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
나는 왜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
[편집자] 사노련 사건으로 사회주의 대중화 문제가 떠오르고 있습니다. <가자! 노동해방>은 현장의 사회주의자 동지들이 어떻게 사회주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동료 현장노동자들에게 편하게 전하는 글을 싣고자 합니다. 현장노동자들에게 노동자로 살아가는 것과 사회주의자 되는 것이 그렇게 큰 거리가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글이 될 것입니다. 발전노조 조합원 박주석 동지가 첫 번째 글을 보내왔습니다. 이후 계속 릴레이 기고 형식으로 글을 싣고자 합니다. 많은 현장 동지들의 기고를 기다립니다.
한 노동자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그만 구속이 되었다. 이 노동자를 면회 온 아버지는 이렇게 물었다. “야, 이 눔아. 니가 어떻게 하다 이 지경이 되었느냐?” 그러자 구속된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린 저에게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도와주라고 가르쳤습니다. 더러는 도시락을 두 개 싸주시면서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노동조합 활동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지금 와서 저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눈물을 감추시며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내, 어찌 너를 원망하겠느냐? 다만, 지금의 네 처지가 안타까워 그렇다”
아버지는 나에게 사상교육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만 가르쳤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나를 반공산주의자로 키웠다. 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나는 공산주의가 싫어요!”라며 죽어간 이승복을 나의 우상으로 여기며 자랐다.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니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런 내가 나이 오십을 넘긴 지금 사상고백을 하고 있다.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일이란 쉽지 않다. 그것도 해고노동자로 살아가는 일은 더욱 힘겹다. 매년 12월 8일이면 나는 만취한다. 그리곤 “해고살이 몇 해든가, 손꼽아 헤어보니, 공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이런 노래를 소리 없이 부르며 귀가를 한다. 작년에 부른 노래를 올 해도 어김없이 불러야 한다.
한 인간의 사상이 변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있기 마련이다. 그 많은 계기들 중 결정적 순간이 있다. 나는 85년에 울산에서 울릉도로 강제 발령을 받았다. 울릉도에서 다시 강제발령을 받아 4년 만에 울산으로 돌아왔다. 90년도 초반의 울산은 노동자의 함성으로 들썩거리고 있었다. 뭔 마음이 생겨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노동자 데모대를 따라 움직였다. 어느 날, 새벽까지 울산시청 앞에서 가투를 벌이고 삼삼오로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20대 초반의 한 여성 노동자 차례가 되었다. 이 여성 노동자는 “우리 아빠는요, 새벽 5시에 일하러 나가서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직도 우리는 단칸방을 면하지 못해요. 동생이 고3인데, 집을 나갔어요.”하며 울었다. 그래서 자기는 데모를 한다고 했다. 이 동지는 동사무소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데모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그 날 이후 나의 삶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곤 노동조합 활동에 깊숙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전의 노조는 한전노조가 아니라 산별형태인 전력노조다. 그리고 대한민국 노동조합 설립 제1호다. 당시 전평을 깨기 위해 만든 대한노총의 선봉인 셈이다.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어용의 세월도 길다. 위원장은 주로 세습제이고, 선출방식은 2중, 3중 간선제였다. 80년 초에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서 한전의 퇴직금 누진율을 강제로 삭감해 버렸다. 다른 노조 위원장은 도망을 가거나, 아니면 억지로 붙들려가서 강제로 서명을 했다. 전력노조의 경우 대의원대회에서 250 명 가까이 되는 대의원 중 단 9명이 반대를 하고, 나머지는 조합원들의 퇴직금을 삭감하는 데 동의했다. 지독한 어용노조였다.
1993년 당시에 울산화력지부장은 지부장 직을 혼자서 22년간 해 오고 있었다. 기존 지부장에 대항에 입후보 하면, 선거 바로 전날 후보를 발령 내 버리는 방식으로 어용노조를 유지하였다. 93년도에 젊은 몇몇이서 노동조합 민주화의 소망을 가지고 지부대의원에 출마를 했다. 대의원 선거 결과, 우리가 21명, 전 지부장이 19명을 확보했다. 그러자 전 지부장은 대의원대회 소집 공고를 내지 않고 잠적해 버렸다. 본부노조에서는 울산화력지부를 사고지부로 만들어 버렸다. 전력노조는 울산화력지부를 떠나 본부까지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전력노조 위원장이 자신의 정년 연장을 보장받고, 그 대가로 임금협상을 직권조인으로 마무리해 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울산화력지부의 나를 포함한 젊은 대의원이 정년연장과 직권조인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만들어 전 지부에 팩스를 날렸다. 우리는 33일간 밤샘농성을 했고, 어용노조 역사상 전대미문의 지부 중식집회도 했다. 이 일 이후로 사측의 탄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힘들게 투쟁하던 중, 94년 11월 5일 조합원 50여 명과 함께 본부노조 항의방문을 갔고, 그 이유로 나는 해고되었다. 그 과정이 이 글처럼 간단치는 않다.
해고된 이후, 전력노조를 민주화시키기 위해 현장의 활동가들과 의기투합하여 현장조직(전력노조 민주화추진위원회)을 만들었다. 당시 3만 명이 넘는 조합원들 중에 기껏해야 10명도 안 되는 활동가들로 전력노조를 민주화시킨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1996년 김시자 열사가 전력노조 위원장의 전횡에 맞서 분신을 했다. 현장조직은 분신대책위에 결합을 했다. 분신대책위는 ‘한국전력노조 민주화 추진위원회’로 전환했다. 이 한전노민추는 이후 발전노조를 태동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해고되고 2001년 발전노조가 만들어지기까지 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현장에는 분신이 있었고, 징계가 있었고, 부당전출이 있었다. 2002년 신생노조인 발전노조는 발전소 매각에 맞서 38일간 파업투쟁을 벌였다. 기나긴 어용의 세월 속에서 우리가 침묵하고 있었을 때, 우리는 어떠한 탄압도 받지 않았다.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자마자 사측과 어용은 한편이 되어 우리를 탄압했다. 우리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탄압의 강도는 더 높아졌다. 우리는 투쟁을 통해서 자본주의와 자본의 인격체인 자본가들의 본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인간을 이윤의 도구로 삼는.
발전노조가 건설되고 다시 7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여전히 해고노동자로 남아 있다. 오는 12월 8일이면 해고살이 만 15년이 된다. 그 동안 많은 투쟁을 겪었지만, 이긴 경우보다 질 때가 더 많았다. 매번 깨지면서도 투쟁하는 이유는, 내가 투쟁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자본의 착취와 억압을 용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이 즐겨 부르는 노랫말 가운데 “아흔 아홉 번 패배할 지라도, 단 한 번의 승리, 마침내 노동해방” 이라는 구절이 있다. 아흔 아홉 번의 패배 끝에 마침내 승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흔 아홉 번의 패배 속에서 아흔 아홉 번의 교훈을 얻어낼 때만이 가능하다. 또한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노동자들의 승리는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동자는 노동해방을 향해 나아간다.
며칠 전 라디오를 통해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어린 아이를 둔 엄마가 자살을 했는데 유서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고 한다. “엄마가 먼저 가서 미안하다. 아이가 신발이 작아 발이 아프다는 데도 신발을 사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이다. 아이에게는 신발이 작아서 받는 고통보다 엄마를 잃은 고통이 더 클 텐데도 엄마는 먼저 가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어찌 보면, 자본주의는 이 사회에서 더 이상 맞지 않은 신발과 같다. 걸으면 걸을 수록 고통만 더해질 뿐, 이 사회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다수의 인간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
사회주의의 최고 원칙은 인간이 사물보다, 삶이 소유보다 우위에 존재함으로써 노동이 자본보다 우위에 서는 것이다. 즉 힘이 소유로부터가 아니라 창조로부터 나오며 인간이 환경에 의해 지배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환경이 인간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목적이어야 하며 결코 다른 사람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원칙 하에서는 아무도 자본을 소유한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복종할 필요가 없다.
태초에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노예가 되었다. 인간은 필요에 따라 돈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간은 돈의 노예가 되었다. 신을 부리는 자와 돈을 부리는 자는 권력을 움켜지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만들었다. 이제 곧, 노동자는 자본주의로부터, 자본가들의 독재 권력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사회주의자가 된 이유이다. 그 동안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혹독하게도 부렸으니, 이제 노동자가 자본가들을 부린다고 해서 잘못 될 일이 있겠는가!
박주석 발전노조 조합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