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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를 위하여≫
황광우, 장석준의 새롭게 읽는 ≪공산당선언≫
얼마 전, 아주 우연하게 황광우, 장석준의 책 ≪레즈를 위하여≫를 읽게 되었다. ‘새롭게 읽는 ≪공산당선언≫’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이다. 15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맑스, 엥겔스의 ≪공산당선언≫이야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책인데, 그것을 ‘새롭게 읽는’다고 하니 어떤 점에서 새롭게 읽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게다가 맑스주의로부터 이탈하여 개량주의적인 행보를 걷고 있는 그들이 말하는 ‘새로움’이란 수정주의의 다른 표현일 뿐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들었다. 독자들에 따라 느낌은 다르겠지만, 실제 책을 읽은 뒤 내 느낌으로는 ≪공산당선언≫을 ‘새롭게 읽는’다는 인상을 받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 책을 다 읽은 뒤에 나는, 비록 수정주의적 색깔이 완전히 감춰진 것은 아니지만 이 책이 참고용으로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레즈를 위하여≫
첫째 이유. 오늘날의 상황을 보면, ≪공산당선언≫처럼 선진노동자들이 미래를 개척해나가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들에 대한 해설서가 너무나 부족하다. 1847년에 나온 ≪공산당선언≫은 아주 얇은 책이다. 하지만 무척 오래된 글이기 때문에 오늘의 노동자들이 읽고 그 뜻을 바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공산당선언≫에 대한 태도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어떤 노동자는 이 선언을 읽음으로써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명쾌하게 깨닫기도 하지만, 어떤 노동자는 혼자 그 책을 읽다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집어던지기도 하는 것이다. 글 자체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토론보다는, 근거 없는 억측과 예단 속에서 “그 책은 이러저러하다”는 소문만이 무성하게 되었다. 때문에, 투쟁 속에서 대안을 갈구하는 노동자들이 이 위대한 고전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중간 다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점에서, ≪공산당선언≫을 여러 사람들이 읽기 쉽도록 설명하는 일종의 안내서가 있다는 것은 어쨌든 환영할 일이다.
둘째 이유. ‘새롭게 읽는’다는 부제와는 달리 그다지 새롭지 않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간 ≪공산당선언≫을 ‘새롭게 읽는’ 시도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서 새로움이란 대부분 좋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본주의 사상 중 몇 조각을 끌어와 맑스, 엥겔스의 사상과 접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곤 했다. 이 시도는 역사적으로 수정주의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를테면 독일의 베른슈타인은 자본가들의 세계관에 기댄 채 계급과 계급투쟁에 관한 노동자의 관점을 노동운동 내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결국 ≪공산당선언≫을 새롭게 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너덜너덜한 누더기로 만들고, 폐기하는 것이 그 결과였다. 반면 ≪레즈를 위하여≫의 저자는 다행히도 무리해서 ‘새롭게’ 읽기보다는, 단순히 평이하게 해설하는 쪽을 선택했다. 이것은 저자들의 수정주의적, 개량주의적 한계가 책을 그르치지 않도록 만든 중요한 이유다.
셋째 이유. 이 책 ≪레즈를 위하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제1부 학습마당, 제2부 다시 번역한 공산당선언, 제3부 논쟁 안내. 중심이 되는 부분은 제1부인데, 이 부분만 읽더라도 책의 의의는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저자는 구체적인 실제 사례들이나 오늘의 중요한 쟁점들과 연관지어 ≪공산당선언≫의 주요 명제들을 풀이하는 방식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공산당선언≫의 문구들은 현실감을 갖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읽기에 어렵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교육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아마도 이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될 것이다.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넷째 이유. 이 책의 저자는 본문의 한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하여 나는 우리의 형제들에게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어떻게 하면 권력을 장악할 것인지, 그리하여 우리는 이 더러운 남한 땅을 어떻게 평등한 세상으로 일구어나갈 것인지 고민하자고 당부드린다.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고민하자. 현장에서 힘들게 일하시는 노동형제들, 그동안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어용노동조합을 민주화하고, 노동조합 지도부를 장악하는 일에 쏟았던 땀과 열정의 10분의 1만이라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일에 투여해 주길 당부드린다.”
저자의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는 물론 할 이야기가 많다. 그것은 개량적이고 의회주의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로부터 끌어내야 할 교훈은 있다. 근본 해방을 향한 정치적 실천의 필요성이다. 단지 저자의 개량적 의회주의적 한계 때문에 ‘정치적 실천의 필요성’ 자체를 거부한다면 그는 왕창 어긋난 셈이다. 또한 스스로는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노동해방을 향한 정치적 실천을 모색하고 나서지 않으면서도 ‘저자는 개량주의자야, 그에게서 자극받을 것은 없어!’라고 자기합리화한다면, 그는 사실상 스스로 개량주의자보다 더 뒤떨어진 후진적 인물임을 입증하는 것이리라. 따라서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고민하자”는 외침에는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단, 그것은 저자처럼 개량주의적 공감이 아니라 노동해방을 지향하는 변혁적 공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분석은 타당하지만, 이 분석으로부터 끌어내는 정치적 결론이 잘못되었을 뿐인 것이다.
저자는 나름대로의 관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무엇을 향해 노를 저어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노동자가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무관심’을 특징으로 하는 한국노동운동의 치명적 약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것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그동안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어용노조를 민주화하고, 지도부를 장악하기 위해 선진노동자들은 많은 피와 땀을 흘려야 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며, 지도부를 장악하는 투쟁의 완전한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오직 노동조합 차원에만 제한된 운동이 노동자들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개선해주지는 못했다는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 진실을 외면하는 운동은 항상 정치적으로 자본가 정당들의 꼬리가 되지 않을 수 없거나,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개량적 전망을 절대 뛰어넘을 수 없다. 정치에 무관심한 운동은 결국 이 사회를 움직이는 근본 방향타를 자본가들에게 맡겨둔 채, 그 속에서 억압의 쇠사슬을 약간 늦추는 것 이상의 결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노동운동은 이제까지 억압의 쇠사슬을 약간 늦추는 투쟁에 너무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려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 땀과 열정의 10분의 1만이라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일에 투여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종종 ‘현안’에 파묻힌 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세계를 망각하게 된다. 세상을 바꾸지 않고서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개선할 수 없음에도, 그래서 “세상을 바꾸자!”는 구호를 일찌감치 치켜 올렸음에도, 우리 노동자들은 종종 그것을 잊어버린다. 노동해방을 향한 진취적인 정신과 기개를 대신하여, 임금과 고용보장, 정규직화라는 제한된 목표가 최고의 이상으로 자리 잡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태도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노동자들을 영구적인 임금노예로 머물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그런 개량적 전망으로는 임금과 고용안정, 정규직화마저 쟁취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부분적 요구들을 가로막고 있는 실체가 다름 아닌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공산당선언≫이 외치고 있듯이 노동자들에게는 ‘쟁취해야 할 세계’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정말이지 우리는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무엇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가? 누가 이 세상을 좌지우지하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의 삶을 망쳐놓고 있는가? 단지 생존권을 지킬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지금부터 어떤 투쟁의 수단을 준비해야만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투쟁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이 던져져야 한다. 오늘날 한국노동운동에서는 이러한 질문이 너무나, 너무나 부족하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정치적 자극제 역할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량적이고 의회주의적인 전망에 갇힌 그런 저자들도 ‘정치’와 ‘근본적 변혁’에 대해 고민하고 호소하고 있는데, 만일 선진적 투사들이 노동해방의 전망 아래 정치적으로 전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객관적으로 개량주의자보다 더 뒤떨어지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상황이 계속 이렇게 유지된다면, 해방을 갈망하고 정치적으로 눈을 뜨는 노동자들은 전투적 선진노동자들이 아니라 개량주의자들의 정당을 지지하게 될 것이며, 소중한 열망을 그들에게 의탁하게 될 것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진지한 개량주의자들이 선진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자극과 경고의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진지한 개량주의자들에게서 배우라!”
주의할 점
위에서 살펴본 몇 가지 이유에서 ≪레즈를 위하여≫는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를 얻게 된다. 그러나 독자들이 이 점들에 대해 긴장감을 잃지 않아야 한다.
첫째.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하루에 단 10분만이라도 고민하고 역량을 투여해야 할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일’은 주로 선거주의와 의회주의의 관점에서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생산현장에서부터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한 노동자들이 직접 나라를 운영하는 주인공으로 정치적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기보다는, 노동자들의 표에 의해 ‘집권’한 이른바 ‘진보정당’이 노동자들을 위해서 어떤 정책을 내놓을 것인가 하는 점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물론 우리는 노동자들이 선거에 참여하거나 의회에 진출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선거와 의회 또한 노동자투쟁의 유용한 수단이자 투쟁의 무대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선거와 의회가 투쟁전망의 ‘전부’가 되거나 최종적 전망이 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우리는,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칠레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둘째. 이 책의 저자는 한국노동운동에서 어느 사이엔가 노동해방의 구호가 사라진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구호 자체가 아니라, 그 구호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이다. 아무리 노동해방의 구호를 외쳐도, 그 본질인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정신이 분명하지 않다면 그것은 껍데기 구호로 전락할 것이다. 그런데 저자들이 주장하는 선거주의, 의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정신과 절대 부합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저자가 소련의 ‘붕괴’를 바라보는 관점 또한 우리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소련 붕괴를 지켜보면서 저자는 오랜 방황을 해야만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 고백은 정직한 것이지만, 그것으로부터 끌어낸 결론은 하나의 혼란 덩어리 이상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스탈린 지배 이후 소련은 자본주의의 변종에 불과했고,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사회이기는커녕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방황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사상 자체에 충실해서 현실을 직시하고 실천의 침로를 세워내지 못한 그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직결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는 것이지 수정주의적 지그재그 행보를 하고 사회주의에 대해 회의를 늘어놓던 그의 얼마 전까지의 행위들이 합리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저자들은 관념으로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사상”이 ≪공산당선언≫의 핵심이라고 말하지만, 이를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하는 데서는 그 사상으로부터 멀리 도망치고 있다.
셋째. 원래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곳곳에서 ‘좋았던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묻어나고 있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살 때에는 서로 간에 인정도 많고 좋았는데, 자본주의가 그 좋은 시절을 끝장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미래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때가 좋았지’라는 심성을 가질 이유는 조금도 없다. 설사 저자가 단지 설명의 편의를 위해 이런 정서를 드러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정서까지 공유할 일은 아니다. 그것은 ≪공산당선언≫의 입장과는 정반대의 것으로, ≪공산당선언≫이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 ‘반동적 사회주의’ 혹은 ‘소부르주아적 사회주의’의 심성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 밖에 이 책의 여러 가지 결함을 지적할 수도 있지만, 한없이 열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여러 치명적인 결함이 있기는 하지만, ≪공산당선언≫에 보다 용이하게 접근하기 위한 안내서 정도로 한번쯤은 읽어볼만 하다. 단, 도처에 설치된 개량적이고 의회주의적이며 황당한 주장들에 날카롭게 주의하면서 말이다. 오히려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이 책은 ≪공산당선언≫에 대한 개량주의적이고 수정주의적인 해석 중에서 가장 세련된 표현으로서 ‘최근의 수정주의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최근의 수정주의가 어떻게 변신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은가? 그러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단, 제3부 ‘논쟁 안내’는 읽지 않아도 된다.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지식인의 관념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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