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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운동의 불꽃, 스파이즈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 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단 말인가!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는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을 끌 수 없으리라!!
스파이즈의 법정 최후진술이다. 스파이즈는 노동절의 유래가 된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의 시위를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노동자의 투쟁물결을 잠재우기 위해 음모조작을 자행한 자본가들의 정부는 스파이즈를 포함한 4명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노동자투쟁을 제압하고자 했던 자본가들의 의도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 반대다. 사형장에서 남긴 “우리의 침묵이 우리의 말보다 더욱 웅변적인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는 그의 예견은 현실이 되었다. 스파이즈의 말처럼 시카고에서 타오른 불꽃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오늘날 5월 1일은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 연대, 투쟁, 해방의 날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고난과 굴곡의 시기를 거치고 있는 현시점에서 우리는 다시한번 진지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2003년 한국민주노조운동은 시카고노동자들이 남긴 불씨를 되살리고 있는가? 노동절이라는 연례행사로만 시카고노동자들의 정신을 기념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해야 한다. 그리고 단호히 노동절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시카고노동자들의 비타협적 투쟁정신과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정신 즉, “내용”을 계승하는데 주목해야 한다.
불꽃으로 타오른 1886년 시카고투쟁
1880년대 미국은 최대공업국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자본투자는 10년 사이에 3배나 증가했고, 노동자의 수는 270만에서 590만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이 시기 노동자들의 대다수는 하루 12~16시간 노동에 일주일 7~8달러의 임금으로 월 10~15 달러짜리 허름한 판잣집에서 방세내기도 어려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반면 놀기만 하는 자본가들은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해넣고, 100달러 지폐로 담배를 말아피우는 유행을 즐기고 있었다. 심지어 강아지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어주거나, 애완용 원숭이의 시중을 하인들이 들도록 했다. 노동자들의 빈곤과 궁핍을 바탕으로 한줌 자본가들의 사치와 향락이 이뤄진 것이다.
드디어 미국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노동시간 단축과 임금인상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1885년 중엽에 이르면 거의 모든 도시에 “8시간노동제 쟁취를 위한 동맹”이 결성된다. 그리고 1886년에는 전체 노동인구의 10%가 넘는 61만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의 파업이었다. 자본가들의 착취와 억압이 적나라했던 만큼 노동자들의 투쟁열기는 뜨겁게 작렬했다.
1886년 5월 1일에 가까이 갈수록 대중의 투쟁은 폭발적인 양상을 띄어갔다. 마침내 5월 1일 미국노동자들은 8시간노동제를 쟁취하기 위해 총파업에 돌입한다. 시카고가 투쟁의 중심이었다.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자 기계가 멈추고 공장굴뚝의 연기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상가는 문을 닫았다. 거리의 차들도 멈추었다. 공장이 멈추자 자본가들의 이윤도 생겨나지 않았다. 누가 세상을 움직이는지, 누가 누구를 먹여살리고 있는지 뚜렷이 밝혀졌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힘을 깨달았고, “노동자의 가난은 게으름 때문이고 자본가의 부는 근면에서 비롯된다”는 거짓말을 이제 더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폭발적인 노동자투쟁에 당황하던 자본가들은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을 시작한다. 5월 3일 시카고 맥코믹 회사는 공장폐쇄를 감행했고, 용역깡패를 동원하여 농성중이던 노동자들을 짓밟았다. 자본가군대와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아 6명을 사살했다. 다음 날 경찰의 살인만행에 분노한 30만의 노동자들이 헤이마킷 광장에 모였다.
그러나 이때 노동자투쟁의 기세를 꺾기 위한 자본가들의 음모가 시작되고 있었다. 항의집회를 하던 중 갑자기 폭탄이 터졌다. 때를 같이하여 경찰의 매질과 총격이 시작되어 200여명의 노동자들이 부상당하거나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 담당검사인 그리넬은 “법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일제 검거부터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대대적인 검거선풍과 함께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체포당하거나 처형되었다. 스파이즈, 파슨스를 비롯한 파업지도자 7명도 폭탄투척 혐의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렇게 시카고투쟁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끝”이 아니었다. 투쟁의 불꽃은 전세계로 들불처럼 번져간다.
불꽃은 들불로!
시카고노동자들의 투쟁은 자본주의가 모두를 위한 사회가 아닌 자본가만의 사회임을 폭로했다. 자본가들의 지배질서를 위협할 정도로 노동자투쟁이 거세질 경우 자본가들은 전체 국민을 위한 사회라는 가면을 과감히 벗어던진다. 자본가정부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주의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노동자들에게 직접 총과 칼을 겨눈다. 언론도 자본가들의 이익을 철저히 대변한다. 당시 ≪시카고타임즈≫는 “노조원들에게 수류탄을 던져 혼을 내주어야 한다. 그러면 다른 파업 참가자들도 겁을 먹고 잠잠해질 것이다.”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신문, 방송에서 연일 틀어대는 “경제위기이므로 투쟁을 자제하라!” “노동자들의 집단이기주의에 밀리지 말라!”와 같은 “여론”은 바로 “자본가들의 목소리”에 불과하다!
시카고노동자들의 투쟁은 전세계 노동자의 국제연대가 “공동의 요구와 공동의 투쟁”으로부터 시작됨을 확인시켜 주었다. 8시간노동제 쟁취는 시카고노동자들만의 요구가 아니었다. 전세계 노동자들이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고통받고 빈곤과 궁핍에 찌들어 있었다. 이들에게 노동시간 단축은 절실한 요구였다. 시카고노동자들은 자신들만의 협소한 이익이 아닌 전세계 노동자의 공동의 요구를 먼저 내걸고 싸웠던 것이다. “8시간 일하고, 8시간 휴식하고, 8시간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공동의 요구는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된 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프랑스, 영국, 멕시코,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전세계 노동자들이 8시간노동제 쟁취를 내걸고 5월 1일 파업을 선언했고, 이를 막으려는 경찰, 군대와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시카고에서 시작된 투쟁의 불꽃은 전세계로 퍼져, 스파이즈의 예견과 같이 “자본가들의 사면팔방에서” 꺼뜨릴 수 없는 들불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씨를 되살리자!
시카고노동자들의 피로 생명을 얻은 국제 노동자연대의 불씨를 되살리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다. 그러나 얼마 전 반전투쟁에서 나타났듯이 국제 노동자연대는 다수의 한국노동자들에게 아직은 먼 나라 얘기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국제 노동자연대가 노동절에서 “국제연대를 선언”하는 일회적 행사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답은 가까이에 있다. 노동자의 원칙을 지키는 것! 노동자의 부분적 이익이 아니라 전체 노동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단결하고 투쟁하는 것, 그것이 해답이다.
노동자국제주의는 “전세계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구호와 공동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단결된 투쟁을 통해서만 실현할 수 있다. 민족과 인종의 협소한 경계선을 넘어 국제주의의 거대한 대지로 나아가자! 시카고노동자들이 남겨준 불씨를 거대한 들불로 지펴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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