이 아니라 단지 그 중핵, 그것도 매우 취약한 중핵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이 문제는 독일 일국의 차원으로 그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독일은 러시아 혁명의 국제적 확산 전망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좌익급진파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기의 정세적 성격과 이 시기에 필요한 전략·전술, 그리고 권력 장악을 위한 이러한 프로그램(강령) 쪽으로 노동자계급을 획득할 수 있는 대안적 지도력을 갖춘 당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을 중심으로 좌익급진파를 검토할 것이다. 특히 중도주의 세력과의 통합·분립 문제에서 좌익급진파와 볼셰비키가 취했던 각각의 태도와 이것이 어떻게 서로 다른 전술로 나타났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카우츠키주의 중앙 대(對) 좌익급진파
독일 사회민주당은 제2 인터내셔널의 당들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는 당이었다. 이 당은 맑스주의 정통임을 자부하였고, 칼 카우츠키는 이 정통을 대표하는 이데올로그로서 ‘맑스주의의 교황’으로 불렸다. 카우츠키의 이런 거대한 정치적 영향력으로 인해 당시 많은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이 1900~10년 동안에 진행된 독일 사민주의의 타락 규모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카우츠키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를 비판하고 맑스주의 정통을 지키는 모양새를 취했기 때문에 독일사민당이 실천과 전술에서 기회주의적으로 타락해가는 현실은 효과적으로 감춰질 수 있었다. 레닌조차도 러시아 기회주의자들에 맞서 투쟁할 때 여전히 무비판적으로 카우츠키와 베벨의 정치적 권위에 호소했을 정도다. 레닌이 기회주의와의 투쟁을 러시아로부터 인터내셔널의 상태로까지 일반화해 나간 것은 나중 시기에 가서였다. 국제적 차원에서 카우츠키주의 중앙에 대해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로자와 리프크네히트 주위에 조직된 독일 좌파였다. 카우츠키주의 지도부에 대한 좌파의 투쟁에서 선봉장은 로자였다. 레닌이 아직 카우츠키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고 있었을 때 로자는 이러한 선봉 역할을 했다. 로자의 이러한 공헌은 1914년 독일 사민주의의 붕괴 이후에 레닌이 공공연히 인정한 혁명적 사회주의의 유산이다.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맞서 맑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재확인했다. 카우츠키는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잉여가치 착취율을 끊임없이 높여야 할 필연성과 공황으로 빠져 들어갈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다시 논증했다. 그러나 카우츠키에게 이런 논증들은 단지 정통 교리문답 상의 주제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그에게는 1890년대 말과 1900년대 초의 시기가 여전히 비혁명적 시기로 보여졌다. 독일 사민주의의 전술, 즉 평화적으로 노동조합 조직률을 계속 높여나가고 의회 의석수를 꾸준히 늘려나가는 전술은 도전 받지 않았다. 공식 당 내 논쟁에서 수정주의를 물리치고 강령 상의 기존 원칙들이 형식적으로 고수되었지만, 이미 당의 일상 실천과 전술은 사실상 수정주의로 물들어 있었다. 결국 카우츠키의 맑스주의 정통에 대한 방어는 이러한 실천과 전술의 타락을 감추는 가리개 역할에 다름 아니었다.
로자를 비롯한 당 내 좌파가 카우츠키와 같은 진영을 이뤄 수정주의를 격퇴하고 맑스주의 교의들을 방어했지만, 그들 좌파는 수정주의 비판에 그치지 않고 당의 일상적 실천방향에 대해서도 문제의식을 키워갔다. 그래서 당의 중앙을 이루고 있는 카우츠키주의 정통파와의 차이는 전술 문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로자의 <<개량인가 혁명인가>>는 베른슈타인 비판의 형식을 취하여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방어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 붕괴 이론을 포기하는 것으로 자신의 수정주의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붕괴 이론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주춧돌이다.” 그러나 여기에 깔려 있는 실천적 함의는 당 중앙의 평화적이고 점진주의적인 전술을 겨냥하고 있다. 특히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증대시켜 사회주의로 나아간다는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객관적 조건은 노동조합의 두 가지 경제적 기능을 시지프스의 노동 같은 것 ― 그럼에도 필수불가결한 것 ― 으로 변모시킨다.” 로자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발전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아니면 불필요하게 만든다는 개량주의 사상을 논박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당의 강령과 실천방향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로자는 당내에서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의 길에 대한 밑그림을 그려주는 프로그램을 공공연하게 요구한다.
“우리의 강령(프로그램)은 그것이 투쟁의 모든 사안들에서, 모든 계기들에서 우리에게 쓸모 있지 않다면, 그리고 현실 적용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적용에 의해서 우리에게 쓸모가 있다면 허접한 종이뭉치일 것이다. 우리의 강령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역사적인 사회 발전의 정식을 담는다면 그 강령은 그 모든 특징적인 기초들에서 이 발전의 모든 과도적 국면들을 정식화해야 하며, 그 결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사회주의로 가는 도상의 매 계기에서 이에 상응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행동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강령을 버려야만 하게 되는, 또는 자신의 강령에 의해 버림받아야만 하게 되는 시간이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있을 수 없다.”1)
이것은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대한 비판일 뿐만 아니라 에어푸르트 강령의 핵심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즉 사회주의라는 궁극 목표에 대해서는 형식적으로만 인정하고 실제 전술에서는 개량주의로 흘러가는 것이 별 탈 없이 허용되는 그러한 최소-최대강령 분리를 문제 삼은 것이다. 로자와 독일 좌파가 볼 때 기회주의에 대한 유일한 실질적 반박은 노동자권력을 일정에 올리는 새로운 전술을 발전시키는 데에 있었다. 로자는 1904년 12월 17일자 롤란트 홀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기회주의와 발본적으로 싸우는 유일한 수단은 우리 스스로 전진하는 것, 전술을 발전시키는 것, 운동의 혁명적 측면을 강렬화하는 것이다.” 혁명적 강령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계기를 이루는 이러한 전술적 차이의 발전은 당연히 대중투쟁과의 연관 속에서 이루어졌다. 1902년에서 1906년 사이에 유럽 노동자계급의 대중투쟁이 그것이다. 1902년의 벨기에 총파업, 1903년의 네덜란드 총파업, 1905년 혁명으로 절정에 이른 러시아의 대대적인 파업 물결, 루르 지방의 광부 파업 등은 독일 사민주의 내 전술 논쟁을 촉발시켰다. 카우츠키주의 중앙은 대중파업을 그들의 무기고를 확충해줄 가치 있는 추가물로 보았지만, 의회주의 전술에 종속적이며 그 전술을 뒷받침할 수단 이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예컨대 1905년 예나 당 대회에서 베벨(당의 의장으로서 카우츠키와 함께 당의 핵심 지도부였다)이 이런 입장을 정식화했다. 그는 파업투쟁이란 무기는 방어적이고 보조적인 전술이라고 주장했다. 당의 전술을 실행하기 위한 두 가지 대 전제, 즉 보통선거권과 노동조합 설립권이 공격 받을 때에 그 무기는 꺼내들어야 한다고 베벨은 주장했다. 대중파업에서 나타난 대중들의 거대한 에너지와 힘은 단지 노조 조직률과 의회의석 확대라는 중심 과제에 부속물로서, 예비군으로서만 여겨졌다. 이에 대한 로자와 좌파의 대답은 1906년의 <<대중파업론>>으로 제시되었다. 볼셰비키가 러시아의 대중투쟁들로부터 배우고 있고, 그에 따라 임박한 혁명을 위해 예각화된 정세인식을 발전시키고 있던 때에 독일 좌파는 대중투쟁들 속에서 수정주의와 카우츠키주의 전술을 대체할 대안적인 전술의 근거를 보았다.
이에 앞서 1905년 당 대의원대회에서 노동조합 관료들은 총파업 논의를 비토 했다. 그리고 이어서 예나 당 대회에서는 대중파업의 사회적 중요성을 협소화시키고 계급투쟁으로서 대중파업이 갖는 역사적 지위를 제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려 했다. 이에 맞서 논쟁을 벌인 로자는 독일 사민주의와 독일 노동자계급에게 1905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러한 당 내 논쟁의 연장선에서 제출한 <<대중파업론>>은 새로운 전술의 발견과 함께 새로운 정세인식을 발전시켰다. 1905년 혁명은 의회적 시기의 종언, 즉 노동자계급의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인위적으로 분리되던 시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의 보수적 관료층, 근시안적인 당직자들이 내세우는 권위, 그리고 대중행동에 대한 그들의 뿌리 깊은 적의는 바로 이 분리에 힘입은 것이었다. 로자가 볼 때 대중파업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 간의 인위적인 장벽을 허문다. “경제투쟁은 하나의 정치적 중심에서 다른 하나의 중심으로 넘어가는 전달자이다. 정치투쟁은 경제투쟁을 위한 토양의 주기적인 비옥화이다.” 대중파업은 어느 계급이 사회를 지배할 것인가의 문제를 즉각 열어젖힌다. 그리하여 의회 전술이나 노조 전술을 방어하는 무기 정도로 대중파업의 용도를 제한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지를 바로 대중파업 자체가 보여준다. 또한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을 위한 그 어떤 프로그램(강령)에서도 대중파업은 중심 지위를 점한다.
<<대중파업론>>은 총파업과 권력쟁취 투쟁을 이끌고 지도하는 데서 당이 차지하는 중심 역할을 강조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약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노조관료의 생래적 보수성을 지적한 점, 그리고 새로운 혁명적 투쟁의 시기에 맞춰 방향 정립을 해야 하며, 그러한 투쟁에 걸맞는 전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대중파업론>>은 독일 사민주의의 정세인식 및 강령과 유의미한 단절을 이루어냈다. 좌파는 대중파업을 프롤레타리아혁명에 필수불가결한 일부로, 노동자계급 자신의 권력 준비에서 중심적인 부분으로 보았다. 반면 카우츠키주의 정통파는 대중파업의 거대한 에너지를, 유용하지만 보조적인 전술로 보아 그들 자신의 개량주의 구도 속에 끼워 넣는 방식으로 대중파업 문제에 대응했다.
카우츠키는 1909년에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 대중파업은 혁명적 투쟁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형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대중파업의 역할을 인정했지만(특히 러시아에서), 독일 사민주의가 자신의 강령이나 전술을 변경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했다. 대중파업으로 나타나는 계급투쟁의 활성화는 새로운 혁명적 시기의 개막을 알린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그것은 단지 ‘일반론’의 수준에서만 인정하는 것이었다. 카우츠키는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 한편으로는 좌파의 혁명적 전술에 대한 요구와 다른 한편으로는 수정주의자들의 계급협조 강령에 대한 요구 양 쪽을 모두 논파하려고 시도했다. 그의 ‘중도주의’적 처방은 먼 훗날의 사회주의혁명에 대한 낙관주의와 현실에서의 수동적인 대기주의의 특이한 결합이었다.
아직 초제국주의론으로 빠져들기 전인 이 때만 해도 카우츠키는 자본주의가 군사주의와 전쟁으로 나아가는 경향을 인정했었다.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는 그것이 중심 전제였다. 그러나 카우츠키는 이 문제로 자본주의를 도덕적으로 규탄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반면, 그에 따라 당의 전략을 변경하고 정세에 대비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독일사민당 내 전술적 차이들은 대중파업 문제로 한정되지 않았다. 1905년과 1906년에 좌파, 특히 칼 리프크네히트는 적극적인 반군사주의 캠페인에 착수해야 한다고 당에 촉구했다. 좌파는 청년들과 병사들 사이에서의 반군사주의·반징집제 선동이 필요하다고 당에 제기했다. 이에 대해 당 지도부는 의회에서 자본주의적 예산안에 투표하지 않으며 부르주아 정당과 블록이나 연정을 맺지 않는다는 ‘원칙’을 견지했지만, 반군사주의 선동을 해야 한다는 제기에 대해서는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한 투쟁은 불법이며 당을 헌정체제에 맞서는 상황으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일관되게 반대했다. 좌파의 문제제기와 비판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의 기존 전술, 즉 꾸준히 당의 합법적 지위를 강화하고 노조 조직률과 현장 기반을 확대해 나가는 전술은 전혀 도전 받지 않고 계속되었다.
카우츠키/베벨 중심의 정통파 대 미래 독일공산당의 창건자들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특정 전술의 역할 및 그 현실 적용성에 관한 불일치를 넘어 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1905년 혁명의 여진이 계속되는 가운데 양자 간의 차이는 다가오는 정세의 성격과 그에 따라 사민주의가 채택해야 할 전술·전략에 관한 차이로 점점 더 벌어져 갔다. 이 차이들은 제국주의에 관한 논쟁에서 표면화되었다. 당 내 전술 차이가 현 단계 자본주의에 관한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전술 논쟁이 사실상 강령 논쟁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드러내 주는 계기였다. 사민주의 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 혁명을 위한 프로그램을 재정립하는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국주의로 나타나고 있는 자본주의 발전의 이 새로운 시기에 대해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의 방법에 입각한 철저한 검토가 필요했다. 이후 제국주의 이론은 국제 사민주의 내 혁명적 좌파가 강령을 재정립하는 데서 필수불가결한 정치경제학적 토대가 되었다.
제국주의 논쟁 : 카우츠키주의 중앙과의 단절
혁명적 좌파의 제국주의 이론은 그 내부에서 다소간에 차이가 있었지만,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이자 자본주의 모순이 극대화되고 위기로 점철된 파괴적인 단계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동일했다. 이러한 제국주의 이론이 갖는 실천적 함의는 분명한 것이었다. 이 시기는 노동자계급운동에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선택을 직접적으로 제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기존 민주주의 제도들을 평화적으로 활용하여 운동을 강화해 나간다는 전망을 여전히 고수하는 사민주의 다수파를 그 발밑에서부터 뒤흔든다. 제국주의와 군사주의의 논리로 인해 자본주의 스스로가 결국 의회에 남아 있는 그 어떤 권위도 파괴할 것이며, 점진적이고 민주적인 발전 전망을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할 것이다. 이를 두고 혁명적 좌파의 일원인 칼 라덱은 제국주의가 “노동자계급의 무기였던 의회활용 전술을 빈껍데기로 만들고 있다”고 묘사했다. 경쟁하는 자본가 국가들이 군사주의에 점점 더 의존함에 따라 평화주의적 군비철폐운동과 국제평화 캠페인 따위는 이제 역사적으로 쓸모없는, 공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1911년에 로자는 <평화 유토피아>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군사주의와 제국주의가 정치생활의 중심축이 되어 있다. 정치상황에 대한 열쇠는 여기에 있지, 정부 각료의 책임이나 기타 순수 의회적인 요구들과 같은 문제들에 있지 않다.” 이제 좌파는 의정 활동과 의석수가 아니라 대중행동이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답변이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제2 인터내셔널은 유럽 지배계급들 간에 전쟁이 선포될 경우 국제 총파업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을 명목상 결의하였다. 레닌과 로자를 포함한 국제 사민주의 내 좌파가 이런 결의를 끌어내기 위해 앞장서서 투쟁했다. 좌파의 제국주의론에 대한 카우츠키의 대응은 전쟁이 시작된 뒤에 나왔다. 1914년 11월에 나온 당 기관지 <<새 시대>>에 실린 글 <초제국주의>에서 카우츠키는 초제국주의론을 내세워 좌파의 제국주의론을 논박하려 했다. 카우츠키는 제국주의론의 정치적, 강령적 논리에 마주치자 과거 <<권력으로 가는 길>>에서 자신이 주창했던 입장 ―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군사주의와 전쟁으로 나아간다는 ― 으로부터 몸을 빼버렸다. 제국주의는 농업 생산이 공업 생산에 뒤쳐지고 있는 경제적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가 채택한 하나의 정책일 뿐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래서 자본주의는 전쟁이 끝나면 다시 경로를 바꿀 기회를 제공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세계대전 이후에 군비경쟁을 지속할 그 어떤 경제적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가계급 자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러하다.” 정책으로서의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적 성장에 명백한 장애물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제국주의는 그 자신의 무덤을 파고 있다.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순수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가 아직 그 종말의 지점에 이르러야 할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나라들의 공업 발전이 그에 상응하는 농업 생산의 확대를 끌어낼 수 있는 한 계속해서 발전할 수 있다.”2)
카우츠키가 볼 때 반드시 제국주의와 군사주의로 나아가지 않아도 될 수 있는 다른 정치적 대안이 자본주의에 존재한다. 경제 영역에서 카르텔과 독점의 성장이 자본주의에 원기를 불어넣어 이 정치적 대안을 채택하도록 만들 것이다. 세계 자본주의가 파국을 피하고 자기 이익을 찾기 위해 협동을 이루는 단계, 즉 카르텔화(化)를 외교정책으로 옮겨놓은 초제국주의가 그러한 정치적 대안이다. 이 새로운 이론으로부터 어떤 정책, 어떤 강령이 도출될 것인가? 그 이론에서 나올 수 있는 강령은 오직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평화주의적 반대 정책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전쟁 자체가 자본가들에게 새 길을 찾도록 교육시켜 줄 것이므로 사회주의자들이 할 일은 단지 그것을 앞당기기 위해 정력적으로 평화 캠페인을 펼치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일정에 오르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다시 전 세계적 안정 시기를 확보시켜 줄 정책을 채택할 능력을 갖추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는 자본주의 사회를 설득하여 자본주의 자신의 잠재적 이익을 가져다 줄 길을 취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러면 이제 사민주의는 제국주의 전쟁 이전에 채택했던 전술로, 전쟁 때문에 일시적으로 유보해 놓았던 그 전술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카우츠키의 ‘이론적’ 타락은 혁명적 좌파의 강령적 문제제기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갈 데까지 가버렸다.
독일 좌파는 카우츠키주의 중앙에 정면으로 맞서서 혁명적 전술을 위해 투쟁했고, 제국주의에 대한 정치경제학을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그 과정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전통의 중요한 근본 요소들을 다시 살려놓았다. 그러나 독일 좌파의 입장은 사민주의가 가장 첨예한 시험대 앞에 놓여지게 된 시점에 이르러서도 아직 불완전하고 불철저한 상태에 있었다. 1914년 8월 4일에 독일 사민주의는 제국주의 전쟁 공채에 찬성표를 던졌다. 로자는 경악했다. 당시 스위스에 있던 레닌도 독일 최고사령부가 날조한 것을 부르주아 신문들이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고 믿었다. 로자는 “1914년 8월 4일자로 독일 사민주의는 악취 나는 시체가 되었다”고 선언했지만, 그녀를 중심으로 한 좌파는 새로운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과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한 명확한 강령적 기초를 세워낼 수 없었다. 기회주의와의 강령적 분립을 위한 기초가 되어줄 핵심적인 원리와 전략의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여 이를 돌파해낸 것은 레닌과 볼셰비키였다. (국제적으로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레닌과 볼셰비키가 수행한 역할로 말하자면 이 시점까지는 독일 좌파만큼 두드러진 것이 아니었다.) 사민주의 정당들이 어떻게 기회주의 정치로 타락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에 권력쟁취 투쟁을 위한 강령적 기초를 발전시키는 것, 온갖 기회주의적 요소들과의 분립을 위한 강령적 근거를 명확히 하는 것, 이런 문제들이 이 시기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직면한 본질적인 문제들이었다.
레닌 : 제국주의와 사민주의 타락의 뿌리
로자를 위시한 독일 좌파는 사민당 지도부의 기회주의를 줄곧 비판해 왔지만, 그러나 그들의 제국주의 이론들과 전술적 제안들은 노동운동에서 기회주의 조류가 어떻게 발생 발전했는지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담고 있지 못했다. 레닌의 제국주의 이론은 최고 발전단계에 이른 자본주의의 경제적 메커니즘에 대한 파악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서 노동운동의 기회주의를 이 제국주의 단계에 자리매김 하려고 했다. 레닌에게는 제국주의 정치경제학만이 아니라 제국주의에 대한 ‘정치적’ 파악이 또한 중요하였다.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분열>이라는 글에서 레닌은 “제국주의적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에서 승리한 기회주의 사이의 경제적 연관”을 볼셰비키는 항상 보아왔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는 사회배외주의자들과의 분립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끌어냈다”고 말한다. “이제 모든 제국주의 나라들에서 ‘부르주아 노동당’이 불가피하며 자연스럽다. 그러나 전리품의 분할을 놓고 그 제국주의 나라들이 치르고 있는 필사적인 투쟁을 감안할 때 그 같은 당이 여러 나라에서 오랜 동안 유행할 수 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제국주의가 노동귀족에 기반을 둔 부르주아 노동당들을 육성했지만, 그러나 제국주의 전쟁은 다수의 나라들에서 노동운동 기회주의자들 및 이들과의 단절을 거부해 온 사민주의 내 인자들의 기반을 제거해 버린다는 것이다.
레닌이 여기서 일차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대상은 독일사민당 지도부의 일원이자 노조 총연맹의 관료인 칼 레기엔이다. 그러나 또한 레닌은 ‘맑스주의 중앙’인 카우츠키가 레기엔을 비롯한 노동운동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방패막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우츠키주의가 다름 아닌, 레닌 자신이 지금까지 러시아 운동 속에서 맞서 싸워 온 중도주의적 화해파(‘단결’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주의와 기회주의를 중재하려 했던 경향)의 독일 버전이라는 것도 이 시점에서는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카우츠키주의 중앙은 ‘단결’을 앞세워 사태를 비껴가려 했다. 그리고 개량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을 이 단결의 유지에 종속시켰다. ‘단결’의 기치 하에 독일 사민주의 다수파는 수정주의 베른슈타인과 단절하기를 꺼려했다. 러시아의 중도주의자들도 같은 ‘단결’ 슬로건 하에 러시아 사민주의 내 단절과 분립 움직임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레닌은 이 국제적 경향에 맞서 맑스주의자들만의 단결을 위한 전쟁을 수행했다. 1914년 8월의 배신이 있기 직전인 4월에 레닌은 <단결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단결은 위대한 일이며 위대한 슬로건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단결은 맑스주의자들만의 단결이지, 맑스주의자들과 맑스주의의 반대자이자 왜곡자들 사이의 단결이 아니다.”라고 했다. 레닌은 러시아에서의 기회주의에 대한 투쟁 경험을 일반화하여, 사회주의의 분열의 뿌리가 무엇인지 누구보다 더 잘 인식했다. 특히 노동귀족과 노조관료 그리고 부르주아 노동당 등 제국주의에 대한 정치적 파악의 결과로 독일 좌파보다 전쟁 초기에 더 날카롭고 명확하게 제국주의와 기회주의 사이의 연관을 인식할 수 있었다.
전쟁과 중도주의에 대한 투쟁 : 로자와 레닌
전쟁 기간 동안 레닌과 로자 간의 차이는 전쟁 이전 기간에 레닌과 로자가 각각 수행했던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로자와 좌익급진파가 처했던 상황은 레닌에 비해 여러 면에서 더 어려운 상황이었다. 독일 좌파는 형식적으로는 혁명적 유산을 버리지 않은 대중정당 속에서 활동했다. 그 당의 지도부는 형식적으로는 베른슈타인주의를 거부했고, 에어푸르트 강령을 고수했다. 그러나 내용에서, 실천에서는 기회주의 전술을 십여 년 동안 실행해 왔다. 좌파는 카우츠키주의 중앙과 동맹을 맺고 우파에 대한 공격에서 선봉에 섰다. 좌파는 이러한 동맹 관계 때문에 우파의 출당을 끝내 밀어붙이지 못했다. 만일 철저히 밀어붙였다면 일차로 당 내 기회주의의 분포와 세력 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드러나게 했을 것이며, 그리고 이차로는 중앙의 순전히 말뿐인 급진성이 폭로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동맹으로 인한 당 내 투쟁의 불철저함이 좌파의 발목을 잡았다.
1905년에서 1910년까지 진행된 대중파업을 둘러싼 전술논쟁 속에서 카우츠키주의 중앙에 대한 폭로가 부분적으로는 이루어졌다. 안톤 파네쿡은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1912년 <<새 시대>>에 기고한 글에서 “카우츠키주의적 급진성”의 특징은 “혁명을 먼 미래의 사건으로, 정치적 묵시록으로 보는” 데 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노동조합과 의회의 머릿수를 늘려나가고, 그렇게 하여 병력을 과시하기만 하면 된다. 카우츠키주의적 급진성은 이런 전술을 정당화하는 용도 이외에 현실의 실천에 영향을 미치는 게 거의 없다.” 파네쿡은 급진적인 최종목표와 현실의 수정주의적 실천 사이의 이러한 분리가 결국 카우츠키를 좌파에 대항하여 베른슈타인과 화해하는 길로 이끌 것이라고 예견했다.
“수정주의자들은 그 어떤 혁명적 행동도 거부한다. 그리고 카우츠키는 혁명적 행동을 먼 훗날의 일로 무기한 연기시켜버린다. 이로 인해 필연적으로 수정주의자들과 카우츠키는 많은 현안들에서 하나로 단결하여 우리에게 맞설 것이다.”3)
이와 같이 파네쿡과 로자 같은 인물들에 힘입어 독일 좌파는 사민당의 붕 뜬 원칙들을 전술의 저울로 달아 보았고, 그 속에서 당과 당의 이데올로그들이 얼마나 겉과 속이 다른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좌파 스스로도 이런 당 내에 계속 남아 있는 데서 오게 되는 약점을 피할 수 없었고, 장기적으로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작용할 것이었다. 좌파는 당 기구의 관료적 관성과 맞서 싸우고, 그것이 대중들을 수동화 시키는 효과에 대해서도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한 비판을 가했지만, 이것을 조직론으로, 어떤 종류의 당을 건설해야 하느냐의 문제로 제기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다. 로자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중상 비방하는 것처럼 당의 역할을 부정하거나 ‘대중의 자생성’에 의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과 달리, 로자는 대중정당 내 비주류 반대파로서 자신이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옹호해야만 했던 전술을 실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그런 종류의 당을 발전시켜 본 경험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독일에서 로자가 이러한 당 건설 과제를 수행할 딱 들어맞는 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합법주의에 젖어 있고 관료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대중정당과 노동조합이 압도적인 대중 장악력을 가지고 있는 운동 현실에서 로자가 확고한 당 기간부대를 선발하고 그들을 단일하게 묶어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한 대안적 전략 ― 맹아적인 강령 ― 을 중심으로 첨예한 분파투쟁을 수행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레닌은 1914년 이전 독일 좌파에게서 이것이 결여되어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레닌은 로자가 가명으로 쓴 <<유니우스 팜플렛>>에 대한 서평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유니우스의 소책자를 읽고 있으면 비합법 조직의 동지들을 전혀 가지지 못한, 한 고립돼 있는 사람의 모습이 우리 머리 속에 그려지게 된다. 우리의 혁명적 슬로건을 그 결론으로까지 추론해나가고 그 슬로건의 정신으로 대중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데 익숙한, 그러한 비합법 조직의 동지들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유니우스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모든 독일 좌익주의자들 ― 위선과 현학자적 태도와 기회주의자들에 대한 ‘친화성’으로 짜여져 있는 그 비열한 카우츠키주의 그물에 걸려 버린 독일 좌익주의자들 ― 이 공유하고 있던 약점의 결과물임을 망각한다면 이는 심각한 오류일 것이다.”4)
로자가 이 시기에 독일사민당과 분립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여전히 때 이른 것이었는가? 혁명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그룹들은 대부분 이 시기에 로자가 독일 사민주의 내에 조직된 좌익분파를 건설했어야 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분파 건설을 넘어 분립과 새로운 당의 건설로 가면 의견이 갈린다. 1914년 8월의 역사적 배신이 일어나기 전에 분립하여 새 당을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다’는 의견이 다수다. 독일사민당 지도부가 자국 지배계급의 제국주의 전쟁을 공공연히 지지하여 대중들에게 그 배신자적 본질이 돌이킬 수 없이 입증되기 전에는, 단지 당내 경향을 조직할 근거는 있지만 아직 분립을 결행할 근거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독일사민당 내에서 조직된 분파투쟁이 힘차게 전개되었다면 당 관료층 내부의 결정적인 대립 충돌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만일 좌파가 타협하길 거부했다면 분립으로, 또는 축출과 신당 결성으로 이어졌으리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오늘날 중도주의 그룹들은 이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항복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일 따름이다. 나중에 레닌은 전쟁 전 러시아에서 불가리아에서 이탈리아에서 네덜란드에서 기회주의와의 분립은 프롤레타리아 전위를 강화시켰고 노동자계급의 주요 부문들을 1914년 국제 사민주의의 파산으로부터 구출해주었다고 평가했다.5)
1914년 8월의 배신이 있고 나서 얼마 안 지나 레닌은 <전쟁에 관한 테제>를 작성했다. 여기서 그는 독일사민당의 행위를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규탄한 다음, “제2 인터내셔널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파산”은 전쟁이 있기 오래 전부터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이미 준비되어 온 것이라고 선언했다. 독일 당 및 여타 당들의 ‘중앙’은 이제 이들 기회주의자들에게 투항해버렸다. “미래 인터내셔널의 임무는 인터내셔널에서 사회주의 내 부르주아 조류를 단호하고 돌이킬 수 없게 제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1914년 11월에 레닌이 작성한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성명 <전쟁과 러시아 사민주의>에서는 “현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키는 것이 유일하게 올바른 프롤레타리아 슬로건”이라고 밝혔다.
이 시기에 레닌은 노골적인 배신자들, 즉 사회배외주의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위해 ‘좌익’적 또는 ‘맑스주의’적 외피를 제공해 주는 카우츠키주의적 중도주의자들과도 명확히 단절해야 할 필요를 거듭 거듭 제기했다. 카우츠키는 모든 사민주의자들에게 자기 조국을 방어할 권리를 부여하였다. 카우츠키는 또 “인터내셔널은 전시에 유효한 무기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평화의 무기이다”라고 하면서, 제국주의 전쟁이 자본주의에 내재적인 것임을 부정하였다.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는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것에 스스로를 제한해야 한다고 카우츠키는 주장했다. 각국의 우익 중도주의자들이 카우츠키의 이런 입장에 가세했다. 레닌은 사회배외주의에 이러한 좌익적 외피를 제공하고 있는 이들 중도주의 세력에 대해 가장 비열한 변절행위라고 비난했다.
1914년 말까지는 완연히 세 개의 경향이 형성되었다. 하나는 노골적인 배외주의자들이다. 그 다음은 일관된 전쟁 반대자들이다. 세 번째는 레닌이 “혼란되고 동요하는 자들”이라고 부른 경향으로서, “현재 기회주의자들의 뒤를 좇고 있고, 기회주의를 정당화하려는 그 위선적인 시도에 의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장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자들이다. 이 중도주의 경향 내의 일부는 두 번째 일관된 전쟁 반대 경향 쪽으로 다시 획득할 수 있지만, 그러나 사회배외주의자들과의 완전한 단절 및 폭로를 단호히 취함으로써만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한다는 정세인식 및 전술을 채택함으로써만 획득할 수 있다고 레닌은 강조한다.
한편 레닌은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전제할 때 억압자들에 대항하는 피억압 민족의 반란은 마땅히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16년의 아일랜드 봉기에 대해 그는 단호히 이러한 입장을 취했다. 이 문제에서 볼셰비키는 당시 반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소수파의 위치에 처했다. 독일 좌파는 <<유니우스 팜플렛>>에서 최초로 전쟁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밝혔는데, 레닌은 이를 볼셰비키의 전시 강령과 대비하여 “매우 불완전”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유니우스 팜플렛>>이 유럽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내전을, 사회주의를 위한 계급전쟁을 명확히 촉구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팜플렛이 “현재의 전쟁에서 승리와 패배 모두 똑같이 독일 인민에게는 치명적”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는 것에 대해 레닌은 두 가지 문제를 집중 제기하며 비판을 가했다. 첫째, 팜플렛은 사민주의의 배신에 대해 말하면서 그 배신이 사민주의에서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고, 또한 구체적으로 전쟁 이전의 카우츠키주의적 형태로 존재했던 기회주의를 비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팜플렛은] 기회주의에 대해서나 카우츠키주의에 대해서나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틀렸는데, 왜냐하면 ‘배신’을 기회주의 ― 오랜 역사(즉 제2 인터내셔널의 역사 전체)를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의 조류로서의 기회주의 ― 와 연결짓는 것 없이 그 배신에 대해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6)
둘째, 팜플렛은 “민족 전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즉 제국주의는 모든 민족 전쟁을 반동적인 것으로 되게 했다는 것이다. 레닌은 이러한 정식화에 대해 특히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볼 때 팜플렛의 그 같은 정식화는 두 가지 특별히 위험하고 잠재적으로 반동적인 입장들에게 길을 열어준다. 그 하나는 군비철폐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운동에 대한 반동적인 무관심의 태도이다. 먼저, “팜플렛은 반동적인 전쟁이 아닌 다른 전쟁은 존재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으므로 어처구니없는 ‘군비철폐’ 선전을 낳는다.” 군비철폐 선전은 노동자계급에 대해서도 비무장을 요구하게 되며,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켜야 할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에 일대 혼선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특히 위험하다. 볼셰비키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비무장 군비철폐 논리와 평화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 속에서만 건설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제국주의와 민족 문제
<<유니우스 팜플렛>>의 정식화에 내포된 다른 한 가지 더 중요한 문제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 운동들에 대한 태도 문제다.
“팜플렛은 또한 민족 운동들에 대한 무관심이라는 훨씬 더 어처구니없고 숨김없는 반동적인 태도를 낳는다. 그리고 그 같은 태도는 ‘대’(大) 유럽 민족들, 즉 약소 식민지 민중들을 억압하는 민족들의 성원이 사이비 과학적인 거만함으로 ‘민족 전쟁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할 때 배외주의가 된다.”7)
민족 전쟁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민족 전쟁이 제국주의적 억압에 맞서 수행될 때는 마땅히 지지해야 한다고 레닌은 주장했다.
“제국주의 강대국에 대항하는 민족 전쟁은 가능하고 실제로 일어날 개연성이 클 뿐만 아니라, 불가피하며 진보적이고 혁명적이다. 물론, 민족 전쟁이 성공하려면 피억압 나라들의 거대 다수 인민들의 일치된 노력이나 또는 특별히 유리한 국제 정세나 또는 동시에 주요 강대국 중 하나에서 부르주아지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봉기나 그 어느 것이든 이 중 하나라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8)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 투쟁에 대한 레닌의 지지는 추상적인 원리적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레닌은 민족 투쟁을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대항하는 투쟁의 필수적 구성부분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그의 제국주의 세계경제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레닌의 <<유니우스 팜플렛>> 비판은 로자의 정식화에 내포된 함의에 초점을 맞춘 것인데, 곧 이런 함의가 여타 좌파 ‘국제주의자’들에 의해서 아예 실천으로 구체화된다. 이들은 민족자결권에 반대하는 캠페인에 보다 능동적으로 뛰어든다. 레닌은 이들 좌파 국제주의자들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와 투쟁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정립해 나간다. 러시아 당의 부하린과 피야타코프, 그리고 폴란드와 네덜란드 당의 좌파들은 제국주의 분석으로부터 레닌과는 다른 결론을 끌어냈다. 그들이 볼 때 “제국주의는 이제 군사주의 세계체제로서 승리했다. 그리고 이 승리한 제국주의는 모든 민족적·민주적 권리들을 절멸시켰고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제국주의는 사민주의의 낡은 최소강령 ― 민주적 제권리 요구와 개량 요구 ― 을 더 이상 쓸모없게 만들었다.”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이러한 민주주의적 요구들을 제기하는 것은 이제 공상적이고 퇴행적이라고 피야타코프와 부하린은 주장했다. 그들은 최소강령 요구들이 “사회주의 강령과 모순을 빚는다”며 삭제해 버릴 것을 요구했다. 승리한 세계체제로서 제국주의는 또한 모든 민족 투쟁, 민족 독립을 위한 투쟁을 역사적으로 반동적인 것이 되게 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민족자결권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부하린과 피야타코프가 결사반대한 것은 바로 이런 논리에서였다. 비변증법적인 방식으로 부하린은 정치투쟁과 정치적 요구를 경제 분석으로 환원시켰다. 부하린은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강령이 필요함을 인식한 데서는 레닌과 다르지 않았지만, 민주주의적 요구들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화나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 투쟁들이 그러한 사회주의혁명 프로그램에서 고리들로 역할 할 수 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9) 이런 식으로 부하린은 과거 러시아 사민주의 내 경제주의자들의 방법론을 국제적 규모로 반복했다. 그는 제국주의 세계경제의 성격으로 인해 경제적 요구, 최소요구들을 위한 정치투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이런 부하린과 피야타코프를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자라고 이름 붙였다.
“제국주의적 경제주의자는 제국주의의 도래를 개량 투쟁 및 민주주의 투쟁과 어떻게 연결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과거의 경제주의가 자본주의의 도래를 민주주의 투쟁과 연결시킬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10)
맑스주의 국가론의 발전
부하린의 이러한 제국주의적 경제주의는 그의 비변증법적인 방법에서 비롯했는데, 제국주의 국가에 대한 그의 분석에서 이 점은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부하린은 제국주의 세계경제에서 명확히 나타나고 있는 국가화 경향을 국가자본주의의 실제 완성으로 간주하는 혼동을 범했다.
“더욱 더 국가는 집합적 혼합적 자본가로서 생산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직접적 착취자가 된다. … 이렇게 해서 최종 유형의 현대 제국주의 강도국가가 발생한다. 철의 조직인 이 제국주의 국가는 그 탐욕스럽고 억센 발톱으로 사회의 살아있는 몸체를 잡아챈다.”11)
부하린은 새로운 전체주의 국가가 노동자 조직들과 모든 민주적 권리들을 다 삼켜버리게 되든가 아니면 노동자계급이 그들 자신의 국가권력을 조직해 나가면서 국가의 틀을 뚫고 성장하여 안으로부터 국가를 터뜨려버리든가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가능성은 없다. 따라서 사민주의의 최소요구와 민주주의 요구는 이 새로운 리바이어던[제국주의 강도국가]에 의해 역사적으로 더 이상 불필요해져 버린, 어떤 결실도 가져올 수 없는 공상이 되어버렸다.”12)
레닌은 부하린이 모순적인 역사적 경향을 이미 확정된 기정사실로 보려고 하는 비변증법적 논리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레닌은 민주적 자유권들을 억압 폐지하는 것이 제국주의 국가의 경향이라면 이는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과 여타 피억압·피착취 층으로부터 그러한 자유권들을 지키려고 하는 투쟁들을 낳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이 민주적 권리들은 완전히 발달한 자본주의에 고유한 특성으로, ‘선진국’ 자본주의에 내재하는 공고한 규범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없었다. 민주적 권리들을 둘러싼 투쟁은 더 이상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투쟁이 될 수 없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뗄 수 없이 하나로 연결되어야 했다. 최대-최소 두 개의 강령으로의 분리는 극복되어야 했다. 그러나 최소강령을 통째로 없애버려야 한다는 부하린의 요구는 레닌이 볼 때 제국주의의 중심 모순 ― 제국주의가 제국주의 자신에 반하는 운동들을 만들어내는 모순 ― 을 활용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였다. 전쟁 전에 파네쿡은 카우츠키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단지 부르주아지에 반대하는, 국가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일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에 반대하는 투쟁이다.”13)
레닌은 부하린의 위 글 <제국주의 국가 이론에 대하여>를 읽고 난 뒤 그 글의 여백에 붙인 주석에서 부하린이 국가 문제에 대한 아나키스트들과 사회주의자들 간의 차이라고 설명해 놓은 내용은 “틀렸고 불완전하다”고 적어 놓았다. 그러나 레닌의 견해도 바뀌었다. 부하린의 비변증법적인 방법과 파네쿡의 느슨한 정식화에 대해 거부하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일체의 아나키즘 경향에 대해 여전히 뿌리 깊은 의심을 보내긴 했지만, 이제 레닌 자신이 혁명적 맑스주의 전통에 담긴 근본적인 반국가주의를 재발견하게 된다. 레닌은 1917년의 <4월 테제>에 이르러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분쇄”, “국가권력의 새로운 형태인 ‘코뮌 국가’로 부르주아 국가의 대체”를 혁명적 맑스주의 강령에 핵심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1917년 8월과 9월 사이에 쓴 <<국가와 혁명>>은 국가에 관한 레닌의 성숙한 견해를 정식화한 것으로서, 카우츠키의 국가기구 인수론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국가와 혁명>>의 애초 집필계획안에는 끝내 완성시키지 못한 마지막 장이 들어 있는데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령을 개정해야 할 필요”에 관한 장이다. 파리코뮌과 관련한 맑스·엥겔스의 혁명적 입장을 재확인하는 이러한 근본적인 강령 변경을 레닌이 거듭 주장하고 나선 것은 무엇보다도 제2 인터내셔널의 정통 사회민주주의를 겨냥해서다. 레닌은 자신에 앞서 부하린과 파네쿡이 카우츠키에 대해 비판한 지점, 특히 부르주아 국가기구 분쇄를 맑스주의 강령의 정중앙에 놓아야 할 필요를 ― 비록 비변증법적인 방식으로라고 할지라도 ―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그들이 “올바른 궤도” 위에 있었음을 깨닫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트로츠키에 대한 레닌의 비판
레닌에게는 이러한 <<유니우스 팜플렛>> 비판 및 부하린과의 논쟁이 곧 공산주의적 좌파의 단결을 위한 강령적 기초를 확립하는 투쟁이었다. 레닌은 이를 위해 ‘시류를 거슬러야’ 했는데, 왜냐하면 당시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단결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 반전 사회주의자들의 흐름이 대세를 이루는 것처럼 보였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전을 중심으로 대동단결해야 한다는 이 흐름은 러시아 사민주의에서 특히 강했다. 파리에 근거지를 둔 멘셰비키 국제주의자들의 신문 <<골로스>>가 전쟁에 반대하여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사회배외주의에 굴복한 플레하노프 같은 러시아 사회주의자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골로스>>를 승계하여 1915년 1월에 <<나셰 슬로보>>가 창간되었는데, 이 신문을 중심으로 러시아 반전 사회주의자들의 상당한 결집이 이루어졌다. 트로츠키, 마르토프, 루나차르스키, 리아자노프, 로조프스키, 발라바노바 등이 모였다. 과거 볼셰비키였던 인자들도 포함된 이 반전사회주의자들의 그룹은 러시아 사민주의 내 낡은 분할구도는 이제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며, 볼셰비키에 대해 조직적 독립과 분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종파주의라고 비판했다. <<나셰 슬로보>>는 전쟁에 반대해서나 또는 플레하노프 같은 ‘사회주의’ 전쟁상인들에 반대해서나 그 어떤 통일적인 노선을 가지지 못했다. 예를 들어 마르토프 같은 사람은 전쟁에는 반대하면서도 사회애국주의자들을 노동자운동에 대한 배신이라고 규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멘셰비키의 두마 의원단 대표인 치하이제가 1915년 9월의 찌머발트 반전사회주의자 회의를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지지하길 거부했을 때 <<나셰 슬로보>>의 편집자들은 치하이제나 의원단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 신문의 내적 이질성으로 인해 전쟁에 대한 노선이 왔다갔다 동요했다. 볼셰비키가 ‘조국 방위’ 입장을 유지한 사회주의자들에 반대하여 러시아 전제정의 패전을 요구하고 있던 상황에서 <<나셰 슬로보>>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볼셰비키가 배상 없는 평화를 요구하는 사회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화시킬 것을 요구하는 동안 <<나셰 슬로보>>는 문제를 회피하며 내적으로 모순된 태도를 취했다. 그 신문의 핵심 정강은 제국주의 전쟁 반대와 함께 ‘국제주의적’ 사민주의의 재단결, 즉 전쟁 지지 진영으로 넘어가지 않은 모든 사회주의자들의 재단결 요구였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단결’ 공세에 반대하여 조직적·강령적 독립을 확고히 유지하였다. 레닌은 단결론에 대해 이와 같이 반박했다.
“우리는 ‘기회주의의 선을 따른’ 분할은 낡은 것이며 유일하게 의미 있는 분할은 국제주의의 지지자와 민족적 자족의 지지자 간의 분할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국제주의의 지지자’라는 개념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일체의 내용과 의미를 결여한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구체적 설명을 하고자 한다면 곧 기회주의에 적대하는 내용들을 열거하게 될 것이다. 실천으로 들어가면 이것은 더욱 더 진실로 판명될 것이다. 국제주의의 지지자이면서 동시에 기회주의에 대한 가장 일관되고 단호한 적대자이지 않다면 이는 유령에 불과할 것이다. 아마 이런 유형의 어떤 개인들이 스스로를 ‘국제주의자’라고 정직하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이 스스로에 대해 어떠어떠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정치적 행동에 의해서 판단된다. 기회주의에 대한 일관되고 단호한 적대자가 아닌 ‘국제주의자들’의 정치적 행동은 언제나 민족주의적 조류를 방조할 것이다.”14)
볼셰비키가 볼 때 일국적으로든 국제적으로든 이런 진영에서 나오는 단결에 대한 호소는 기회주의자들의 정치와 철저히 단절하는 데 실패한 것을 은폐하는 가리개였다. 또한 전쟁과 노동운동 내 그 전쟁 공모자들에 반대하는 혁명적 캠페인을 수행하지 못한 것에 대한 정당화 논리에 불과했다.
“어떤 것도 주데쿰과 플레하노프 같은 자들의 대중 영향력을 회복시켜 줄 수 없다. 그들의 권위는 너무도 손상되어 어디서나 경찰이 그들을 보호해줘야 할 정도다. 그러나 이들 ‘중도주의자’들은 ‘단결’과 ‘조국 방위’를 선전하고 타협을 내오고 뿌리 깊은 차이를 가리고자 함으로써 노동운동에 최대의 타격을 입히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회배외주의자들의 도덕적 권위가 최종 붕괴하는 것을 막고 있고, 그 과정에서 대중들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이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쳐 주고 있고 기회주의 제2 인터내셔널의 시체를 다시 소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15)
<<나셰 슬로보>> 블록은 결국 쪼개졌다. 마르토프는 <<나셰 슬로보>>에서 이탈해 기회주의자 진영의 왼쪽 블록을 구성했다. <<나셰 슬로보>> 블록에서 가장 유의미한 부위가 볼셰비키 정치 쪽으로 획득되었는데 이는 레닌주의자들이 <<나셰 슬로보>>의 입장에 반대하는 가열찬 캠페인을 펼친 결과였다. <<나셰 슬로보>> 지지자들의 다수는 레닌이 지칭한 것처럼 ‘주관적으로는 혁명가들’이었다. 즉 패전주의와 내전 같은 올바른 전술을 회피하면서 동요하긴 했지만, 사회배외주의자들 같은 노골적인 기회주의와는 명확히 선을 그었다. 그들의 ‘단결 블록’은 깨졌고, 최종적으로 볼셰비키당의 패전주의와 내전 입장으로 결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전사회주의자들의 대동단결인가, 공산주의적 좌파의 단결인가?
우리가 본 것처럼 1914년 8월은 갑자기 제2 인터내셔널 내의 모든 것을 바꾼 예견치 못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 이전 시기 내내 논쟁하고 다투었던 조류들이 그 본질을 폭력적이고 급진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기회주의자들은 사회배외주의자들, 즉 자국 부르주아지의 공공연한 동맹자들로 드러났다. 이들의 배신에 대해 가장 비타협적으로 맞서 싸운 사람들은 1914년 이전에 분립을 경험한 러시아와 불가리아와 네덜란드 같은 당들에 속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카우츠키주의 중앙은 그 오른 쪽에 있는 기회주의자들과 뗄 수 없이 묶여 있었으면서도 입으로는 계속 ‘맑스주의’를 외치고 반전 평화주의 공문구를 남발했다. 한편 이 우파 중도주의자들과 볼셰비즘 사이에는 각종 경향의 개인들과 조류들이 늘어서 있었다.
러시아 운동 내에서 보면 마르토프의 경우 기질상으로는 좌파 중도주의자로서 전쟁을 열렬히 반대했지만, 전쟁에 은밀한 지지를 보낸 그의 멘셰비키 동맹자들과 끝까지 단절하지 못했다. 이 중간 지대의 맨 왼쪽에 트로츠키와 스파르타쿠스단이 있었다. 그들은 개인으로는 용기 있는 혁명가들이었지만 카우츠키주의 중앙을 겨냥해 철저히 타격을 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상황에서 이렇게 하기를 계속 거부했다. 카우츠키주의자들은 그들의 대중 영향력을 동원하고 좌익적 언사를 써가면서, 노동자들의 전쟁 반대를 사회주의혁명을 위한 준비 대신에 평화주의 쪽으로 돌려놓으려 애를 썼다는 점에서 가장 위험한 세력이었다. 트로츠키와 스파르타쿠스단은 대중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프로그램 정중앙에 명확히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치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평화를 위한 투쟁’을 가져다 놓았다. 그 때문에 그들은 패전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길 꺼려했다. 예를 들어 로자는 <<유니우스 팜플렛>>에서 “승리나 패전이나 결과는 모두 파멸적일 것”이라고 말한 뒤에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국제적인 혁명적 행동에 의한 전쟁 타도와 신속한 평화 강행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 나아가 그녀는 반전운동의 중심 전략목표로서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 슬로건 대신 “1848년의 애국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의 오랜, 진정으로 민족적인 강령이자 맑스, 엥겔스와 라살레의 강령인 통일 대독일 공화국 슬로건”을 제출하였다.
이 슬로건과 연관하여 각종 민주주의 요구들이 함께 제출되었다. 민주주의 민병대로 전인민의 무장과 상비군의 해산, 전쟁이냐 평화냐에 대한 결정을 전인민의 수중으로 이전, 의회 회기의 상설화, 모든 정치적·법적 제약과 불평등의 폐지 등이 그러한 민주주의 요구들이었다. 로자는 위험하게도 이러한 요구들의 획득이 ‘진정한 조국 방위’라고 주장했다. 레닌의 경우 결코 ‘최소강령’의 사용, 민주주의 요구들의 사용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전쟁에 반대하여 노동자계급을 투쟁으로 조직하는 데서 그 같은 요구들을 중심 목표로 삼는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거부하였다.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시대를 열어놓은 상황에서 거꾸로 로자가 1848년 부르주아혁명 시대로 역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시기에 트로츠키 또한 로자와 마찬가지로 문제의 핵심을 직시하길 회피했다. 그가 제기한 “즉각적인 전쟁 중지”, “배상 반대”, “모든 민족들의 자결권”, “왕정 없는, 상비군 없는, 봉건 지배 세습층 없는, 비밀외교 없는 유럽합중국” 등의 슬로건들은 모두 패전주의, 내전 전화,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같은 문제들을 비껴가고 있었다.
레닌은 트로츠키가 제기한 이 요구들도 마찬가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경계 내로 스스로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지를 타도하는 계급투쟁의 기초로서는 부적절하며, 위험하게도 중도주의 그룹들의 평화주의적 유토피아에 근접해가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일치된 전쟁 반대를 위한 최초의 국제적 공동행동으로서 1915년 9월 찌머발트 회의가 열렸을 때 레닌과 볼셰비키는 카우츠키주의 중앙만이 아니라 스파르타쿠스단 및 <<나셰 슬로보>>그룹과도 대립하게 되었다. 이 회의에서 레닌은 패전주의 입장을 제기했다.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을 억압자들에 대항하는 피억압 계급들의 내전으로, 자본가계급을 수탈하는 전쟁으로,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 장악과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전쟁으로 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노골적인 기회주의와 사회배외주의만이 아니라 중도주의와도 단절하고 그들과 분립을 이루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스파르타쿠스단과 <<나셰 슬로보>> 경향은 또 다시 이중적인 입장을 취했다. 사회배외주의자들에 대한 탄핵안과 전쟁공채에 대한 부결 요구안에 대해서는 볼셰비키 편에 섰지만, 레닌의 패전주의와 내전 전화 입장에 대해서는 거부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을 대표한 에른스트 마이어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가운데 레닌이 제안하는 바와 같은 행동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층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트로츠키는 찌머발트 좌파에 대한 지지 입장과 화해주의 입장(중도주의적 다수파와 좌파 사이를 중재하는 입장) 사이를 오가며 동요했다. 레닌은 전쟁 이전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이 시기에도 화해주의 입장을 취하는 좌파들에 대해 특히 격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찌머발트 대회 이후 레닌은 스파르타쿠스단이 동요하며 우선회 했다고 보아 이에 대해 날카롭게 공격했다. 트로츠키에 대해서는 더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트로츠키와 우리의 차이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그는 카우츠키주의자이다. 그는 인터내셔널에서는 카우츠키주의자들과의 단결을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치하이제의 의회 그룹과의 단결을 옹호한다. 우리는 이 같은 단결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레닌이 볼 때 트로츠키는 좌익 중도주의 블록의 맨 왼쪽에서 가장 정교한 맑스주의적 정식화를 공급하여 이 블록의 동요를 감추어주고 있는 자였다. 레닌의 이러한 공격은 장기적으로 볼 때 트로츠키에게는 쓰디쓴 보약이 아닐 수 없었다. 1916년 중반에 전쟁이 마지막 국면으로 치닫고 혁명적 상황이 발전함에 따라 각국의 프롤레타리아 전위 앞에는 낡은 당과 낡은 인터내셔널로부터 분립해 나와야 할 필요가 강력히 제기되었다. 이와 함께 개량 투쟁을 혁명의 전망에 종속시키는 혁명적 전술을 실행해야 하며, 이 과제를 위해 조직적으로 준비해야 할 필요가 또한 제기되었다.
마침내 혁명이 러시아에서 터져 귀환하고 나서 7개월 뒤인 1917년 9월에 레닌은 이 문제를 다시 다루게 된다. 당 강령 개정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문서인 <<우리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에는 레닌이 앞서 전쟁 기간 동안 수행했던 사회배외주의와 중도주의에 맞선 투쟁의 주요 교훈들을 총괄한 내용이 한 축으로 담겨 있다. 거기에는 노동자계급운동 내 세 가지 조류를 열거하고 있다. 첫째는 사회배외주의자들로서 그들은 계급의 적이며 노동계급운동 내 부르주아들이다. 타락한 노조관료와 노동귀족을 대변하고 있다. 둘째는 중도주의자들로서 그들은 역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독립적인 고정된 층이 아니며, 사회배외주의자들과 진정한 국제주의자들 사이에서 동요하는 과도적인 구성체이다. 셋째 조류인 진정한 국제주의자들은 사회배외주의자들 및 중도주의자들과 완전한 단절을 이루어낸 자들이다. 여기에는 최종적으로 찌머발트 좌파들과 스파르타쿠스단처럼 중도주의와의 투쟁에서 동요했던 경향들도 합류하게 되는데 이는 앞에서 본 것처럼 이들의 동요에 대한 레닌의 격렬한 공격과 투쟁이 있고 난 뒤였다. 혁명 이전 1914~16년의 시기에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흐름을 거스르는’ 이러한 투쟁이 없었다면 이 셋째 조류는 온전하게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며, 이후 이 조류가 주축이 되는 새로운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창건도 그렇게 빠르게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맺으며
좌익급진파와 볼셰비키는 1900~14년의 기간에 각각 제2 인터내셔널의 두 당인 독일 사회민주당과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내 좌파로서 기회주의와의 투쟁을 통해 발전하였다. 두 경우 모두 기회주의와의 투쟁은 이 시기 전술을 둘러싼 투쟁의 형태를 취했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단호한 전술 상의 투쟁은 세 가지 경향 ― 개량주의, 중도주의, 공산주의 ― 을 명료하게 드러냈다. 러시아에서 이 투쟁은 1912년에 볼셰비키와 청산주의자들과 화해주의자들이라는 3분립을 가져왔다. 이 분립은 혁명적 세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켜 1914년 사민주의의 파산에 대비할 수 있게 했다. 볼셰비키가 1915~19년 시기에 모든 건강한 혁명적 인자들을 규합하는 대안적 기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반면 독일에서는 이러한 분립을 이루어내지 못함으로써 좌익급진파를 약화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대안적 기치 역할을 하는 것도 차단되었다. 이러한 좌익급진파를 일관되게 혁명적인 전략·전술의 확고한 지반 위로 끌어올리는 데는 무엇보다도 볼셰비키의 단호한 비판과 압박이 필요했다.
만약 레닌이 대동단결론자들처럼 통일 단결된 당에 대한 물신숭배에 사로잡혀 전략·전술을 둘러싼 결정적인 전투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리고 사회배외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반전 사회주의자들의 단결이라는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그에 따라 중도주의에 대한 투쟁의 중요성을 경시했다면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전술 문제와 조직 문제에서 기회주의·중도주의에 대한 가차 없는 투쟁이라는 레닌의 방법은 우리에게 당 건설투쟁을 위한 지침을 제시해 준다. 그리고 이 전술·조직 문제에 관한 계속되는 오류는 강령적 타락과 별개일 수 없다는 것, 화석화된 프로그램이 아니라 실제 작동하는 프로그램으로 기회주의에 대한 단호한 반대자들을 규합하는 그러한 단결이야말로 진정 바람직한 단결이라는 것, 이 모든 것이 이 시기 레닌의 투쟁 속에서 우리가 건져 올려야 할 당 건설투쟁의 중요한 교훈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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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자 룩셈부르크 <<개량인가 혁명인가>>.
http://www.marxists.org/archive/luxemburg/1900/reform-revolution/index.htm
2) 칼 카우츠키 <초제국주의> <<새 시대>>.
http://www.marxists.org/archive/kautsky/1914/09/ultra-imp.htm
3) 안톤 파네쿡, <맑스주의 이론과 혁명적 전술>.
http://www.marxists.org/archive/pannekoe/1912/tactics.htm
4) 레닌 <유니우스 팜플렛 서평>.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6/jul/junius-pamphlet.htm
5) 로자와 독일 좌파는 1917년 4월에 사민당 관료층 내 내부 격돌을 거치고 나서 사민당에서 떨어져 나온 카우츠키주의자들과 함께 독립사민당(USPD)을 만들면서 비로소 사민당과 최종적으로 분립했다. 이 고전적인 중도주의 정당인 독립사민당 내에는 3개의 조류가 존재했다. 첫 번째는 카우츠키가 이끄는 우파인데, 이들은 분립에 반대했었고 사민당에서 나와서도 분립은 단지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보았다. 이들은 전쟁 기간 중에도 국제적 연결망을 재확립하려는 노력을 같이 하길 거부했었다. 당의 중간 지대에 레데부르와 호프만을 중심으로 한 그룹이 위치했고, 그 왼쪽에 3개의 좌파 그룹이 존재했다. 셋 가운데 가장 큰 그룹인 로자와 리프크네이트를 중심으로 한 좌파그룹과 보르차르트 중심의 좀 더 작은 좌파그룹, 그리고 가장 소수인 파네쿡과 라덱의 지지자들이다. 베를린에 본부를 둔 로자-리프크네히트 그룹은 이미 1916년 3월에 <<유니우스 팜플렛>>의 슬로건과 전술에 입각하여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결성한 바 있다.
6) 레닌, 위의 글.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6/jul/junius-pamphlet.htm
7) 레닌, 같은 글.
8) 레닌, 같은 글.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6/jul/junius-pamphlet.htm
9) 이에 대한 역편향이 스탈린주의자들의 일국주의 혁명 단계론이다. 그들은 이 시기에는 물론이고 오늘날에조차도 민주주의적 요구투쟁에 대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투쟁으로 위치지음으로써 그 투쟁을 사실상 사회주의 투쟁과 분리시킨다.
10) 레닌, <맑스주의의 희화화와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6/carimarx/index.htm
11) N.Bukharin, On the theory of the Imperialist State 1916. R.V.Daniels: A Documentary History of Communist Vol 1 p.83.
12) 같은 책 p.86.
13) 레닌, <<국가와 혁명>>, <<전집>> 25권 283쪽에서 인용.
14) 레닌 <국제주의자들의 단결 문제>.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5/may/01b.htm
15) 같은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