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 시기 노동해방운동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들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선언≫ 발표를 첫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노동해방운동의 역사는 160여년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노동해방운동 내에서는 여러 경향이 등장하고 축출되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은 주로 ‘기회주의와의 투쟁’이라는 이름 아래 전개되었다. 기회주의적 일탈은 때로는 대중 추수주의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노동해방운동의 안내자 역할을 부정했고, 때로는 초좌익 종파주의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대중과 함께 나아가야 할 필요를 실질적으로 부정했다.
이렇게 기회주의 경향이 등장할 때마다 노동해방운동은 그러한 일탈과 동요를 제압하고 원칙을 지키기 위해 분투했다. ≪노동해방≫ 역시 기회주의 경향에 맞서 우리 운동의 원칙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이 노력은 일회적으로 것으로 끝날 수 없다. 노동운동 속에서 기회주의적 오류들은 늘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전체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조직된 불신’의 태도를 견지할 때에만 기회주의적 오류와 일탈의 위험으로부터 노동해방운동을 보호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여전히 중요하고 거듭 재확인해야만 하는 활동상의 몇 가지 문제들을 검토해보자. 여기서 살펴볼 항목들이 우리 활동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이 항목들은 현 시기에 노동해방운동이 노동자들의 일상적 삶과 투쟁에 성공적으로 결합하기 위해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들이다.
관료적인 노조 지도부를 비판하는 문제
노동조합 상층에서 관료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이제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그것이 노동운동의 발전에 미치는 악영향 역시 분명한 사실이며, 이 때문에 관료적 지도부들에 대한 전투적 노동자들의 저항과 비판 역시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관료주의는 노동운동 내에서 등장하는 기회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유형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지 관료적 지도부의 행동에 대한 평가로 좁혀질 수 없다. 관료적 노조 지도부에 대한 태도 문제는 곧 노동자대중이 아래로부터 자주적인 운동을 건설해 나가는 데 성공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노조관료들에 맞선 투쟁을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원칙에 충실한 방식으로 대중적으로 조직하지 못할 경우, 의도와 무관하게 그것은 관료들의 대리주의에 맞서 또 하나의 대리주의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상층 관료기구에 맞선 투쟁에서 올바른 태도를 취하는 것은 노동해방운동의 원칙을 올바르게 발전시키는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점에 대해 항상 주의를 기울이면서 우리 운동의 전통을 확립시켜 나가야 한다.
관료적 노조 지도부에 대한 태도와 관련하여 나타날 수 있는 오류는 양 방향 모두에서 발견된다.
하나는 노조관료들의 눈 밖에 나고 배척당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에게 굽실거리며 ‘인기관리’를 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주로 원칙 자체가 불명확한 중도주의자들, 또는 노동해방운동을 말로만 표방할 뿐인 노동조합주의 운동가들에게서 나타난다. 이들은 노동자대중의 단결투쟁을 아래로부터 건설하고 대중 스스로 투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다. 노동자대중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주로 상층 지도부만을 바라본다. 상층 지도부가 어떤 입장을 갖고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따라 투쟁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상층 지도부와 친목을 도모하고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사활적인 중요성을 부여하게 된다. 이런 경향은 심지어 그 지도부가 대중의 투쟁을 배신하고 달아나는 지경이 되더라도 쉽게 교정되지 않는다. 노동자대중의 잠재력에 대한 신뢰가 없는 이들로서는, 설사 관료적일지라도 노조 지도부를 붙잡고 있거나 그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도저히 ‘노동해방운동’이라고 볼 수 없는 유형의 운동세력으로 고착되어간다. 이른바 ‘좌파 관료들의 시녀’로 전락해서 이른바 ‘대중운동의 논리’라는 이름으로 배신자들을 감싸고 비호하는 정치세력들이 바로 거기에 해당된다.
다른 하나는, 투쟁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그 책임을 오직 노동조합 상층 지도부에게만 떠넘기며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데만 머무는 경향이다. 이 경향에 우리는 좀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경향은 보다 원칙적이고 비타협적이며 전투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하는 투사들 사이에서 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전투적인 동지들 중 일부는 특히 하나의 투쟁이 실패로 끝났을 때, 노동자대중의 심리와 객관적인 조건들을 살피지 않은 채 곧바로 노조 지도부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데에서 답을 찾으려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이러한 대처방식이 문제를 안고 있음은 물론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지도부의 배신행위에 격분하면서 그들을 끌어내려 투쟁을 지속하고자 하며, 보다 확고한 지도부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드러내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라면 올바른 방향의 선동이 약간만 이루어지더라도 대중은 곧 자신들이 나아갈 길을 찾아낼 것이고, 기존 지도부의 한계 앞에 무릎 꿇는 대신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스스로 세워낼 것이다. 투쟁 속에서 대중의 의식과 열기, 자신감이 살아있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장면을 곧잘 볼 수 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노동자대중의 의식과 투쟁열기가 충분히 살아있지 않은 경우, 따라서 원칙적이고 올바른 잣대를 이용해 자신의 지도부를 검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경우, 그 결과 심지어는 대중을 배신한 지도부를 여전히 자신의 지도부로 여기고 신뢰를 보내기까지 하는 경우라면, 우리의 접근은 한층 더 신중해져야만 한다.
왜냐하면, 기회주의적 지도부에 대한 진정한 ‘비판’은 대중 자신이 올바른 판단의 잣대를 거머쥐었을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들의 계급적 이익을 쟁취하고 방어하기 위해 반드시 사수해야만 하는 투쟁의 원칙과 방법에 대해 대중 스스로 명확해진다면, 노동자들은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지도부가 명실상부한 지도부인지 사기꾼들인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며, 누가 시키지 않더라도 지금의 지도부를 그대로 내버려둬야 하는지 새로운 지도부를 세워야 하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판단 자체가 명확해지기만 한다면, 노동자들은 충분히 행동에 나설 수 있다.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무시하는 데 익숙해진 구제불능의 대리주의자들만이 이를 의심한다.
반대로, 만약 대중이 아직 이러한 판단의 잣대를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한 상태라면, 우리의 지적과 제안들은 그 의도와 무관하게 “지도부를 음해하고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시도” 정도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의도와 달리 대중은 기회주의 지도부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이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우리는 분란을 일으키는 세력으로 간주되면서 스스로 고립을 자초하는 상황이 전개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충분히 목적의식적이지 못한 활동가들은 “우리가 그토록 이야기했는데도 대중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관료들을 내버려둘 수는 없으므로 우리만이라도 싸우자!”라는 식으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사실상 대중을 다그치는 방식으로 활동하게 된다.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의 활동은 대중이 보기에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파벌들 간의 분란’ 이상으로 해석될 수 없을 것이며, 노동해방운동과 노동자대중 사이의 거리를 더욱 멀리 떼어놓을 것이다.
그 점에서, 진정으로 목적의식적인 노동해방 투사라면 대중을 의식적으로 준비시키는 과정을 건너뛴 채 곧바로 (사실상 개인적인 방식으로) 관료적 노조 지도부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을 개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조관료들이 무슨 짓을 했는가라는 기준보다는, “우리는 대중을 얼마나 준비시켰는가, 우리가 대중 속에서 만들어낸 것은 무엇인가?”라는 기준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계획할 것이고, 관료들에 맞선 투쟁의 방식을 조절할 것이다. 노동해방 투사라면, 대중이 진정 원하는 것은 ‘지도부에 대한 이러저러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요구를 실현하고 책임질 수 있는 대안’이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을 심사숙고하고, 이와 연결되어 노조관료들에 맞선 투쟁을 조직해야만 대중적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
그럴 때에만 노동해방운동은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노동운동 속에서 건설적인 대안을 세워나가는 신뢰받는 세력이 될 것이다. 우리만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 이해하고 판단하고 자주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관건이다. 우리는 항상 대중들이 왜 투쟁이 승리하지 못했고, 어떻게 더 힘을 모아 전진해야만 하는지를 이해하고, 자신감과 사기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으로 대중과 대화해야 하며, 그 연장선에서 노조관료들에 대한 비판을 결합시킬 줄 알아야만 한다.
지난한 투쟁을 거친 노동자들이 다음 투쟁을 준비하기까지
지금 한국의 노동해방운동 앞에 놓인 최고의 과제는 노동자계급과 효과적으로 결합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행동의 ‘적절한 시점’을 파악하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일상적인 현장투쟁의 경우든 파업의 경우든, 때로는 돌격의 시점을 놓치고 주저하는 것이 범죄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지만, 때로는 숨고르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분별하게 앞으로 밀어붙임으로써 똑같이 범죄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전진이 필요한 시기인지 준비가 필요한 시기인지 크게 구분할 줄 아는 능력과 더불어, 전진에서 후퇴로 또는 후퇴에서 전진으로 전환이 필요한 시점을 파악할 줄 아는 능력은 노동해방운동의 전술을 발전시키는 데에서 아주 중요하다. 이러한 ‘시간의 기술’을 잘못 적용하면 노동해방운동이 대중과 결합하는 데에서 상당한 곤란을 겪을 수 있다.
요즘처럼 불리한 세력관계 때문에 노동자들의 투쟁이 종종 패배로 끝나는 상황에서, 이 문제는 “지난한 투쟁을 거치고 패배한 노동자들이 다음 투쟁을 대비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데에서 우리 활동의 리듬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자주 표현된다.
하나의 투쟁을 거친 후, 그 투쟁을 엄밀하게 평가하면서 교훈을 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운동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 교훈을 대중이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는 것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지나간 사건의 핵심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노동자들의 투쟁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방금 파업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온 경우라면, 소용돌이와 벌인 사투가 낳은 격심한 피로감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라는 질문에 진지하게 답을 찾으려는 시도가 잠시 뒤로 밀려나기 쉽다. 그리고 극소수의 선진 활동가들을 제외한다면, 상당한 시간이 지나 피로감을 지워내고 기운을 되찾은 뒤에야 진지한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곤 한다.
물론 상당수의 노동조합들은 피로감에 압도된 나머지 진지한 평가 작업 자체를 포기하기도 한다. 관료적이거나 무원칙한 활동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쉽게 방치한다. 그들은 이 시기에 더욱 강화되는 후진적 분위기와 압력에 간단하게 굴종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노동운동 속에서 후진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화시켜줄 뿐이다. 그럼에도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방금 투쟁을 마친 노동자들에게 지난 투쟁에 대한 엄격한 평가와 교훈의 습득과 다음 활동의 준비를 “어떤 템포로 제기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서도, 충분히 목적의식적이지 못한 활동가들은 이제 갓 투쟁을 겪고 만신창이가 된 노동자들을 다그치는 방식으로 이 문제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전투를 마친 병사들에게 필요한 휴식기간”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지금 당장 칼 같은 평가를 요구하고 다음 투쟁 계획을 제기해야만 목적의식적 활동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활동이 가능한 경우는 아주 소수이다. 노동자대중이 들끓어 오르면서 약간의 어려움도 바로 이겨내고 기운차게 전진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고된 전투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아주 제한된 성과 때문에 나타나는 낙담이나 피로감의 분위기를 바로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진지하고도 대담한 소수의 투사들로 제한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선 지난한 투쟁의 결과 만신창이가 된 심신을 추스르고 숨을 고르며 기운을 회복해야만 진지하게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대비하는 본래의 작업에 돌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대목에서 선진 투사들의 ‘목적의식적 활동’이란 ‘인내와 끈기’라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기회가 열리는 한 최선을 다해 지난 투쟁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제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과 나란히, 충분한 시간을 투자하며 노동자들이 피로감을 씻어내고 기운을 회복할 수 있도록 적절한 속도로 발걸음을 조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아주 소수의 활동가들은 건너뛸 수 있지만 대부분의 대중은 바로 건너뛸 수 없는 현실적 조건을 이해하고, 배려하면서 함께 호흡을 맞춰나갈 수 있을 때, 그 때 비로소 진정한 목적의식적 활동이 대중적으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막심 고리끼의 소설 ≪어머니≫의 한 대목을 보면 이와 관련하여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구절이 있다. “가슴엔 온통 상처를 입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 순간에 그 인간과 논쟁을 벌인다는 건 그를 모욕하는 거나 다를 게 없어.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네, 동지!”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 노동자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
앞의 문제를 일반화해 본다면,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노동자들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된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우리의 주장은 이 나라 1,500만 노동자 가운데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인 10%는 고사하고, 1%인 150,000명, 아니 0.1%인 15,000명에게조차 영향력을 갖지 못한다. 현재로서는 아주 극소수의 노동자들만이 노동해방 투사들의 대담한 주장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 운동이 강력하게 성장하고 노동자대중의 투쟁 자체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상황이라면 아마도 더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대규모로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다가설 수 있는가를 심사숙고하고, 우리가 필사적인 노력을 통해 대중에게 다가가야만 한다. 적어도 수천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우리의 주장을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계급의 0.1%조차도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해방 운동가들이 단지 ‘노동운동권’만의 정서가 아니라 더 넓은 대중의 정서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운동가들 사이에서만 익숙한 대화 방식, 우리에게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언어, 일상적으로 집회에 참여하는 극소수 투사들의 분위기에만 우리 자신을 한정한다면, 대중에게 다가가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에게 다가가는 데 무능력한 운동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말(언어)의 문제는 아니다. 노동해방운동과 평범한 노동자대중 사이에는 ‘의식의 차이’뿐만 아니라, 의식의 차이를 낳는 ‘경험의 차이’가 있다. 만약 어떤 노동자들이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뿐더러, 사장들과 정부, 언론이 주입한 그릇된 입장과 낡은 편견을 고집하려고 한다면,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가령 상당수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으로 단결하는 것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유일한 탈출구라는 점을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대신 ‘자신의 능력’을 키우는 데 열중하거나, ‘법과 경찰’ 즉 사장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에 개인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아무런 근거 없이 이런 태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만약 노동조합들이 충분히 다수 노동자의 목소리를 아우르면서 대중적인 투쟁을 이끌어내고, 계급의 힘을 끌어모아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다수 노동자들의 태도는 달라졌을 것이다. 노동조합이 명실상부하게 자신의 힘을 증명했기 때문에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대중에게 호소력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게 돌아가고 있다. 여러 노동조합들이 정규직 비정규직 취업노동자 실업노동자 모두의 이익을 방어하는 대신, 노동조합에 가입해 있고 당장 고용되어 있는 정규직 노동자의 이익만을 방어하려 하거나, 심지어는 그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때로는 진지하게 투쟁에 나서는 노동조합들도 있지만, 대부분 자본가들의 집중포화를 맞으며 커다란 손실을 입고 패배하는 결과를 맞이하곤 한다.
이런 모습들이 대중의 의식 속에 각인된다. 이것은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현실’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러한 현실이 낳은 대중의 의식을 압도할 만한 ‘다른 현실’을 아직 갖고 있지 않다. 즉 작더라도 현장에서 아래로부터 단결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고 전개함으로써 “비틀거리는 노동조합을 넘어설 수 있는 전망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화려한 미사여구나 열광적인 몇 차례의 연설로 이 상황을 뒤집을 수는 없다. 오랜 기간 누적된 대중의 경험과 그것이 낳은 의식을 압도하기 위해서는, 대중이 그만큼의 ‘새로운 경험’을 축적하고 ‘새로운 주장’과 빈번하게 접촉할 필요가 있다. 결국 노동해방 투사들은 노동자들이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 부분적인 요구만을 갖고 행동할지라도, 그것이 반동적이거나 다른 계급을 직접 강화시켜주는 것이 아닌 한, 그것을 폄하하고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과 함께 행동하고 공통의 경험을 축적하면서, 대중의 자신감을 드높일 수 있는 모든 계기를 적극적으로 창출해 나가야 한다. 이 계기들을 통해서, 대중과 공통의 경험을 하게 됨으로써 그들의 의식 속에 남아 있는 불합리한 사고나 편견을 깨뜨리고 우리의 주장이 올바름을 입증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신은 틀렸고 우리가 옳다.”는 주장을 백만 번 되풀이하는 것보다 무한히 효과적인 방식으로 대중을 우리 편으로 만들 것이다.
철학적으로 유물론을 지지하는 노동해방 투사라면 마땅히 이런 방식으로 활동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대중의 운동이 발전하는 과정 역시 하나의 ‘물질적인 운동’이며, 물질적 토대에서의 변화를 유도하지 않은 채 관념적 자극만으로 현실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물질적 토대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축적된 경험’이다. 상이한 경험에서 끌어낸 우리만의 결론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제기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한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노동해방주의자들이 의지하는 경험은 주로 노동자투쟁의 최정점의 경험(가령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나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경험)인 반면, 대중이 의지하는 경험은 지속적인 정체나 패배, 분열의 경험인 경우다. 이렇게 기반하고 있는 경험이 완전히 다른 것일 때, 노동해방주의자들의 주장은 대중에게 차갑게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대중이 직면하고 있는 경험의 토대와 동떨어진 상태에서 우리가 대중을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패를 막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확립된 원칙을 전달하려는 노력과 나란히, 대중과 함께 공통의 투쟁경험을 축적해나가고 그 경험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올바른 결론을 향해 대중이 자기 두 발로 스스로 다가설 수 있도록 안내하기 위한 노력이 필수적이다. 그 핵심은 대중의 실제 경험에 우리가 유물론적으로 두 발을 꽉 붙이고 출발하는 것이다.
대중의 운동이 발전하는 과정
다양한 투쟁의 경험 속에서 여러 주장의 옳고 그름을 견주어볼 기회가 풍부하게 대중적으로 제공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우회로를 거쳐야 한다. 판단의 재료가 부족한 이 상황에서, 대중의 처지와 나름의 경험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우리의 입장만을 강변한다면 우리의 주장은 대중에게 늘 우격다짐 내지 최후통첩 같은 것으로 다가갈 것이다.
우리는 “대중이 자기 경험을 통해 배워나가는 과정”이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노동자대중이 직접 거쳐야 할 이 과정을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는 없다. 물론 그 과정에서 노동자대중의 운동은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맑스의 말마따나, 어느 누구도 “노동자계급이 오류를 겪으며 발전해나갈 권리”를 빼앗을 수 없다.
이 점을 잊는다면 노동해방운동은 또 다른 대리주의로 굴러 떨어질 것이며, 노동해방의 이름으로 또 다른 엘리트주의적이고 대리주의적인 경향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또한 기회주의 경향에 맞선 참된 대중적 승리를 끌어낼 수도 없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대중 자신의 발전이라는 참된 성과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이다.
보론 | 왜 기회주의는 거듭 등장하게 되는가?
한 시기에 등장했다가 격퇴당한 기회주의 경향은 다음 시기에 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이것은 기회주의 경향에 맞선 노동해방운동의 취약성을 의미하는 것일까?
노동운동 속에서 기회주의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면적인 관찰이다. 노동운동이 발전해나가는 과정에서 기회주의의 등장이란, 자본주의가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종식되기 이전까지는 어쩌면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다.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사회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계급도 마찬가지다. 노동자계급의 구성원들 역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바뀐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이든 세대는 사라져가고, 새로운 세대가 태어난다. 섬유산업의 몰락 등 대규모 산업재편이 이루어지면 노동자계급 내의 기존 주력부대가 해체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격화되는 자본주의 경쟁 속에서 중간계급 하층은 지속적으로 몰락한다. 이들이 새롭게 노동자계급으로 충원되는 인구 층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변화를 감안한다면, 노동해방운동이 지난 시기의 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 내의 일부에 축적해 놓은 정치적 전통이 자동으로 계승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것이다. 특정 시기에 계급의식의 성장을 이뤄낸 경우에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성과는 마모된다. 게다가 몰락한 중간계급 하층이 노동자 대열로 편입되면서 이질적인 정신과 가치관이 노동자계급 내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다.
과거에는 주로 농민들이 몰락하고 그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이와 같은 이질적 요소의 뒤섞임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미 농민층의 분해가 상당히 진척된 오늘날에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농민의 몰락과 더불어, 수많은 직종의 도시 자영업자들과 상층 피고용인들(가령 상층 관리직, 연구직, 기술직)의 몰락이라는 과정이 결합된다.
결국 아주 다양한 기원과 유형을 갖고 있는 이질적 요소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노동자계급 내로 유입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중간계급의 몰락이 매 시기마다 되풀이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때마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전통과는 상이한 흐름이 노동자 대열 속으로 스며드는 결과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태는 노동해방운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중 추수주의 또는 초좌익 종파주의에 대항하는 원칙을 바로 세우는 데 성공했다 하더라도, 다음 시기에 또 다시 기회주의 경향이 노동해방운동 내에서 등장하는 것을 완벽하게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자대중과 전혀 교류하지 않고, 현실과 전혀 관계 맺지 않는 진공상태의 운동을 상정할 때에만 기회주의에 대한 완벽한 차단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활동은 이러한 진공 상태의 운동과는 정반대의 것이기 때문에, 노동자대중 속으로 스며드는 기회주의 경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노동해방운동이 확고한 원칙적 입장을 얼마나 굳건하게 세워놓았는가에 따라, 기회주의의 영향력이 노동대중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 것인지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 운동은 자신의 원칙을 기회주의가 등장하고 있는 현실의 객관적 토대에 대한 유물론적인 분석과 결합시키면서, 대중의 자기 발전을 실제로 추동할 수 있을 때만 성공적으로 기회주의와 맞설 수 있을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