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생존을 위한 방향
신자유주의도, 케인즈주의도 아닌 사회주의
요즘 신문과 방송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야기는 단연 경제위기에 관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위기는 기회다’라는 하나마나한 말로 면피하려 애쓰고 있다. 많은 이들이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대책을 내놔야 할 것 아닌가, 대책을!”이라며 정부의 무능력을 질타한다. 그렇다, 지금 사람들은 대책을 원한다. 도대체 대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대중의 머리를 두드리고 있다. 서점가에서는 엉망진창임이 판명된 시장경제의 대안을 찾는 책들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다.
케인즈의 부활
이런 상황에서 뜬금없이 ‘케인즈의 부활’이 시도되고 있다. 최근 한 달 사이에 언론에서 뽑은 케인즈 관련 기사 제목들을 보자. “금융위기 불 끌 소방수는 케인즈일까?”(한겨레) “케인즈의 부활 … 새 뉴딜정책 교과서로 떠올라”(한겨레), “케인즈 뜨고 프리드먼 진다”(매일경제), “케인즈의 귀환 … 그 끝은 어디인가”(연합뉴스) 등등. 그리고 도처에서 과연 케인즈주의가 오늘날 경제위기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를 다루는 토론회와 강연회가 열리고 있다.
대체로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정책을 의미해왔던 케인즈주의는 소위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던 지난 시기에 거의 무시되었다. 그런데 그토록 위세를 떨치던 신자유주의가 사실 세계적인 장기불황을 타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시킬 뿐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케인즈의 부활을 운운할 만큼 국제적으로 상황이 달라졌다.
오바마 당선의 의미
뿌리 깊은 인종차별로 얼룩진 미국 역사 속에서, 흑인 출신 정치인의 대통령 당선은 상당히 큰 변화를 뜻한다. 이런 변화는 미국 역시 예외일 수 없는, 아니 오히려 그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지금의 경제위기와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경제위기를 해결할만한 적임자로 미국인들은 오바마를 선택한 것이다.
미국 내 여론조사 동향을 보면, 흑인들은 큰 변동 없이 오바마를 지지했지만, 백인들은 경제위기를 체감하는 시기를 거치며 많은 수가 오바마 지지자로 돌아선 것으로 나타난다. 9월 중순 이전까지 백인들의 오바마 지지도는 30% 중반 정도에 머물렀다. 하지만 9월 중순 이후에는 이들의 지지도가 42~44% 수준으로까지 올라갔다.
미국의 평범한 서민들이 오바마를 지지한 이유는 간단하다. 오바마 경제정책의 중심에는 (그것이 실현될지는 불투명하지만) 거의 모든 노동자의 세금을 깎아주는 반면,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겠다는 계획이 놓여 있다. 기업가들의 세금을 줄여 부자들 뒷바라지 해주는 지금까지의 정책과는 꽤 거리가 멀다. 게다가 (역시 실현될지는 불투명하지만) 일자리 창출을 위해 당장 1,700억 달러 규모의 경기부양책을 제시하고 있다.
사실 오바마는 당선되기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정부 재정지출 확대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그런 식의 태도로는 결코 다수 노동자들의 불안감을 진정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태도를 바꾼 것이다. 이는 곧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놓자는 기조 대신 정부가 경제위기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 개입이 늘어나다
실제로는 오바마 이전에 부시조차도 시장에 대한 전면적인 국가 개입을 강화하고 있었다. 페니메와 프레디맥 등 파산한 금융기관을 공적 자금을 투입해 국유화한 것이 대표적인 방식이다. 시장논리를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언론인이나 정책 전문가들은 “언제부터 미국이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는가?”라고 물으며 부시 정부의 시장 개입을 비판했다.
이런 흐름은 미국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영국 정부는 지난 10월 공적자금을 투입해 8개 주요 은행의 부분적 국유화를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 로이즈TSB, HBOS 등 세 개의 은행은 이미 국유화됐다. 최근 큰 금융위기를 겪은 아이슬란드는 가장 규모가 큰 카우프싱, 란즈방키, 글리트니르 등 세 개의 은행을 국유화했다. 이러한 흐름에 자극을 받은 유럽연합 15개 나라에서도 영국식 국유화 모델을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또한 영국 정부는 일자리를 늘리고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해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이를테면 2020년까지 1,000억 달러를 투입해서 7,000개의 대형 풍력발전기를 세우는 사업을 통해 16만개의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 되면, ‘케인즈의 부활’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자본가들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이처럼 여러 나라에서 그간의 유행과는 대비되는 국유화 바람이 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는 자본가들조차도 현재의 경제위기를 해결하려면 경제에 대한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통제와 계획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국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미국의 3대 자동차업체 중 하나인 GM이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자, LIG투자증권에서는 지금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국유화 밖에 답이 없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LIG투자증권의 리서치센터장은 “자동차 산업은 고용측면에서 보면 금융기관보다 더 중요한 국가기간산업”이라며 “따라서 위기 상황에서 자동차산업의 국유화는 정당성을 지닐 수 있다”고 말했다(11월 12일자 <이투데이>).
실제로 프랑스 정부는 1945년 르노자동차를 국유화했다. 영국 정부는 1975년에 로버그룹을 국유화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에서는 전체 산업의 20%가 국유화되기도 했다. 경제적 혼란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국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하는 방식은 흔하게 있어왔다.
그러면 이는 지금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는 케인즈주의 정책이 경제위기 해결의 방법으로서 적합하다는 것을 뜻하는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케인즈주의 정책이 실제로 현실화된 시기는 2차 세계대전 후 20여년의 호황기를 거치면서다. 호황기에는 정부도 수입이 늘어나 어느 정도 탄탄한 재정기반을 가질 수 있다. 그랬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케인즈가 원했던 ‘투자의 사회화’를 정부 재정 투입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꽤 다르다. 이미 자본가들 내에서도 미국 오바마가 취하고 있는 케인즈주의적 전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핵심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것이다. 부시는 오바마에게 약 565조원이라는 막대한 재정적자를 떠넘겨주었다. 미국 정부재정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다. 이런 상태에서 계속 정부지출을 늘릴 경우 국가 차원의 파산 이외에 다른 결론은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위한 국가 개입
근본적인 문제점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든 영국의 브라운 수상이든 그들이 국유화를 추진하는 것은 오직 자본주의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애초에 케인즈주의가 등장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국유화를 통해서 정부가 돈을 쏟아 붓고 자본가들의 이윤율을 회복시켜주는 데 성공한다면, 그 다음은 무엇인가?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일단 국유화를 통해 경영을 정상화시킨 다음 다시 자본가들에게 매각하는 것이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루어지는 국유화의 실제 결과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케인즈주의 정책을 통해 고용안정을 얻더라도, 그 안정은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노동자의 운명은 여전히 자본가들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다.
노동자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국유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이 위기는 케인즈주의냐 신자유주의냐 같은 특정한 정책적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직 이윤을 위해서 자원을 낭비하고 노동자를 잘라내는 탐욕스런 자본가체제가 불가피하게 만들어내는 비극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본가들의 이윤체제 자체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
재벌 대기업, 국가기간산업 국유화를 그 첫 번째 고리로 움켜쥘 수 있다. 하지만 그 국유화가 진정으로 자본가가 아니라 노동자들을 위한 것이 되려면, “누가 경제를 통제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비껴가서는 안 된다. 지금 통제권은 자본가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경제를 조율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사실만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이윤의 노예이기 때문이다.
이윤의 노예가 아닌 사람들, 즉 노동자들이 산업과 현장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산업과 현장에 대한 노동자통제를 통해 영업비밀을 철폐하면, ‘경영위기’를 들먹이며 실제로는 폭리를 취해왔던 자본가들의 장부를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실질적인 생활임금 쟁취 및 최저임금 대폭 인상, 필수적인 인력충원과 일자리 늘리기, 상품가격 인하를 전면적으로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케인즈주의에 의하면, 이런 요구는 ‘비현실적’이다. 그들은 “이건 사회주의를 하자는 얘기다!”라며 발끈할 것이다. 자본가들의 목을 조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가장 현실적인 요구다. 노동자의 목을 졸라 자신의 생존을 영위하려는 자본가체제에 맞서 우리가 살아가려면 저들의 목을 조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야말로 노동자의 생존을 위해 사회적 정당방위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할 때다.
오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