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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출산에 비친 자본주의의 모순
원정출산이 붐을 이루고 있다. 한 달 뒤면 아이를 낳을 배부른 임산부가 한 해에 5,000명씩 가족을 뒤로 한 채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홀홀 단신으로 수천 마일을 여행해 두세 달 동안 지내면서 혼자 애를 낳고 다시 돌아온다. 이게 과연 자연스러운 일인가? 2~30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으며 한국, 대만, 멕시코 등 몇 나라를 제외하면 인류에게 아직까지 아주 낯설고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원정출산의 베일을 한꺼풀씩 벗겨 보면, 이 작은 하나의 사안에도 자본주의 세계의 모순이 겹겹이 엉겨 붙어 있다는 것을 알고 놀라게 된다.
가진 자들의 파렴치한 이기주의
원정출산으로 태어난 아이의 95%, 아무리 적게 잡아도 80% 이상이 남자아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원정출산을 갔던 산모들 대부분이 태아의 성을 감별하여 남자아이라는 것을 알고서 갔다는 것이다. 태아의 성감별은 여아 낙태로 이어질 확률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현재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도, 원정출산을 한 부유층 여성들은 이 법조차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남자아이를 원정출산으로 낳은 것이라는 점이다. 국적법이 달라 한국에서는 부모가 한국인이면 자녀도 한국인이 되지만, 미국에서는 그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미국인이 된다. 따라서 미국에서 원정출산으로 태어난 한국인 자녀는 한국 국적과 미국 국적을 모두 갖는 이중 국적자가 된다. 이 아이는 여자일 경우 22세까지, 남자일 경우에는 병역문제 때문에 18세까지 하나의 국적을 선택해야 한다. 남자아이가 만약 미국 국적을 선택한다면 그는 미국인이므로 한국에 살더라도 군대에 갈 필요가 없다.
이 경우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부잣집 아들들은 한국에서 교육도 받고, 사회복지 혜택도 받지만 정작 군복무와 같은 귀찮고 힘든 일은 회피한다. 그래서 “그들은 권리는 누리고, 의무는 안 지려 한다”, “가난한 집안 아이들만 군대간다”는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지금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국회의원, 고위관료, 자본가, 대학교수 등 지배 엘리트세력의 아들들은 온갖 방법으로 병역을 기피해 왔기 때문에, 원정출산은 가진 자들의 병역기피를 보여주는 첫 번째 사례가 아니라 천 번째 사례라고 얘기해야 할 것이다. 애국심과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강조하며 노동자와 민중의 아들들을 군대로 내모는 데 혈안이 된 가진 자들은, 정작 자기 아들들은 보내지 않으려고 별의별 짓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들의 적나라한 이기주의와 위선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진 자들만의 사회
미국 원정출산에 들어가는 돈이 자그마치 2,500만원에서 3,000만원에 이른다. 왕복 비행기 값, 출산비용, 출산 후 산후조리원비, 따로 머물 곳이 없을 경우 별도로 부담해야 하는 주거비 등을 다 포함해야 하기 때문에 만만치 않은 것이다. 캐나다, 뉴질랜드 등 다른 곳으로 원정출산을 갈 경우에도 2,000만원이 넘는다. 출산에만 이렇게 거액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소수 가진 자들밖에 없다. 김주익 노동해방열사가 이야기했듯이 노동자들은 20년 이상 자본가를 위해 희생하고도 겨우 기본급 100만원 정도 받고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며 생활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노동자들이 3,000만원을 모으려면 최소한 5~10년은 걸린다. 형편없는 저임금에 고용이 불안정한 바닥 노동자들이라면 평생을 가도 모으기 힘든 거액이다.
그런데 출산에만 2~3,000만원을 쓰는 가진 자들은 육아와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의 자녀교육에 수억 원을 쓸 것이다. 어려서부터 대학 입학까지 20여 년 동안 ‘대한민국 명품 0.1%’에 계속 끼어있게 하기 위해 고액을 들여 사교육을 받게 한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가진 자들의 자녀들은 돈 걱정 없이 토익과 토플 시험, 국가고시, 대기업과 언론사 취직시험, 해외 어학연수, 유학 준비를 해서 엘리트로 출세한다. 한때는 경제계, 정계, 법조계, 대학 등 모든 곳에서 경기고-서울대 인맥이 주도권을 쥐었다. 이제는 원정출산으로 태어나고, 어려서부터 미국인에게 영어교육을 받으며, ‘귀족학교’인 특목고와 서울대를 나오고, 미국 유학으로 박사학위를 딴 자들이 사실상 주도권을 쥐고 사회를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세상이 올 수 있다.
한편 가난한 집안 아이들은 어떤가? 탁한 공기와 귀를 찢는 소음 속에서 하루 10시간 이상 중노동을 해야 하는 비정규직 여성의 뱃속에 있는 아이들은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한 채 유산당할 수 있다. 다행히 태어나더라도 앞에 놓인 삶은 험난하기만 하다. 부모의 가난 때문에 부잣집 아이들과는 공부 경쟁에서 절대 불리하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공부를 못하고 소심한 성격을 지니게 되면 학생들로부터 따돌림 당할 수 있다. 부모가 일자리를 잃거나 빚더미에 앉게 되면 언제 ‘같이 죽자’고 얘기하고 아파트 베란다에서 등을 떠밀지 모르며, 자본가들과 정부의 악랄한 노조탄압에 항의하며 언제 아버지가 분신, 투신자살을 할지 모른다.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은 대학문을 밟더라도 아르바이트로 학비, 심지어는 생계비까지 스스로 마련해가며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실력이 뒤처지는 게 당연하다. 그들은 부모처럼 공장노동자가 되거나 기껏해야 화이트칼라 하층노동자가 된다. 그리고 빈곤가정 자녀들 다수는 대학 대신 공장에 들어가서 스무 살 때부터 자본가의 배를 불리기 위해 미친 듯이 돌아가는 ‘기계부품’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공장과 직장에서 만나는 사장, 임원이 바로 원정출산으로 태어난 부잣집 아들일 수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국가가 사회복지를 보장해준다는 뜻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자본가와 노동자를 극심하게 차별한다. 원정출산은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 천국은 없다
원정출산을 하는 부자들은 한국에서는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고, 공교육은 터무니없이 부실하기 때문에 미국 등의 국적을 얻고 무료 또는 싼값으로 질 좋은 교육을 받기 위해 원정출산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교육비로 들어갈 돈을 생각하면 원정출산을 위해 쓰는 돈이 결코 아깝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핑계대기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부자들이나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에 불과하다. 물론 한국에서는 사교육비가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부잣집에서도 약간은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반면 미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 미국의 초중고에서 싼 비용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원정출산 비용 및 자녀나 가족이 미국을 오가는 데 드는 교통비와 미국에서 생활하는 데 드는 비용은 상당히 높다. 결국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부자들만이 조기유학 등을 염두에 두고 원정출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달 벌어 한달 생활하기도 빠듯하며, 기껏해야 늘어나는 전세금을 충당하기 위해 저축하는 게 고작인 노동자들에게 원정출산, 자녀들의 조기유학 같은 것은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으로는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이지만 만약 노동자들에게 자녀들을 미국에 가서 교육시킬 기회가 주어졌다고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미국교육은 한국교육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한국교육이 형편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교육이 ‘질 좋은 선진교육’, ‘전인적 인간을 육성하는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미국 고등학교의 총기난사 사건, 마약, 학습능력 저하 등은 미국교육도 심각하게 병들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미국은 ‘세계평화’라는 껍데기 구호 아래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패권을 위해 언제 어디든 군대를 출동하여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세계 제일의 깡패국가이기 때문에, 미국교육은 이런 분위기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미국이 이라크를 폭격하여 무고한 이라크 민중들을 학살하던 날,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끔찍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난 것을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만 얘기할 수는 없다. 설사 원정출산지로 미국이 아니라 캐나다, 뉴질랜드 등 다른 나라를 택하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 나라들 역시 소수 가진 자들만을 위해 굴러가는 모순투성이 자본주의 사회이고, 자본주의 사회의 교육이란 자본가들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지배엘리트를 재생산하는 제도이기 때문에 모두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나아가 원정출산은 이민을 위한 ‘닻’이라고 비판받는다. 미국, 캐나다, 유럽 등지로 이민을 가든 말든 그건 그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병들어 있는 만큼 다른 나라도 병들어 있다. 살벌한 경쟁, 극심한 개인주의와 인간소외, 더럽고 치졸한 정치꾼들의 이전투구, 부정부패 등은 한국사회 특수성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 지긋지긋한 한국에서 벗어나 이민을 가면 훨씬 더 풍요롭고 행복한 천국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보수언론들도 경고하고 있다. 단, 한국만큼 외국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깊게 다루지는 않으며, 특히 그 문제의 뿌리가 자본주의에 있다는 것을 철저히 감춘 채로 말이다.
게다가 이민도 계급, 계층에 따라 차별적일 수밖에 없다.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나라에서는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고, 고급기술과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만 이민을 받아들인다. 따라서 노동자들에게는 그런 나라로 이민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이민을 갈 수 있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아주 부유한 자본가라면 이민을 가서도 공장을 차려 그곳 노동자들을 착취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약사, 의사, 엔지니어 등 고급기술과 기능이 있는 중간계급 상층 이상의 사람이라면 그 나라에서도 자기 능력을 이용해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화이트칼라든 블루칼라든 노동자라면 이민을 가도 결국 노동자로서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팔아야만 생계를 유지할 것이다. 오히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임금, 비인간적 대우만이 아니라 인종차별, 정치적 소외 등 새로운 측면에서도 고통이 가중될 것이다. 결국 이민은 노동자들에게 탈출구가 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선택해야 할 것은 어떠한 형태든 현실도피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부당한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다.
원정출산이 가르쳐주는 이 사회의 비밀과 탈출구
부자들의 경우도 두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부류로서 재벌 등 막대한 재산을 가진 대자본가들은 자녀들에게 ‘재산상속 및 관리인’으로서 회사를 경영할 수 있도록 기본교육을 받고, 학교 간판을 얻게 하지만 반드시 뛰어난 전문지식을 습득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그들의 힘은 전문지식이 아니라 재산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부류로서 의사, 약사, 판사, 검사, 변호사, 교수, 전문 건축기사 등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애초부터 재산이 많아서 그것으로 먹고 살기보다는 고급 전문지식으로 어느 정도 넉넉한 삶을 꾸려가는 가진 자들이기 때문에, 자녀들에게도 자신과 같이 교육경쟁에서 최선두를 달려 전문지식을 습득해야 살아남는다고 가르친다. 자기 자식의 병역기피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육을 위해 원정출산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층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이 물려주는 ‘재산’은 돈이나 부동산이라기보다는 지식과 기술, 학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세계는 어디든지 학벌 중심 사회이지만 특히 그 정도가 심한 한국에서는 두 번째 부류의 부자들도 최고의 학벌, 가령 외고, 과학고 등 특목고와 서울대 간판을 자식들에게 주기 위해서는 정말 ‘피 말리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자기 자녀에게 최고의 학벌을 선사하기 위해 그들이 투자하는 돈, 시간, 노력은 보통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한달에 몇백만원을 쏟아 부으면서 고액과외를 시키기도 하며, 1년 365일 휴일도 없이 1분 1초까지 아껴가며 공부하게 한다. 그들의 자녀들도 쌩쌩 돌아가는 입시교육 속에서 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가가 강요하는 살아남기 경쟁에 희생당하고 있다면, 그들 또한 안정되고 편안한 지위를 지키기 위한 피 튀기는 경쟁 속에서 조금은 괴로워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노동자들에 비해 엄청나게 편안한 삶을 살고 있다. 그 점에서 보면 그들의 고통과 노동자들의 고통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큰 격차가 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이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완전한 주인은 되지 못하며, 무한대의 이윤증식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는 자본의 단순한 도구 이상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이 시대에 상당수의 노예주인들 또한 또 다른 노예 즉, 돈과 자본과 경쟁의 노예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밖에 없다. 가진 자들의 지배이데올로기를 일방적으로 주입하고, 영어, 수학 점수로 학생들에게 서열을 매겨 통제하는 교육은 땀흘려 일하는 생산자들의 위대함을 가르치며 전인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을 육성하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타인과 대립하고 짓밟게 하는 살벌한 경쟁 시스템은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대와 협력의 질서, 오직 선의의 경쟁만 인정하고 그 경쟁이 새로운 차별을 낳지 않도록 주의하는 공동체 질서로 대체해야 한다. 사회와 격리된 채 지배자들의 이익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로서 재생산되고 있는 군대는, 사회 한 가운데에 있으며 사회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주도하는 부대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착취와 억압을 철폐하는 것과 함께 군대를 소멸시켜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노동해방으로 나아갈 때만 실현가능하다. 따라서 원정출산에 대해, 노동자들은 이렇게 당당하게 외쳐야 한다. “가라, 자본가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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