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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와 가족주의라는 괴물
≪전함 포템킨≫과 ≪10월 혁명≫, ≪파업≫ 등 위대한 작품들을 만든 러시아의 에이젠스타인 감독은 “영화는 인민의 사상을 경작하는 트랙터다.”는 말로 영화의 중요성을 잘 설명했다. 영화의 위력이 얼마나 큰지를 최근 가장 잘 보여주는 나라는 아마도 한국일 것이다.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두 달 남짓 만에 1,000만 관객을 사로잡았는데, 이것은 세계적인 기록이다. 그러나 ‘인민의 사상을 경작하는 트랙터’는 인민의 밭에 반동과 보수, 기만의 사상을 뿌릴 수도 있고, 해방과 전진, 진실의 사상을 뿌릴 수도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정확히 전자의 경우다.
이 영화는 왜 성공할 수 있었나
먼저, 이 영화는 전투장면을 리얼하게 그려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맞먹는 수준으로 전투 장면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이것은 그만큼 한국영화의 제작기법이 세계적 수준으로 발달했다는 것을 뜻한다.
다음으로, 이 영화에는 나름대로 탄탄한 스토리가 있다. 아무리 제작비가 많이 든 블록버스터 영화일지라도 탄탄한 스토리(서사)가 없는, 단순한 보여주기 식의 영화는 모두 비참하게 망했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같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의 참패는 그 단적인 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에게서 이성을 말살하고 말초적 감각만을 자극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사회는 3S(스포츠, 스크린, 섹스)를 통해 인간을 끊임없이 ‘사고 기능’을 마비당한 감각적 동물로 전락시켜왔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노동과 혁명이라는 오랜 발전 역사를 통해 내면화해온 가치관과 정서, 그리고 사고 능력을 갖고 있다. 특히 짧은 100년 동안 일제 식민지, 8․15 해방, 한국전쟁, 군사쿠데타, 급속한 산업화, 4․19 혁명과 5․18 광주항쟁 그리고 87년 노동자대투쟁, IMF 위기 등 격동의 시기를 거쳐 온 한국인들은 내용이 없는 감각적인 영화보다는 역사적 스토리가 있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실미도≫와 마찬가지로 ≪태극기 휘날리며≫도 비록 깊은 역사의식은 없지만, 단순한 오락물이나 액션물과 달리 한국역사를 다루며 이야기를 엮어내고 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한국 대중의 의식과 감성의 흐름을 포착해서 반영했다. 비록 상업적 이익을 목표로 그것을 읽어내고 있지만 말이다. 만약 이 영화가 ≪배달의 기수≫와 같은 단순 반공 전쟁영화였다면 절대 이만큼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며, 오히려 차갑게 외면당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전쟁의 참상을 생생하게 그리고, 전쟁 속에서 일그러져 가는 인간의 모습을 이진태(장동건)를 통해 그려내어 전쟁에 반감을 가진 대중의 정서를 이용했다. 미국의 대이라크, 대아프가니스탄 전쟁, 한반도 북핵위기로 한국 대중은 전쟁문제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는데, 이 영화는 이런 대중의 정서를 정확히 읽어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영화는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민족주의적 제목을 통해 월드컵 광기로 달구어진 대중의 애국주의 정서를 흡수하려 했다. 그리고 뜨거운 형제애와 같은 가족사랑을 핵심 주제로 설정함으로써 한국 대중의 가족주의 정서를 영화 속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처럼 대중의 의식과 감성의 흐름에 영합했다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적인 성공비결이지만, 이것이 또한 이 영화의 결정적 한계이기도 하다. 이 한계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깊이 있게 다룰 것이다.
마지막으로, 엄청난 제작비와 배급망을 들 수 있다. 이 영화는 떼돈을 벌겠다는 철저한 상업적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순수제작비만 147억에 마케팅 비용까지 합치면 180억원이 들어갔다. 또한 한꺼번에 450여 개 스크린(전체 스크린의 약 35%)에서 상영함으로써 최다 개봉관을 장악하기까지 했다. 이 영화가 대성공을 거둔 데에는 이런 ‘흥행몰이’가 톡톡히 한몫을 했다. ≪파업전야≫와 같은 노동자영화는 둘째치고라도, 장기수를 다룬 ≪송환≫과 같은 독립영화도 제작비는 몇 억을 넘지 않으며 신문, 잡지 광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스크린 확보도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실정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본가들이 영화산업과 배급망을 장악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상업영화와 노동자영화 또는 독립영화의 생산, 보급상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를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위험천만한 가족주의 이데올로기
‘영화관객 1,000만 명 시대’가 왔지만 영화평론은 아직 천박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에 대한 대부분의 평론은 성공을 단순히 예찬하고, 성공요인을 현상적으로 분석하는 부르주아적 평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몇몇 평론에서 날카로운 비판정신을 엿볼 수는 있지만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일관되게 비판하는 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볼 수 없다. 상업영화가 막강한 파워로 ‘인민의 사상’을 잘못 경작하고 있는 상황에 비추어본다면 그에 맞선 이데올로기 투쟁은 형편없이 빈곤한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가족을 위해 자기 한목숨을 기꺼이 바치는 ‘헌신적인 가족사랑’이 왜 문제란 말인가? 돈을 위해서라면 아내든, 남편이든, 아버지든, 자식이든 관계없이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흉측한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 사회에서 ‘헌신적인 가족사랑’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태극기 휘날리며≫를 본 대다수 관객들은 모두 이런 생각 때문에 영화를 보고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렸을 것이다.
특히 이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적 안전망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 상태에서 실업과 비정규직화 등을 통해 생활의 불안정성이 가중되는 상황, 그리고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경쟁시키는 상황, 마지막으로 이런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전망을 노동운동이 미미하게만 제공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중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족뿐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발전시키고 있다. 영화는 바로 이런 정서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개인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에 비교한다면, 가족의 이익을 더 중시하는 가족주의가 더 나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가족주의의 의미는 사회역사적 맥락 속에서 고찰해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계급사회에서 가족주의란 두 가지 의미를 지녀왔다. 첫 번째는 가족의 이름으로 가족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권리와 자주성을 억누르는 것이었다. 가장(성인 남성)을 중심으로 짜인 권위주의적 가부장제 아래에서 아내와 자식들은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순종적인 존재로 머물러 있었다. 아이들은 자기의 삶을 스스로 자주적으로 결정하지 못한 채 집안 어른들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이런 가족주의는 국가와 회사로 확장된다. 북한의 ‘어버이 수령’이라는 말에서 적나라하게 알 수 있듯이, 지배자들은 국가를 가족의 확대판으로 간주하고 인민에게 지배자들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강요했다. 자본가들은 ‘회사는 한 가족’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을 믿고 묵묵히 일하라고 요구했다. 북한 인민이 김정일을 ‘어버이’로 모시고, 현장노동자들이 사장을 ‘아버지, 큰형’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에는 가족주의가 노동자와 인민 속에 깊이 내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가족주의 이데올로기가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현장과 국가에 깊이 배여 있다.
두 번째는 가족 이기주의다. ‘헌신적인 가족사랑’은 그 자체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사랑처럼 숭고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하지만 ‘헌신적인 가족사랑’이란 이름으로 다른 가족, 다른 인류를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하거나 연대하는 삶을 망각하고 오직 자기 가족의 안위에만 집착하는 가족 이기주의는 소름끼칠 만큼 위험스러운 것이 된다. 이런 가족주의를 통해 지배계급은 민중을 가족단위로 갈기갈기 찢고 원자화시킴으로써 효율적으로 지배한다. 그런데 ≪태극기를 휘날리며≫에서 묘사되는 ‘헌신적인 가족사랑’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
쉬운 예를 들어 보자. 파업현장에는 대부분 어김없이 구사대가 쳐들어온다. 구사대 가운데에는 노동자들도 많은데, 그들은 동료노동자들을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동료를 짓밟고 깨뜨리는 데 앞장서는 반동적인 노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나름대로 변명거리는 있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경제가 위기를 맞고 있고 실업자들이 줄을 서 있어서 일자리를 한번 잃으면 다른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운 경우에는 그들도 대단히 곤란한 처지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가족의 이익을 위해 구사대가 되어 동료노동자들을 짓밟는 반노동자적 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이진태(장동건)는 무공훈장을 타서 동생 이진석(원빈)을 전쟁터에서 빨리 벗어나게 하고 싶어 ‘남한의 전쟁영웅’이 된다. 그러다 애인이 우익에게 죽고, 동생 이진석은 국군에 의해 불에 타 죽었다고 생각해서 복수심 때문에 갑작스럽게 ‘북한의 전쟁영웅’이 되기도 한다. 이 황당무계하고 객관적으로 볼 때 전쟁광에 다름 아닌 인물에 대해 관객들이 동정심을 갖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그의 열광적인 ‘가족주의’다.
물론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진태가 전쟁영웅이 되어가면서 인간성을 상실하고 광기에 젖어드는 것을 어느 정도는 비판적으로 그려낸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 상실이나 전쟁의 야만성이 아니라 ‘광기에 젖어들 정도의 헌신적이고 영웅적인 형제애’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전쟁의 참상’을 보며 끔찍해 하면서도 맹목적 형제애로부터 비롯되는 ‘영웅적 전투행위’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몰입하게 되고, 심지어는 희열을 느끼기까지 한다.
오히려 전쟁이라는 배경은 이 전쟁을 낳았던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들을 드러내는 장치가 아니라 오직 이 ‘가족주의적 광기’를 돋보이게 만드는 환상적인 장치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지배계급이 일반 대중 속에 주입하고 있는 지배 장치인 가족주의적 정서를 자극하여 관객의 눈물샘을 솟아나게 만드는 얄팍한 장치인 셈이다. 감독이 노렸던 바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사실 부르주아 영화란 아무리 거창하고 세련되어도, 사실상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교묘하게 재생산하는 장치를 뛰어넘을 수 없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다리가 잘려나가고, 다친 병사의 배에 구더기가 득실거리며, 민간인들이 처형당해 밧줄에 매달려 있거나 여기저기에 시체가 버려져 있는 전쟁의 참상을 보며 전쟁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낳는지 생생하게 느끼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진태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동생을 살리기 위해 북한 군인들을 무수히 쏴 죽이는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99.9%의 관객들은 ‘너무나도 감동적인 영웅적 행위’라고 느꼈을 것이다. ‘형제애’를 위한 행위라면 군복 입은 북한 형제(북한군 병사들)들의 목숨을 무수히 앗아가는 전투행위도 아주 아름답게 그려진 것이다. 더군다나 그 북한 형제들은 이진태(장동건)가 전쟁터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동고동락해온 사이가 아닌가? 그런데도 바로 몇 분 전까지 함께 싸워온 형제들, 전우들, 부하들을 향해 총을 미친 듯이 내갈기는 것을 어떻게 ‘아름답게’, ‘영웅적’으로 미화할 수 있는가? 결국 이 영화는 ‘전쟁의 참상’에 대해 폭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족 이기주의에 완전히 사로잡혀 ‘야만적 전쟁광’을 ‘대단히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인물로 철저히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를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이 이야기를 구사대 노동자의 문제에 적용해보자. 구사대 노동자를 다룬 영화에서 구사대 노동자는 동생과 함께 자본가에게 강제로 끌려가서 구사대가 될 것을 강요받는다. 자본가는 이 노동자에게 파업노동자들을 깨뜨리는 데 큰 공헌을 하면 동생을 빨리 이 산업전쟁터에서 내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이 노동자는 동생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파업노동자들을 깨뜨린다. 그 과정에서 이 노동자의 인간성이 황폐해지는 모습도 그려진다. 하지만 이 노동자는 동생을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파업노동자들을 학살하는데, 이 영화는 그런 장면을 ‘인간적으로’ 그려낸다. 이런 영화는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구사대의 인간성이 피폐해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하더라도 반노동자적이며 반동적인 영화임에 틀림없다. 만약 이런 영화가 영화관에서 상영된다면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속의 북한군이 파업노동자들과 동격에 놓일 수는 없으므로 이 비유가 형식상 완전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의 기만적 성격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와 같은 철저히 반동적인 부르주아 상업영화가 ‘대박’을 터뜨리고 있는 것은 지금 한국의 자본가계급이 노동자계급을 세뇌하고 지배하는 중요한 문화적 수단이 다름 아니라 가족주의임을 보여준다. 자본가계급은 “당신의 가족만을 생각하라. 그것은 인간적인 것이다.” 하고 속삭인다. 그것의 객관적 결과는 무엇인가? “노동자는 단결해 투쟁할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굴종을 스스로 위안하고, 가족의 엄청난 생계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투쟁하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가족을 무시하는 비인간적인 사람으로 간주하게 된다. 게다가 돈과 권력을 자본가들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가족에 대한 집착은 결국 다음을 뜻한다. 자본가에게 굴종하라! 그러나 너무 노여워하거나 상처받지는 말라. 가족을 지키는 길이니까!” 이것이 자본가계급이 TV를 통해 매일매일 보내는 메시지이고, 이 메시지를 ≪태극기 휘날리며≫는 보다 극적이고 처절한 상품으로 포장하여 보내고 있을 뿐이다.
최근의 객관적 조건, 즉 대중의 객관적 처지도 중요한 영향력을 미친다. 언제 잘릴지 모르고, 비정규직 형태의 불안정한 삶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그것의 결과 가족의 위기가 계속 강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가족에 대한 대중의 집착은 더욱 커지고 있다. 게다가 그나마 탈출구였던 민주노조운동의 쇠락은 더더욱 불리한 처지로 노동자들을 내몰고 있다.
이렇게 사회로부터 구원받을 길이 없는 대중은 오직 가족에서만 피난처를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위기와 불안정성의 격화에 따라 격랑 속에 시달리는 가족이 붕괴될 위험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하게 된다. 바로 이런 고통 받는 대중이 갈망하는 탈출구를 ≪태극기 휘날리며≫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제공하고 있고, 그렇기에 대중의 가슴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며 대중은 “그래, 가족만이 그나마 이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내가 의탁할 수 있는 안전판이야.”라고 느낀다. 가족의 붕괴 가능성에 잠을 설치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그래, 가장 고귀한 것은 가족애야. 힘들어도 서로 의지하면서 이겨나가야지.”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정확히 말해서 이 영화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인민의 아편’이다.
하지만 감독 중에는 아편영화를 제작하는 이런 감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대중의 삶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문제’를 사회적으로 객관화시켜 다뤄주는 진지한 감독도 있다. ≪랜드 앤 프리덤≫으로 유명한 켄 로치 감독의 ≪빵과 장미≫에도 배신자, 파업파괴자 얘기가 나온다. 거기에서도 배신자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거기에서 배신자는 가련하고 불쌍하며 나약한 인간으로 묘사될 뿐이다. 그 영화는 배신자의 파업파괴행위를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배신자의 고백을 통해 자본주의가 선량한 노동자들을 어떻게 망가뜨리는가를 폭로할 뿐이다. 배신자의 배후에 있으면서 그의 행동을 조종하는 자본가들의 실체를 명확히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빵과 장미≫에서는 파업노동자들이 주인공이자 영웅이며, 배신자는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한 명의 보조인물로 등장할 뿐이다. 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는 남북 지배세력을 위한 전쟁에서 ‘전쟁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는 인물을 ‘영웅’으로 철저히 미화한다. ‘가련하고 불쌍하며 나약한 인간’을 형제애를 위해 목숨 바친 시대의 영웅으로 격상시키며, 남북형제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행위를 교묘하게 합리화한다. 그리고 지배자들 간의 전쟁으로 희생당했던 무수한 노동자, 병사, 가난한 민중은 이 영웅을 뒷받침해주는 조연 또는 이름 없는 엑스트라로 등장시켰다 사라지게 할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전쟁을 만들어내고 이로부터 이익을 얻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쟁을 끝장낼 수 있는지에 대해 전혀 다루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에 담긴 역사란 아무런 실체가 없는 완전 껍데기 역사일 뿐이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기만이며, 역사를 상업적 도구로 이용하는 형편없는 감독의 시야와 철학을 폭로할 뿐이다.
이렇게 보면 왜 전 영화감독인 이창동 문화부장관이 “내 생각에 한국은 오늘날 이 영화의 이념적 내용에 관해서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성숙되어 있다. 정부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했는지를 알아챌 수 있다. 그는 이 영화의 ‘이념적 내용’이 고등학생 강제입대, 우익에 의한 양민학살, 일개 병사(장동건)에 의한 대대장 살해 같은 껄끄러운 내용이 약간 담겨 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 질서를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리한 계급적 직관으로 파악한 것이다.
가족주의가 아닌 노동해방 공동체주의가 대안이다
자본가들이 “먹고 살려면 동료노동자들을 배신하고 구사대가 되라”고 강요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자본가들이 “먹고살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더 노력해서 이겨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이것도 당연히 거부해야 한다. 지금 사회에서는 경쟁에서 패배할 경우 도태될 수밖에 없고 생존조차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 냉정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의 요구대로 살 수는 없다.
노동자들은 무한경쟁 질서를 인정한 상태에서 각자의 살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 질서 자체에 대해 도전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본가 사회의 주문대로 분열되어 가족단위로 원자화되면, 노동자들의 운명은 너무나 비참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업과 가난, 비정규직이 확산되는 상태에서 노동자 가족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결국 개별 가족에 집착하는 것은 노동자 전체의 차원에서 보자면 곧 노동자 가족들을 가장 철저하게 파괴하는 지름길이다. 노동자 가족은 오직 개별적 가족주의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함께 단결하는 집단적 연대라는 전망을 통해서만 보호될 수 있다.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투쟁한다면 비인간적인 배타적 경쟁에 시달리지 않고 생존권과 노동권을 쟁취할 수 있다. 또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공장, 건물, 기계, 토지의 주인으로서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마음대로 부려먹는 질서 자체에 대해서도 근본적으로 도전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주인이 되고, 자기 삶과 사회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비로소 노동자 가족들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가족 붕괴의 위험 앞에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한 모든 문제들의 사회적 근원을 과학적으로 파헤쳐야 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사회적 해결책을 정확히 붙잡아야 한다. 가족주의라는 환상적 탈출구로 도망쳐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문제를 해결할 길이 절대 없다. 가령 자본가정부들이 “(자기 자신이나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는) 전쟁에 참가해서 공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쏘지 않으면 적이 나를 쏠 것이라는 전쟁의 논리를 받아들여 적을 열심히 쏴죽일 것인가? 아마 십중팔구는 지배자들을 위한 전쟁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스러질 것이다.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군복 입은 다른 나라 노동자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게 될 것이다.
노동자들은 지배자들을 위한 전쟁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세계 노동자들의 영웅인 독일의 칼 리프크네히트가 얘기했듯이 “적은 바로 국내에 있다”는 신념을 갖고 문제의 해결 수단을 정확히 응시해야 한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이진태(장동건)는 “둘 중 하나가 살아남아야 한다면 네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얘기하며 전쟁에 참가해서 북한 형제들을 쏴 죽이는 것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살아남아야 한다면”이라는 전제 자체를 거부하고, 남북 노동자 병사들의 단결로 무고한 청년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모든 지배자들에게 맞서면서 “단결하면 둘 다 살 수 있다”고 발상을 전환시킨다면 더 이상 무기력함이 파고들 여지는 없다. 여기에는 문제의 해결책이 너무나 투명하게 드러나 있다.
강재규 감독은 ‘이념’을 배제하고 ‘인간’(휴머니즘)을 중시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강재규 감독은 남북 노동자, 병사 형제들의 단결은 고려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형제애라는 자본가들의 이념에 충실했다. 지배세력에 의해 전쟁터로 내몰린 한 가족의 형제애를 남북과 전세계 노동자, 병사들의 형제적 단결로까지 확대시킬 수 있을 때만 휴머니즘은 실현될 수 있었다. 반동적인 길을 갈 것인가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길을 갈 것인가? 이 선택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어느 계급의 편에 서서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가 바로 이념의 핵심이다.
누구도 이런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강재규 감독처럼 이념을 배제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바로 이 사회의 지배적인 이념인 자본가들의 이념에 충실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주의’란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립에서 벗어난 제3의 길이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지배이념의 한 가지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노조운동, 노동운동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고 가족을 위해 성실히 일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자본가들이 막강한 경제력과 정치권력을 쥐고 노동자들을 가차 없이 쥐어짜고 탄압하는 것에 대해 침묵하라는 소리이지 않는가. 더 나아가 그것은 동료노동자들을 경쟁자로, 심지어 적으로 인식하고 그들을 짓밟아서라도 자기 살길을 찾으라는 소리가 아닌가. 여기에서 이념적 중립, 이념 배제란 결국 자본가들의 편에 서라는 얘기임이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따라서 노동자들은 다른 노동자 가족, 인류의 고통과 분노, 투쟁을 외면하고 오직 자기 가족에만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부르주아 가족주의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거부해야 한다. 대신 노동자가족들은 어느 지역, 어느 나라에서든지 모두 동일한 착취와 억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계급적으로 인식하고, 모든 노동자들을 ‘한가족’으로 여기며 모든 ‘착취자, 억압자들의 한가족’에 맞서 계급적 단결, 연대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노동해방 사회는 생산의 물질적 수단들이 전체 노동자들의 공동소유로 바뀌고, 노동자들이 생산을 통제하므로 배타적이고 이기주의적 경쟁 대신 조화와 연대, 협력의 원리가 사회를 지배할 것이다. 오직 그곳에서만 노동자들의 가족사랑은 사회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란 결국 노동자 가족들 모두가 모여 있는 곳이다. 때문에 바로 이러한 사회적 전망을 통해 모든 노동자 가족들이 구원받게 될 것이다. 그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족주의는 연대와 사회적 전망을 통해서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참된 의미의 가족사랑은 모든 노동자의 가족들을 함께 사랑하고, 운명공동체로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진하는 전망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 우리가 휘날려야 할 것은 ‘태극기’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 가족들의 연대, 남북노동자들의 연대의 깃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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